<63>
작은어머니가 무릎 위에 얹은 두 손을 꼭 말아 쥐었다. 무릎에 닿은 티 테이블이 잘게 떨렸다.
"말씀하세요."
"아무래도, 네 작은아버지랑 갈라서야 할 것 같아."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작은아버지의 말이라면 군말 없이 따르던 작은어머니였으니까.
"무슨 일 있으셨어요?"
"무슨 일이야 늘 있었지. 그냥 무시하고 살았던 것뿐이고."
작은어머니가 힘없이 웃었다.
"내가 이혼한다니까 안 믿어지니?"
"워낙 갑작스러워서요."
"나 때문이 아니라 애들 때문이야. 이대로 있다간 종대 아빠가 얼마 안 남은 재산까지 다 날려먹을 거 같아서. 남은 거라도 지켜보려고."
작은어머니가 전한 작은아버지의 근황은 놀라웠다. 사업을 접은 후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 벌써 2년째라고 했다.
사람은 늘 성실하고 꾸준해야 한다고 강조하던 작은아버지가 도박이라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사람이 욕심이 한도 끝도 없어. 너희 집만 해도 그래. 진즉 너한테 돌려줬어야 하는 건데…."
"집은 아버지가 작은아버지께 물려주신 거잖아요."
"아니야. 그런 게."
작은어머니가 고개를 저으며 풀어놓은 이야기는 이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즈음, 공장 사정이 좋지 않았고 꽤 많은 빚이 남아있었다. 혹시나 빚 때문에 집까지 넘어갈 것을 우려한 연희의 아버지가 우선 작은아버지에게로 집 명의를 돌렸다. 하지만 혹여 빚 문제가 해결된다면 연희에게 그 집을 꼭 다시 돌려달라고 부탁했다고.
그런데 뜻하지 않게 공장이 비싼 값에 팔리는 바람에 빚을 갚고도 돈이 남았다. 그 무렵 의식이 흐려지던 아버지를 이용해, 작은아버지는 남은 재산을 모두 자신의 명의로 돌렸다. 아버지는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사인을 하고 인감도장을 찍었다. 그런 정신으로도 공장을 정산하고 남는 돈이 있으면 연희에게 꼭 넘겨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고 했다.
당부는 지켜지지 않았다.
"미안하다. 좀 더 일찍 말해줬어야 했는데 종대 아빠가 너무 무서워서…."
작은어머니가 몸을 떨었다.
작은어머니를 지그시 바라보던 연희의 눈이 한 곳에 붙박였다. 오늘 작은어머니는 평소 입지 않던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었다. 여름에도 긴팔 옷을 고수하는 건 여전했으나, 통이 넓은 소매의 옷을 입은 건 처음 봤다.
연희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소매 부근, 더 정확히는 소매 안쪽에 드러난 작은어머니의 상처였다. 노랗게 변한 멍울과 긁힌 자국. 시선이 닿은 곳을 의식한 작은어머니가 팔을 뒤로 감추었다.
"상담해 주신 변호사님이 때린 사람이 나쁜 거지 맞은 사람은 죄가 없다는데, 아직 좀 부끄럽네."
얼마나 오랫동안 일어난 일이었을까?
"…작은아버지가 그런 거예요?"
작은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남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너희 아버지 그나마 거동이 가능하셨을 때 말이야. 먼저 찾아와서 설득한 사람이 있었대. 공장 빚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너한테 집이라도 남겨 줄 수 있게끔 해야 하지 않겠냐고."
설마.
"종대 아빠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자기 만난 건 비밀로 해달고 부탁했었다더라."
"누군지도 들으셨어요?"
작은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이름까지는 듣지 못했다고 했다.
"이후로는 만난 적이 없어서 종대 아빠도 잊고 있었나 본데 두 달 전쯤인가? 그 사람한테 연락을 받았나 봐. 왜 집을 너한테 돌려주지 않았냐고…. 당시 약속한 녹음 기록도 갖고 있다고 했대."
그렇게 치밀한 사람이 누군지 연희는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늘 연희를 돕고 싶어 했다.
"그때부터 종대 아빠가 부쩍 불안해하기 시작했어. 얼마 전에는 내가 너한테 무슨 언질이라도 준 거 아니냐면서 갑자기 따지더라고. 아니면 그 사람이 이제 와서 어떻게 알고 연락을 하겠냐고."
작은아버지는 도박에 여윳돈을 모두 털어 넣은 것도 모자라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았다고 했다. 그런 마당에 집을 돌려주어야 할지도 모르게 생겼으니 마음이 급해졌을 것이다.
그날 흥분한 작은아버지는 작은어머니의 몸과 마음에 수많은 상처를 남겼다. 작은어머니는 처음 겪은 일도 아니라고 담담히 말했으나, 연희는 알았다. 처음만큼이나 아프고 두려웠으리라는 것을.
"이렇게 되고 보니까, 그동안 숨길 게 뭐 있었나 싶더라. 사실을 말한다고 내가 죽는 것도 아닌데. 말 안 한다고 상황이 더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
"매는 미리 맞았으니, 이참에 이야기해 줘야겠다 싶어서."
작은어머니는 거듭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하나도 섭섭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작은아버지의 의심만으로 생긴 크고 작은 상처들을 보면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작은어머니는 부탁했다. 애들한테는 비밀로 해달라고, 제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으로 기억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동시에 일자리를 구하면 자신이 집값의 일부라도 어떻게든 갚아 나가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비밀은 지키겠지만 돈을 돌려줄 필요는 없다고 했다. 새로운 빚을 지우지 않아도, 작은어머니는 충분히 힘들어 보였다.
* * *
각종 언론매체에서 정 회장의 건강 상태에 대한 보도가 쏟아졌다. 평소 혈압 문제로 고생했다던 정 회장이 일주일 전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진 것이다. 아직까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탓에, 곧 현진그룹의 경영 구조가 재편되지 않겠냐는 추측성 발언도 함께 쏟아졌다. 선우를 비롯한 정 회장 일가 모두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지금 연희가 만날 사람은 그중 하나였다.
투명한 문을 열자, 카페 중앙에 붉은 정장을 입은 여자가 보였다.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볼 때마다 선명한 기억으로 남는 사람이었다.
선우의 가짜 동생, 현아였다.
"그쪽이 먼저 날 보자고 할 줄은 몰랐네요. 번호는 선우가 알려준 건가?"
사실 현아의 번호는 수정을 통해 알게 되었다. 선우에 대한 조사를 시작할 즈음, 수정이 건넸던 선우의 최근 통화 내역에 가족들의 번호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으로 기록해두면서도, 설마 진짜로 연락할 일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수정 역시 똑같은 생각을 했기에 전화번호 노출을 꺼리지 않았을 터였다. 선우의 가족과는 접촉하지 말라는 수정의 명령이 아니었더라도, 연희 또한 그들과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의 행방을 좇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것저것 따지고 잴 여유가 없어졌다.
"원래 내가 아무나 상대 안 해주는데, 선우 어디 있는지 안다고 해서 와본 거예요. 할 말이 있던 참이라서."
선우가 어디 있는지 안다고 한 건, 물론 거짓말이었다. 현아가 선우가 있는 곳을 이미 알고 있거나, 선우의 행적에 관심이 없다면 먹히지 않을 얘기였다. 다행히도 현아는 둘 다 해당하지 않았다. 덕분에 연희는 현아와 대화할 기회를 얻었다.
"아! 수정이한테는 오늘 만나는 거 얘기 안 했으니까 너무 걱정 말고요."
연희의 얼굴에 드러난 불안함을 잘못 해석한 현아가 생글대며 말했다.
"그런데 인연은 인연인가 봐. 수정이가 선우 찾는 일을 시킨 직원이 하필 댁일 건 뭐야? 수정이 걔도 머리가 참 나빠요.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격 아니에요? 그쪽이 선우 위치를 안다고 한들, 말을 해 주겠냐고요."
만남의 대상으로 선우의 가족 중 현아를 선택한 이유가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현아는 늘 선우와 연희의 관계에 대해, 자신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자랑하고 싶어 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말해줄 수 있을까? 제가 모르는 선우의 속내, 혹은 속사정에 대해서.
"그래서, 그 노인네가 어디다 숨겨둔 거래요?"
수정이 휴대폰에 시선을 두고 물었다. 휴대폰 화면에는 정 회장과 현진 그룹의 추후 움직임을 예측한 시사 논평이 떠 있었다.
청룡각에 올 때마다 할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느라 여념이 없었으면서, 정 회장이 없는 자리에서는 '노인네'라고 칭하는 게 우스웠다.
"알려 드릴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대신 전해드릴 수 있겠지만요."
현아가 눈매를 좁히며 연희를 관찰했다. 거짓말인지 아닌지 가늠하려는 것 같았다. 다행히 연희는 포커페이스에 능한 편이었다. 타고난 능력도 있었지만, 뭣 같은 사회생활과 결혼 생활이 그 기술을 완벽에 가깝게 만들었다.
속내를 파악하는데 실패한 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우한테 말 전할 수 있다는 건, 확실해요?"
"네."
연희가 허리를 바짝 곧추세웠다. 반대로 몸을 늘어뜨린 현아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긴, 설사 정확히 있는 곳까지는 모른다고 해도 내가 손해 볼 일은 없죠. 선우랑 연락만 닿을 수 있으면 되는 문제니까. "
현아가 기억을 더듬듯 연희 너머를 응시하며 말했다.
"생각해 보면 선우의 돌발행동에는 항상 댁이 끼어 있었죠. 댁이 선우한테 특별한 존재라는 건 인정해요. "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돌발행동이라니.
"정말로 선우 위치를 안다면, 남들한테도 쭉 그렇게 비밀로 하기나 해요. 나만 모르는 게 아니라면 상관없으니까."
현아가 화사하게 웃었다.
"…네."
당연한 말이었다. 설사 선우가 있는 곳을 진짜 알게 되더라도, 의뭉스러운 이 가족들에게는 절대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나도 선우 얼굴이 보고 싶어서 찾은 건 아니니까 내 말만 잘 전달해주면 돼요."
"……."
"그 문제는 좀 이따 얘기하고."
현아가 재미있다는 눈으로 연희를 관찰했다.
"사실 그쪽한테 전화가 온 순간 아차 싶었지 뭐예요? 이 상황에서 선우가 누구한테 연락을 한다면 댁일 가능성이 농후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깨닫고 나니까 궁금해지더라고요."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현아가 연희 쪽으로 바싹 몸을 기울였다. 얼음처럼 시린 눈이 연희의 눈을 마주했다.
"선우가 그쪽한테 어디까지 말하던가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뭐라도 일단 말해 봐요. 선우에 대해 아는 거 아무거나."
최근 선우에 대해 조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을 읊었다.
"…입양된 거요? 도영주 씨가 친동생이라는 거?"
"그런 뻔한 거 말고."
언젠가 선우와 비슷한 문답을 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자신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달라던 절박한 얼굴이. 반면 지금 마주하는 얼굴에는 상대를 시험해 보는 이 특유의 오만함과 흥미로움이 오묘하게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