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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mission
"계속 이렇게 지지부진하면 곤란해요."
연희를 사무실로 불러들인 수정이 매섭게 질책했다. 손톱을 씹으며 입술을 잘근거리는 모습이 몹시도 초조해 보였다.
사설탐정은 물론, 경찰 쪽에까지 손을 쓴 것 같았는데 별다른 성과가 없기는 매한가지인가 보다. 고로 수정은 잔뜩 독이 오른 상태였다. 연희에게 붙여주었던 심부름꾼은 며칠 전 미약한 말대답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출입국 기록이 없으니 국내에 있는 건 분명한데, 대체 왜 아무도 못 찾아내는 거죠?"
선우의 행방을 뒤진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그간 연희에게는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햇볕에 얼굴이 그을렸고 체력이 강해졌다. 이제 웬만큼 걸어서는 지치지도 않는다.
그럼 뭐하겠는가. 실마리가 안 보이는데.
선우의 차에 설치되었던 블랙박스는 각종 장식품과 함께 사라졌고, 내비게이션은 복구할 수 없이 파손된 상태였다고 했다.
집에서 이용하던 데스크톱 컴퓨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트북은 선우와 함께 사라졌다. 집 내외부에 설치된 CCTV까지 미리 꺼놓았다는 걸 보면 작정하고 숨은 게 확실했다.
호텔 쪽에서도 별다른 정보는 얻지 못했다.
선우는 공식적으로 장기출장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기업의 대외비에 대해 아무 직원이나 붙잡고 함부로 물어볼 수는 없을뿐더러, 직원들 역시 선우의 행방은 물론 잠적 사실조차 모를 확률이 99%였다.
그나마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캐낼 수 있을 만한 이 매니저와 한 비서는 각각 홍콩과 영국으로 출장을 갔다고 했다. 두 사람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아 메시지를 남겨 놓았으나 답변은 오지 않았다.
* * *
"당장 그만둘 수도 없고."
연희가 선우의 집 앞에 서서 읊조렸다. 어제까지 쉬지 않고 전화를 돌린 여파일까. 아직도 목소리 끝이 갈라져 있었다.
견고한 복층형 단독주택은 유달리 높은 담장에 둘러싸여 있었다. 타인의 침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지, 스스로를 가두기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수정에게 받은 카드키를 꺼내 대문을 열었다.
"왜 이렇게 정원이 넓어."
한 시간 전까지 인천 땅을 누비던 종아리가 욱신거렸다. 인천에 위치한 현금인출기 CCTV에서 선우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잡혔기 때문이다.
진즉 떠났을 걸 알면서도 그 근처를 몇 바퀴나 배회했다. 행적이 발견되었다는 곳마다 찾아가서 몇 번이나 반복해 온 일이었다.
끼익.
오전에 전달받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사방이 하얗기만 한 집의 내부는 넓고도 휑했다. 거실 벽에는 각 호텔 지점의 평면도가 걸려 있었고, 장식장에는 호텔 건물의 미니어처가 전시되어 있었다. 네 개 중 세 개의 방이 책과 문서로 가득 차 있었다.
도무지 생활감이라고는 없는 집이었다. 전면 유리창으로 보이는 정원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바깥을 감상한 적이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쉰다는 거지?
지나치게 깨끗하고 단정했다. 무엇 하나 흩뜨려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엎어진 액자 하나만이 유일하게 비뚤어진 것이었다. 액자에 담긴 사진에서는 어린 남학생 하나가 그린 듯 예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연희는 워낙 낡아서 치워도 별 티가 나지 않는 제 집과 깔끔하기 그지없는 선우의 집을 비교해 보았다. 객관적으로 볼 때 선우의 집이 훨씬 더 좋은 곳임이 분명한데도 두 집 중 한곳을 고르라면 지금 자신의 집을 택하고 싶었다.
선우의 책상 첫 번째 서랍에는 휴대폰이 하나 들어 있었다. 오래전에 단종된 폴더 폰이었다. 켜봤자 통화기록도, 문자 기록도 없는 휴대폰에는 기본 화면에 문구 하나만 덩그러니 떠 있었다.
'잊지 말 것.'
그 휴대폰에 연희의 전화번호가 있었다.
달리 특이하다고 할 만한 것은 찾지 못했다. 밤새 집안 곳곳을 뒤졌으나 역시나 선우가 현재 있을 만한 곳에 대한 단서는 없었다. 결국 선우의 유년 시절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우선 선우가 졸업한 학교를 방문할 작정이었다.
수정이 다른 사람을 시켜 이미 조사를 마친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선우가 졸업한 유명 사립 고등학교에는 선우를 기억하는 교사들이 꽤 남아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선우의 행적을 아는 이는 없었다. 과거의 선우에 대한 칭송만 잔뜩 들었다.
"일 년 늦게 입학해서 친구들과 어울리기 쉽지 않았을 텐데도 스스럼없이 잘 어울렸지."
"선우 학생 부모님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학교 일에 발 벗고 나서주셔서 감사했죠."
"성적 좋고 집안 좋고 인물까지 좋아서 역대 최고로 인기 많은 학생회장이었을 걸요."
몇몇 제자에게 전화를 걸어 선우 소식을 물어봐 준 이도 있었으나 소득은 없었다. 지금까지 선우와 연락이 이어진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이 기억하는 선우의 모습은 고등학교 때와는 달랐다. 선우를 기억하는 교사 자체도 거의 없었지만 기억을 하더라도 있는 듯 없는 듯 무색무취의 학생이었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나마 선우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곧 퇴직 예정이라는 나이 지긋한 체육교사였다.
"공부도 중간, 예체능도 중간, 다 고만고만했어. 워낙 조용한 데다 늘 주눅이 들어 있으니 눈에 뜨일 리가 없지. 자세히 보면 곱상하게 생긴 것 같은데 표정이 어두우니 그마저도 가려졌고."
"그런데도 기억을 하시네요?"
"내가 체육교사잖아. 운동신경이 유달리 뛰어난 것 같아서 눈여겨봤었지. 특히 달리기는 선수해도 좋겠다 싶을 만큼 잘했어."
아까, 예체능도 중간 수준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자 교사가 덧붙여 설명했다.
"학교 끝나고 혼자 운동장을 돌 때는 그렇게 빨리 뛸 수가 없는데, 이상하게 학교 체육 시간이 되면 일부러 딱 반 애들 평균 정도로만 뛰더라고.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것처럼."
"왜 그랬을까요?"
"난들 아나. 하여튼 나한테는 눈에 밟히는 데가 있는 애였어. 맘도 약한 것 같았고. 그런 애가 어쩌다 그런 큰일을 겪어서…."
어디선가 어험, 하는 기침소리가 들리자 교사가 말을 멈추었다.
"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네. 아가씨가 너무 걱정하는 것 같기에 나도 모르게."
그렇게까지 걱정하는 걸로 보였나? 연희가 제 얼굴을 덧없이 쓸어보았다.
"졸업 앨범 좀 봐도 될까요?"
고등학교에서도 그랬듯, 선우가 졸업하던 해의 앨범을 뒤져 보았다. 단체 사진 속의 선우는 티가 날 정도로 다른 이들과 외떨어져 있었다. 친한 친구를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무언가가 빠진 기분이 드는데….
"차라리 전학 오기 전 학교를 찾아보지 그래요? 여기선 겨우 한 학기 밖에 안 다녀서 누구랑 깊이 사귈 새가 없었을 텐데."
생각났다. 죽 둘러본 앨범에는 선우의 동창이라던 혜진의 사진이 없던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중학교 때도 언니랑 친했어요?"
- 딱히 그렇지는 않았는데….
갑작스런 질문에 혜진은 꽤 놀란 눈치였다.
- 무슨 일 있어? 네가 먼저 선우 얘기 꺼낸 거 처음이잖아.
그동안 선우의 이야기를 피해 왔던 게 버릇처럼 굳어져서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선우에 대해 묻는 것보다 훨씬 더 어색했다. 선우의 행방을 좇으면서도 지인에게는 비밀로 한 이유였다.
늦었지만 있는 그대로 모두 털어놓았다. 갑자기 선우가 사라졌다고. 그의 약혼자가 연희를 사설탐정처럼 써먹고 있다고. 지난 한 달간 서울부터 부산까지 선우를 찾느라 안 가본 곳이 없다고.
그것도 못할 짓이겠다며 혜진이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 이유가 그것뿐이야?
"네?"
- 다른 사람 때문에 억지로 찾고 있는 거냐고. 네가 찾고 싶은 게 아니라.
"가장 큰 이유는 그렇죠."
- 그럼 못하겠다고 해. 네가 심부름센터 직원도 아니고 이상하잖아.
이런 일까지는 도저히 못하겠다고 버텨볼까, 이 이상한 술래잡기에서 자신은 빼달라고 말해볼까,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나 실제로 수정에게 말해 본 적은 없다. 왜냐하면,
"대체 그 사람이 나한테 왜 이러는지 궁금하기도 해서요."
수정의 말대로, 선우에게는 사적으로 친하게 지낸다고 할 만한 사람이 전무했다. 대학 시절 내내 붙어 지내던 동훈, 혜진과 연락을 끊은 것만 봐도 그렇다.
유학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에서의 인맥을 수소문해 봤지만 사적으로 연락을 이어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비즈니스 목적이라면 모를까. 남자고 여자고 예외가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잘 끊어내는 이가 별안간 제게는 왜 그랬을까.
밀어내도, 밀어내도 자꾸만 다가왔다. 끝내는 사랑까지 입에 담았다. 그래도 무시하려고 했는데, 자신의 고물 휴대폰에 연희의 번호를 남기고 수정의 의심을 사게 만들었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선우가 자꾸 걸리는 이유는 그가 지펴놓고 간 이 몹쓸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선우와 엮일 일이 더는 없을 줄 알았는데. 결국 온종일 선우에 대한 생각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찾아내서 왜 이러는지 따지고 싶어요."
혜진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 그게 선우를 찾는 이유의 전부는 아닌 거 같은데?
크흠.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 솔직히 걱정도 되지?
역시 혜진은 예리했다.
"…조금은요."
사지 멀쩡한 어른이 자취 좀 감췄다고 이러는 게 우습긴 하지만.
선우를 생각하다 보면 가끔 보이던 불안하고 공허한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또한 계산속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선우가 연희보다 훨씬 크고 강한 사람임이 분명한데도 그랬다.
밥은 제대로 챙겨 먹고 있는 건지, 설마 노숙이라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말도 안 되는 걱정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토록 실망하고 화가 났었는데. 어느새 걷어낸 미움 아래에는 안쓰러운 마음이 남아 있었다.
"갑자기 사라졌는데 무사히 잘 있는지 정도는 확인해 줘야죠."
- 너도 마음 약해서 큰일이다.
"제가요?"
- 그러니까 자꾸 휘둘리지. 한때 선우랑 잘 되길 바랐던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넌 어쩜 그렇게 남자 보는 눈이 안 변하니?
"…그냥 최소한의 인류애예요."
- 그래, 그렇다고 치자.
숫제 놀리는 투였다.
- 행방을 모르는데 걱정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 잠시 좀 쉬고 싶었던 게 아닐까? 답답할 정도로 자신을 단속하면서 살았던 애니까.
혜진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연희는 불안하기만 했다. 수정이 알려주지 않은 부분까지 수색지점을 넓히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