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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자선행사 기획안을 전달받았을 때, 수형 문화재단의 행사 담당자는 분명 '서주광'이라는 이름의 팀장이라고 했다. 담당하는 이가 누구든지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함께 전달받은 이메일 사본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잊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하단에 적힌 발신인의 이름이 '지연희'라서.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심장이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첫 회의가 있다는 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호텔 1층 로비를 서성거렸다. 이따금 부사장의 얼굴을 알아본 직원들이 인사를 했지만 제대로 받아주지도 못했다. 호텔의 회전문이 돌아갈 때마다 기대하고 실망했다. 아직 약속 시각이 한참 남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이윽고 낯익은 옆얼굴이 보였다.
뒤를 돌아 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컨디션을 핑계로 남은 저녁 일정을 취소했다. 출장지에서 돌아오고 있을 이 매니저에게 전화를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 회의는 제가 대신 참석하죠."
"부사장님이 왜요?"
이 매니저가 당황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이 매니저에게만큼은 솔직히 대답할 수도 있었으나 아직은 이유를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 진작 말씀을 해 주시죠. 회의 시간 맞추려고 서둘러 왔는데 이제 와서 말 바꾸시면 어떡합니까. 혹시 다른 일 시키시려고 이러는 거면…."
"그냥 퇴근하라고."
"넵."
말이 바뀔까 무서웠는지 이 매니저가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근처의 대기석에 앉아 잡지로 얼굴을 가렸다. 잡지 위로 드러낸 눈이 한 사람을 쫓았다. 차마 지우지는 못하고 가슴 깊이 묻어둔 사람이었다. 남몰래 안부를 알아보는 것도, 도울 일을 찾는 것도 그녀의 결혼식이 치러진 뒤로는 그만두었다.
하지만 막상 얼굴을 보자, 타인으로 남겠다는 다짐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그저 뒤를 쫓고 싶었다.
하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약혼식까지 앞둔 지금, 연희를 사적으로 만난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정 회장 일가는 쓸데없이 많은 돈과 권력을 이용해 사람을 괴롭히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자신이야 견디면 그만이지만, 연희에게까지 손을 뻗친다면.
선우가 연희 곁에 남지 못한 이유였다. 떠나면서 바란 것은 단 하나였다.
연희만은 잘 지냈으면 했다.
잘, 살았으면 했다.
자신이 없으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 본 연희는 많이 지쳐 보였다. 어쩌면 착각일지도 몰랐다. 연희의 행복에 자신이라는 존재가 꼭 필요했으면 하는 마음이 불러일으킨 환상일지도.
결국 연희의 행복을 빌었던 행동마저 자기기만에 불과했던 걸까.
벽에 걸린 그림들을 꼼꼼히 둘러본 연희가 로비 중앙의 거대한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신들의 왕'이라는 제우스였다. 양아버지인 대호가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해 세운 것이었다.
대호가 부사장으로 있을 때, 자신이 제우스의 현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만하게 굴었다지. 하지만 그 근엄한 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선우는 제우스의 다른 이름을 생각했다.
이방인의 신.
선우는 가족에게조차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이방인과 나그네를 환대하라던 제우스의 아량은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혼자 떠돌다 객사하는 것만이라도 피하고 싶었을 뿐.
하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머물다 사라진 존재로 서서히 잊히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이것 봐. 몇 년을 안 봐도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잖아, 그럼 괜찮은 거잖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다. 한 번 목을 축이고 나니 무시하고 있던 갈증이 폭발하듯 온몸을 덮쳤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렀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졌다. 안 보고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미 결혼한 사람에게, 연인이란 이름은 바라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고 웃는 걸 볼 수 있는 정도면 충분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는 그랬다. 마주할수록 더 욕심이 생길 줄도 모르고. 스스로를 언제든 멈출 수 있을 줄만 알고.
회의실에서 연희를 마주했을 때, 연희의 손에 반지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유심히 살펴보았다. 반지 따위야 번거로워 충분히 빼놓고 다닐 수도 있는데도. 그게 무슨 대단한 희망이라도 되는 양 그랬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한 비서에게 지시했다.
"지연희 씨, 기혼인지 미혼인지만 좀 알아봐 줄래요?"
다른 것도 궁금했지만 우선 하나만. 연희는 뒷조사를 썩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결과를 듣고 안도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연희의 아픈 과거에서 희망을 찾다니 비열하기 그지없었다. 어느새 정 회장 일가를 닮아버린 걸까? 그래도 상관없었다. 희망이 있다는 게 중요했다.
실질적으로는 호텔에서 전부 도맡으려던 약혼식 겸 자선바자회 행사에 연희의 역할을 만들고, 일의 효율을 늦추기만 하는 정기 회의 일정을 매주 잡았다.
일을 핑계로 대긴 했어도, 혹여 연희가 자신과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만으로 피해를 입을까 봐 걱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우가 사업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면서 사적인 감시가 덜해진 것에 기대를 해보기로 했다.
선우가 회장의 눈에 듦에 따라, 이제 그들이 휘두르고 싶어 하는 것은 선우의 사생활보다는 사업상의 행보일 테니까. 연희와 만날 때마다 자신의 동선을 지우는 정도면 되지 않을까?
더구나 지금의 선우는 예전보다 성장해 있었다. 정 회장에게 훈련받은 것을 토대로 비밀리에 아트테크 사업을 벌여 돈을 꽤 불렸고, 최근에는 NFT(*위/변조가 불가능한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한 암호화폐의 일종. 그림, 음악, 예술작품 등에 고유한 인식 값을 부여해 원본의 희소성을 유지할 수 있음) 사업으로까지 발을 넓혔다.
벌어들인 돈으로 꾸준히 현진 그룹의 주식을 사 모으는 것도, 대주주 중 하나인 'J네트워크'사의 오 회장과 은밀히 교류하고 있는 것도 추후 현진에서 버려질 경우 협상의 패로 삼기 위함이었다.
자신과 주변의 안위를 위한 최소한의 보호장치였다.
"정확한 집 주소 좀 알아봐 줄래요? 동, 호수까지."
한 비서에게 두 번째 지시를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연희가 아팠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