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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점 (59)화 (61/98)

<59>

그때는 제법 놀랐다. 선우가 대놓고 '싫다'는 말을 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네가 유학을 안 가면 네 동생도 못 가게 되는 건 기억하고 있니?"

선우의 친동생은 욕심이 참 많았다. 작년부터 해외 유학을 보내달라며 은근히 선우를 압박해 왔다. 선우가 거절하자 집을 찾아오기까지 했었다. 안 그래도 선우를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어 했던 아버지는 옳다구나 이 기회를 잡았다. 선우와 그 동생을 묶어 유학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애써 만든 기회를 선우 때문에 놓치게 된다면, 그 동생은 거품을 물고 쓰러질지도 모른다.

"제 동생만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어떻게든 은혜는 갚겠습니다."

"어떻게 갚을 건데? 네가 가지게 될 것 중에 온전히 진짜로 네 소유인 것은 하나도 없을 텐데?"

이 집안을 벗어나는 순간 빈털터리가 될 선우였다. 계산이 빠른 인간이니 이쯤에서 포기할 때도 되었건만, 선우는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네가 왜 이러는 걸까…."

이유를 추려보던 어머니가 선우의 눈앞에서 문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 듣는 업체 이름이 들리고, 곧 선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적당히 위기감 느낄 정도로만 해요. 아예 망하게는 하지 말고. 아예 없어지면 내가 흔들 수 있는 패도 사라지는 거잖아."

선우가 아끼는 모든 것들은 선우의 약점이 되었다. 그래서 선우는 언젠가부터 아끼는 것을 만들지 않았다. 모든 것에 무심하고 무감한 것처럼 굴었다. 그러다가 끝내는 정말로 모든 것에 무뎌졌다. 무엇이 손 안에서 빠져나가든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다. 선우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이 집안에서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그런 선우가 욕심을 갖게 만든 것도 모자라, 진심을 감추지도 못하게 만든 존재라니 대단하지 않은가.

어머니의 입가에 승리감이 깃든 조소가 걸렸다.  

"주요 거래처 파악해서 더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해 주겠다고 하면 되잖아요."

문 실장이 몇 가지 방법을 더 제시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대량 발주를 넣었다가 중간에 취소해 줄 수 있는 업체를 구했다는 이야기였다. 고개를 끄덕인 어머니가 한 가지 지시를 추가했다.

"참, 그 애 말이야. 내가 알 만한 기업에 입사했다는 소리는 안 들리게 해줘요. 최대한 선우랑 마주칠 일 없게."

여자의 취업길이 자연스럽게 틀어 막혔다. 그때만은 선우도 좀 다르게 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머니를 붙들었다. 감히 어머니의 몸에 손을 댄 것 또한 처음이었다.

어머니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어머니가 선우의 손을 떨쳐 내고 몸을 굽혀 물었다.

"이래도 더 버틸 수 있겠니?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

반항은 기대한 것보다 허무하게 끝났다. 이후 선우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즉, 어머니의 말에 토를 달지 않게 되었다. 재미없었다. 아주 잠깐씩, 눈빛이 날카로워질 때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 * *

"나 좀 거기 데려다줘. 적어도 인사는 하게 해 줘…. 제발."

만취한 선우가 헛소리를 해댔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아까 선우의 전화번호로 연락이 왔을 때부터 예상한 일이었다.

선우의 휴대폰으로 현아의 번호를 누른 사람은 선우의 직장 동료였다. 선우가 만취해서 누구를 찾는데, 여자 친구인 것 같아서 최근 통화목록 중 가장 위에 뜬 여자의 이름으로 전화를 해 본 것이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현아가 얼마 전 선우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진짜' 연애로 바쁜 자신 대신 선우에게 논문 과제를 떠넘기기 위해서였다.

평소라면 코웃음을 치며 길바닥에 내버리라고 했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선우의 새로운 약점을 알아낼 수 있는 기회라는 직감이 들어서였다.

이번엔 좀 재미있을까?

선우가 있는 술집으로 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료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선우의 전화번호부에는 이름으로만 저장되어 있을 테니, 여자 친구라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건방진 것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선우의 차를 운전하면서, 뒷좌석에 앉은 선우가 술에 취한 채로 한참 웅얼거리던 이름을 되짚어 불렀다.

"지연희라는 거지?"

그 이름 석 자에 선우의 의식이 돌아왔다.

"현아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

"네가 지금까지 애타게 찾았잖아. 좋아한다며? 걔 없는 데는 가기 싫다며?"

선우가 하지도 않은 말을 보태서 확인해 봤다. 과연 반응이 있었다. 고개를 떨어뜨린 선우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인사라도 하고 싶어. 연희 있는 데로 좀 데려다 줘."

선우답지 않은 부탁이었다. 현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선우가 휴대폰을 꺼내들고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러 번 거는 것 같았으나 상대는 받지 않았다. 선우가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대답을 들었는지, 선우가 졸업한 대학교로 가달라고 했다.

"싫은데?"

"…어머니가 내게 준 자료, 너한테 넘길게."

선우가 가진 자료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단 걸 알았나 보다. 어머니가 선우를 위해, 보다 정확히는 할아버지 눈에 선우를 들게 하기 위해 손수 만들어준 자료였다. 그래야 선우를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쉬워질 테니까.

그런 거 안 넘겨도 적당히 사정하면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바보 같기는.

현아는 웃었다. 역시 재미있을 것 같았다. 재미가 없으면 재미있게 만들면 되고.

* * *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

선우가 오물을 털어내듯 얼굴을 벅벅 닦아냈다. 현아의 입술이 닿은 부분이었다.

나는 뭐 좋아서 한 줄 아나?

여자와 인사를 끝내자마자 눌러두었던 술기운이 다시 올랐는지 선우가 비틀거렸다. 이때다 싶어서 장난을 좀 쳤다.

선우가 많이 취하긴 했던지, 뺨에 현아의 입술이 닿는데도 피하지를 않았다. 심지어 멍한 눈으로 "연희야…."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잠깐만 그대로 있어봐."

선우와 정면으로 얼굴을 맞댔다. 가까이 있자니 술 냄새가 풍겨서 역했다. 하지만 잠깐의 인내로 오랜 즐거움을 얻을 기회였다. 눈을 감은 선우에게 바짝 붙어 서서, 속으로 30을 세며 악착같이 버텼다.

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던 순간, 선우가 정신을 차렸다. 황망하게 뜬 눈이 우스웠다. 선우가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를 때 자주 하는 짓이었다. 그런다고 달라질 게 있나?

여자 앞에서 '오빠'라고 불러봤다. 선우의 표정이 말할 수 없이 일그러졌다. 그런 선우에게 무언가를 따지던 여자가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여자를 따라가려는 선우를 붙잡았다.

"오늘 여기 찾아온 거 어머니한테 얘기할까?"

그간 당해봐서 알 것이다. 기분 내키는 대로 화를 냈다가는 어머니에게 어떤 식으로 일러바쳐질지. 그 뒤의 몫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선우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여자를 좇던 움직임이 일시에 멈추어졌다.

그래야지. 말 잘 듣는 선우. 우리 어머니를, 아버지를, 할아버지를 무서워하는 선우. 돈과 배경 없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 선우.

가족들 말 한마디면 죽는 시늉도 해야 하는 가여운 선우.

어차피 선우는 여자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현아도 자신이 본 것을 어머니에게 말할 테니까.

집을 벗어날 용기도 없으면서, 그 여자가 가고서야 뺨을 닦고 화를 내는 태도가 비굴해 보였다.

"네가 '마지막 인사'하고 싶다며. 그래서 내가 그 '마지막'을 만들어 준 것뿐이잖아. 뭐가 문제야?"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선우가 기막힌 웃음을 흘렸다. 와중에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너 먼저 가라. 난 인문대 건물에 잠깐 들렀다 갈 테니까"

"그럼 기다리지, 뭐."

"먼저 가라고."

"어머니한테 전화할까?"

잠시 망설이던 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잘 생각했어. 너 때문에 쟤네 집 망하면 미안할 거 아냐."

선우는 금방 돌아왔다. 짧은 시간 무얼 했는지는 몰라도 두 눈이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모처럼 드러내는 격한 감정이 의외로웠다. 그뿐일까. 보조석에 앉자마자,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차에 놓인 쿠션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그 쿠션에 도청장치가 설치된 건 모를 것이다. 어머니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었다.

어차피 망가지면 새로 사서 설치하면 그만이었다. 쿠션을 선우의 차에 놓는 것쯤이야 선우의 동생을 시키면 될 일이었다. 동생이 부탁하는 일은 무엇이 되었든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선우니까. 그 거지같은 집에 동생을 남겨두고 혼자 빠져나왔다는 죄책감이 꽤나 큰 것 같았다.

선우에게서 받을 서류들을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대주주 신상명세서와 관계도, 그룹 계열사 실거래 장부는 꼭 챙겨야지. 할아버지도, 어머니도, 저를 미더워하지 않는 것 같지만 저야말로 이 집안의 진짜 핏줄이 아닌가. 굴러들어온 뻐꾸기 새끼보다야 백번 나을 터였다. 그동안 선우가 죽은 오빠 자리를 차고앉아 자꾸만 제 몫을 앗아가는 게 보기 싫었는데, 앞으로 계속 정보를 공유해준다면 조금은 덜 미워질지도 모르겠다. 손에 넣은 정보는 선우를 둥지에서 굴러 떨어뜨리는데도 이용되겠지만, 시기를 좀 늦추는 아량 정도야 베풀 수도 있으니까.

"얌전히 시키는 대로만 살아. 어머니가 널 결혼 장사 시장에 내놓을 생각도 하는 것 같던데, 영광으로 여기고."

기분이 좋아진 김에 충고도 해주었다. 어차피 잠깐 지나가는 연애에 저렇게 열을 낼 건 뭔지 모르겠다. 몇 년 지나면 까맣게 잊을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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