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혜진
- 죽은 사람 얘기는 하기 싫었는데.
인사를 건넸을 때만 해도 가볍던 혜진의 말투는, 현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더없이 무거워졌다.
"죄송하지만 뭐라도 단서가 필요해서요."
- 선우의 행방과 큰 관계는 없을 거야. 그래도 듣고 싶어?
"네. 그래도요."
혜진이 한숨을 쉬고 나서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주변 소음이 일시에 사라졌다. 혜진이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 듯했다.
- 남들은 나랑 현우랑 친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어. 학생회에서 함께 일해 보니까 적당히 말이 통하기에 마주치면 잡담이나 좀 나눈 정도지. 방글방글 웃기는 잘해도, 쉽게 곁을 내주는 애는 아니었거든.
혜진이 묘사하는 현우의 모습은 대학에서 본 선우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 그때 내가 방송부에도 속해 있었거든. 어느 날 뜬금없이 현우가 뭘 제보하고 싶다는 거야. 다음날 옥상에 와서 동영상 촬영을 좀 해주면 안 되겠냐고. 숨을 위치까지 알려 주면서.
그날 현우가 짚은 곳은 옥상 모서리 부근, 커다란 화분이 밀집한 곳이었다. 시야에 잘 띄지 않지만 몰래 촬영은 가능할 만한.
약속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지만 별다른 긴장감은 없었다. 어차피 학생들이 하는 제보라고 해봐야 생각보다 별것 아닌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기다리는 동안 음악이나 듣자 싶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러다 한참 뒤에 웅성대는 소리를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을 땐.
- 선우가 맞고 있었어. 아주 심하게.
선우가 쓰러지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광경이 보였다. 이어폰을 껴도 들리는 타격음에 혜진의 몸이 벌벌 떨릴 정도였다.
- 그리고 거기 현우가 있었지. 때리지는 않았지만 맞는 쪽도 아니었어.
나가서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너무 무서워서 말릴 수가 없었다. 저에게까지 어떤 위해가 가해질까 봐.
그렇다고 눈을 돌리지도 못 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을 들었다. 동영상 촬영 버튼을 찾았다. 그들이 옥상을 벗어나는 대로 경찰서에 찾아가 동영상을 제출할 생각이었다. 녹화 시작음이 날 테지만 폭행 현장에서 나오는 커다란 소음에 묻힐 터였다.
띵.
작은 소리가 났을 때, 현우가 혜진이 있는 쪽을 흘긋 보았다. 반짝이는 눈이 섬뜩했다. 혜진을 확인한 현우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선우와 다른 무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그날 현우가 죽었어. 선우를 괴롭히던 애랑 같이 옥상 아래로 떨어질 뻔했는데, 그 애는 구해냈지만 현우는 그러지 못했지.
혜진이 찍은 영상은 현우의 어머니인 현정이 가져갔다고 했다.
- 현우 어머니는 나한테 증인이 되어 달라고 했어. 현우가 선우를 구하는 걸 본 사람이 필요하다고. 기왕이면 예전부터 현우가 선우를 도우려 했었다고 말해주면 좋겠다고도 했어. 죽은 현우가 오래도록 좋은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게 도와주면 좋겠다고.
- 선우를, 현우가 오래도록 아낀 친구라고 소개하고 싶다고 했어. 그걸 핑계로 가족들을 설득해서 선우를 입양하고 싶다고 하셨거든. 선우의 가정환경이 무척 좋지 않다는 걸 그때 알았어.
혜진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힘들었을 선우를 돕고 싶었다고 했다.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한 살림과 폭력적인 아버지. 선우는 그야말로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상황에 처해 있었으니까.
끝내 혜진은 현우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주고 말았다. 학교 관계자에게도, 기자들에게도, 그날의 주동자들을 기소한 검사에게도 현우가 훨씬 전부터 선우를 보호해 왔다고 말한 것이다. 당시의 혜진은 그것으로 모두에게 행복한 결말을 줄 수 있다면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 현우에 대한 증언과 동영상 덕분에 우리 집에서 과한 보상을 받았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어.
혜진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업체는 본래 다른 대기업의 4차 협력사였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급격히 규모가 커진다 싶더니 어느새 현진전자의 1차 협력사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번 돈은 부동산 투자에 쓰여 다시 거대한 재화로 되돌아왔고, 혜진의 아버지는 곧 지역에서 알아주는 유지가 되었다.
사건이 있고 얼마 후 여름방학이 되었다. 2학기가 되어 학교에 돌아왔을 때, 선우는 다른 지역으로 전학을 갔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런 사건이 있으니 같은 학교를 계속 다니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죽는 장면을 본 충격은 혜진에게도 가볍지 않았다. 한동안 악몽에 시달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지 못해 심리 상담을 받기도 했다. 쉬이 친구를 만들지도 못했다.
동훈을 만나기 전까지 그랬다.
- 대학에서 선우가 날 알아봤을 때 솔직히 놀랐어. 난 선우랑 직접 이야기해 본 적은 없었거든.
현우는 이미 죽었으니, 혜진과 선우를 잇는 연결고리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 선우가 먼저 혜진에게 아는 척을 해왔다. 혹시 OO중학교를 나오지 않았냐고.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반갑다며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현우나 그날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 그래서 내가 목격자였다는 건 기억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더라고.
술에 취한 어느 날, 혜진이 먼저 그 날의 이야기를 꺼냈다. 선우가 맞고 있을 때 곧바로 말리지 못해 미안했다고 울면서 사과를 했다. 선우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덤덤히 다 안다고 했다. 그리고 현우와 닮은 미소를 지었다.
- 이상하지? 이젠 대단하고 좋은 집에서 잘 지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선우는 아직도 그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어. 어쩌다 우리 아빠가 엄마한테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혜진이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현우 기일마다 내가 찍은 영상을 그 어머니랑 같이 수없이 돌려본다는 거야. 일주일 내내 잠자는 시간 빼고.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일지 상상이 안 가. 현우가 선우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되새긴다는 이유라는데, 말이 돼? 선우에게는 그날의 공포와 죄책감을 몇 번이나 되풀이되는 거잖아.
현우의 어머니에게 넘긴 영상은 혜진에게 있어 마음의 빚이 되었다. 현우의 죽음이 선우에게 그랬던 것처럼.
* * *
그동안 알아낸 사실을 수정에게 보고했다. 민감한 몇 가지 사항과 사적인 안타까움은 배제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고하려 애를 썼다.
돌아온 반응은 싸늘했다.
"그런 걸 연희 씨가 왜 신경 써요? 내가 찾는 건 그 사람의 행방이야. 사연이 아니라."
뭐, 대부분 다 아는 이야기를 새삼스레…. 수정이 중얼거렸다.
"지나간 사연이 궁금했으면 애초에 내가 연희 씨한테 말을 해 줬겠지. 선우 씨 휴대폰에 남아 있던 다른 번호가 누구 거였는지."
예상한 대로, 선우의 개인 휴대폰에 남긴 두 개의 번호 중 남은 하나는 현우의 것이었다.
수정의 관심 밖에 있는 선우의 아픈 과거는, 온전히 연희 혼자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았다. 어쩌면 선우는 결국 이렇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상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작은어머니의 돌발행동까지는 선우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갑자기 놀랐지?"
작은어머니가 연희에게 먼저 연락해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에요."
연희가 집에 찾아온 작은어머니에게 율무차를 내밀었다. 작은어머니가 연희의 집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살림살이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것이, 대신 정리라도 해주고 싶은 기색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많이 피곤해 보이네? 무슨 일 있어?"
작은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몇 년을 같은 집에 살았으면서도 그들은 아직까지 서먹한 사이였다.
"작은어머니도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고개 숙인 작은어머니가 테이블 위에 놓인 율무차에 시선을 고정했다.
"혹시 율무차는 안 좋아하세요? 자주 드시는 거 같아서 내봤는데. 다른 걸로 드릴까요?"
"아니야. 좋아해."
연희가 일어서자 작은어머니가 서둘러 팔을 내저었다.
"그냥, 네가 나한테 뭔가를 대접해준다는 게 신기해서 그래. 아직도 내 눈엔 어리게만 보이는데. 이혼하고 나서 혼자 잘 버티는 것도 그렇고…. 장해서."
작은어머니가 연희와 눈을 맞추었다. 이 또한 처음이었다. 작은어머니는 예전부터 연희를 어려워했는데, 연희가 결혼해서 집을 나간 이후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