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58-2)화 (60/98)

Hidden 4

"김선우,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들려오는 소문에 현아가 코웃음을 쳤다.

무슨 바람인지 선우가 연애질을 시작했단다. 집에서 할당한 경영 수업 과제는 예전보다 더욱 늘어났는데, 잘 시간도 부족한 인간이 여자까지 만나고 돌아다닌다고? 게다가 그 여자들이 수시로 바뀌기까지 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진짜 연애를 하긴 하는 거야?

그럴 인간이 아닌데.

선우가 입양된 시기는 그룹 안팎이 한참 시끄러울 때였다. 외삼촌의 성 추문이 터진 시기와 오빠의 사망 시기가 기묘하게 맞물렸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온정이 넘치는 기업 이미지를 만드는 데 선우를 이용했다. 그냥 도구로 남아있어야 할 선우는 점점 할아버지의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 선우가 '감'이 좋다나?

처음에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봤자 죽은 오빠의 자리를 잠시 차고앉아 있을 뿐, 머지않아 내쳐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선우는 악착같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보이며 존재감을 키워갔다.

선우가 언급한 몇 가지 사업 아이템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가족들도 더는 할아버지의 말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신뢰가 깊어질수록 선우는 더욱 바빠졌다. 다른데 신경을 쓸 여유가 있을 리가.

하긴, 그때 그 여자와는 분위기가 좀 이상하긴 했지.

어느 밤 골목길에서 선우와 함께 있던 여자를 떠올렸다. 일전에 가족과 함께 갔던 식당에서 본 여자였다.

제 구두에 음식을 엎은 게 일부러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니 화가 나기도 하고 가소롭기도 하고.

아는 사이였단 말이지?

그날 보자마자 어머니에게 고해바쳤다. 뜻밖에도 어머니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전 선우가 누군가의 뒷조사를 한 게 걸려 어머니에게 한참 붙들려 있었더랬다. 그 일도 여자와 연관이 있었다고 했다.

하여튼 멍청했다. 문 실장은 어머니에게 고용된 사람이었다. 저한테 몇 번 친절히 대해줬다고 홀랑 믿고 일을 맡겼을 줄이야. 문 실장이 어머니에게 보고할 게 뻔하지 않은가?

비소를 머금은 어머니가 중식당에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 여자가 아직 일하는지를 묻고는 당장 그만두게 하지 않으면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굳이 할아버지 손을 빌리지 않더라도, 중식당 하나쯤 문 닫게 하는 일은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선우는 따져 묻지 않았다. 하긴,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에 오버하는 것도 우습긴 했다. 그렇게 끝이 났다. 큰일이라도 벌어질까 하고 기대했는데 아쉬웠다.

선우가 이 여자 저 여자 가리지 않고 만나고 다니기 시작한 게 딱 그 즈음부터였다. 그렇다고 아예 아무나 만난 것은 아니었다. 주로 어머니와 친목이 있는 집안의 딸과 교제했다. 누구 하나 선우를 욕하지 않았다. 다만 오래 만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놀 줄을 모른다나? 대놓고 막 노는 것보단 나았지만 대체 뭐 하자는 건가 싶었다.

선우는 어머니의 얼굴을 생각해서 격을 맞춘 거라고 했지만, 현아의 눈에는 확연히 보였다. 선우에게는 그 나이 또래의 성적인 호기심이 일절 보이지 않았다. 선우의 무감한 얼굴을 볼 때마다 현아는 골목길에서 마주쳤던 여자를 떠올렸다. 그 여자를 보던 선우의 눈에는 열망 비슷한 것이 비쳤던 것도 같아서.

갑자기 선우가 유학은 가기 싫다고 반항했을 때도 그 여자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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