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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den 3
정 회장의 서재는 일견 감옥 같아 보였다. 벽의 삼면은 사람을 짓누를 것 같은 크기의 대형 책장이 둘러싸고 있었다. 나머지 한 면은 각종 기밀문서가 보관된 금고와 널찍한 책상이 위치했다.
그곳에 의자는 하나뿐이었다. 물론 정 회장의 것이었다.
날카로운 눈빛의 정 회장 앞에서, 선우는 늘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했다. 빈틈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책들을 보다가 압살당할 것 같은 공포감에 몸을 떤 적도 많았다.
허나 그것도 한때다. 이제 어리지 않은 선우는 낡은 책 먼지 냄새를 털어내며 코를 찡긋할 뿐이다.
서재는 그 쓰임에 어울리지 않게 몹시 어두웠다. 천장에 달린 백열등이 켜지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어쩌다 공간을 밝히는 불빛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정 회장의 책상 위에 놓인 붉은 갓등이 내뿜는 것이었다. 정 회장과 그 바로 앞에 선 사람만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인, 좁고도 희미한 것. 등 뒤에서 누가 언제 칼을 꽂을지 예상할 수 없도록.
불안과 공포.
그것이 정 회장이 사람을 다루는 무기였다. 무기는 피를 타고 내리 세습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나, 정 회장만큼 적절하게 사용하는 자가 또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서재는 정 회장의 회의실이자, 본인의 손익과 관련된 사람들의 약점을 보관한 곳이기도 했다.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제한되어 있어, 선우의 양부인 대호나 양모인 현정마저도 이곳에 출입해 본 적이 없었다. 정 회장의 아들과 친손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입을 믿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다른 이의 약점을 아는 것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만큼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어서였다.
그래서 거꾸로 선우는 서재에 드나들 수 있었다. 정 회장이 아끼는 피가 흐르지 않아서, 설사 위험에 처해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을 인물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언제든 버릴 수 있는 명목상의 손주가 선우였다.
"요즘 네 마음대로 장난질을 치는 경우가 있는 모양이더구나."
"……."
"그림 말이다."
들어오기 전 몸수색을 끝냈으니 녹음기가 없다는 걸 알 텐데도, 정 회장은 어떤 용도의 그림을, 어떻게 장난친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정 회장의 정신이 흐려지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다.
"적절한 그림을, 적절한 곳에 옮겨놓는 것뿐입니다. 회장님처럼요."
선우도 모호하게 대답했다. 정 회장에게 배운 방법이었다.
정 회장은 소문난 예술품 컬렉터였다.
공식, 비공식적으로 사들인 수집품이 수조원대에 달했다. 대외적으로는 예술을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이라고 홍보했지만, 알고 보면 재산을 부풀리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정 회장이 사 모은 작품은 여러 장치를 통해 그 가치가 상승되기 마련이었다. 충분히 가치가 상승한 예술품은 사업적 이해관계에 놓인 이들에게 현금 대신 건네지기도 했다.
처음 정 회장이 선우에게 가르친 일이 이것이었다.
유학 시절에는 해외의 이름난 경매장에 드나들며 그 가치를 가늠해 보게 했다. 유명 갤러리스트와 옥셔니스트, 전문 업체 관계자 등을 붙여가며 작품의 가격을 불리는 일련의 과정을 꼼꼼히 가르쳤다.
다음으로는 그 작품을 정치인이나 사업가, 법조계 혹은 언론계 인사에게 건네는 일을 맡겼다.
이곳에 발을 디딘 이래 선우는 언제나 이용 도구로서 존재했다.
이제 다른 삶을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정상적인 삶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 그 다른 삶이 자신에게 맞을지 아닐지도 모르겠고. 연희와 있을 때 맛보았던 잠시간의 휴식은, 그저 꿈인 것 같았다.
남은 것은 끝없이 자신을 갈고닦으며 포장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그렇게 살았다. 썩은 속을 감추고,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가 더 있다는 듯 굴어야 했다. 무력하게 병든 개는 잡아먹힐 뿐이므로.
"내가 그동안 너를 너무 봐주었나 보구나. 기어오르는 걸 보니."
"조금만 더 봐주세요. 아직은 제가 필요하시잖아요."
어투는 공손했으나 뼈가 있는 말이었다. 정 회장이 혀를 찼다. 하지만 선우의 말이 맞았다. 아직은 선우를 버릴 때가 아니었다.
"그 그림은?"
최 회장과 안 의원이 똑같은 이유로 애타게 찾던 그림이었다. 수형 그룹 이사장의 죽은 아내가 갖고 있던, 어떤 기록도 갖고 있지 않은 그림. 아무도 모르게 갤러리 수장고에 잠들어 있던 그림.
그들을 불러내 그림에 대한 대가를 최대한 뽑아낸 일은 정 회장의 시험이기도 했다. 오직 두 사람만을 대상으로 한 경매에서 낙찰에 성공한 사람은 안 의원이었다.
정 회장은 안 의원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고, 이후 현진 그룹 후계자 승계 과정에서 있게 될 약간의 범법행위들은 그가 잘 감추어 줄 것이다. 설령 생각보다 일이 급하게 진행된다 해도 상관없었다. 안 의원은 지금도 주변 정치인들과 법조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굳이 이수정을 통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관장님께서 도움을 많이 주셔서요."
안 관장의 외동아들은 재계에서 알아주는 망나니였다.
최근에 운영을 시작한 상업 갤러리 역시 예술에 관심이 있어서 연 것은 아니었다. 있는 집 자제들이 공식적으로 모여 질펀하게 놀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약에 취해 남들에게 감춰야 할 사업 기밀까지 내키는 대로 떠들곤 했다.
뒤처리를 핑계로 곁에 있던 선우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안 관장은 아들이 개과천선한 줄 알고 있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특히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안 관장은 갤러리에 보관은 하고 있으되, 탈세를 위해 정식 등록되지 않은 언니의 개인 소장품들을 은근슬쩍 아들의 갤러리에 내주고 있었다.
이사장 가족 누구도 큰 관심을 갖지 않아 가능한 일이었다. 그 그림을 저렴하게 얻게 된 사람은 선우였으니, 이사장의 가족들에게 감사할 일이다.
반대로 안 관장의 아들은 선우에게 감사하고 있을 것이다. 요즘 그가 일으키는 자잘한 사고들이 매스컴은커녕, 제 부모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게 뒤를 봐주는 사람이 선우니까. 각종 인맥과 돈을 활용해서.
정 회장을 대리해 여기저기 퍼뜨린 그림 값이 이렇게 쓰이고 있는 셈이다. 선우가 판단해 실제로 퍼뜨릴 그림의 종류나 수량을 변경한 적도 있지만, 정 회장의 심기를 거스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이런 경고 정도로 끝날 수 있는 것이고.
"가족이 애써 모은 귀한 작품들을 그렇게 쉽게 넘겨서야….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핏줄이라도 함부로 믿으면 안 되는 거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 회장이 하는 말이라 우스웠다.
핏줄에 집착하기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 회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정 회장이 선우를 안채로 불러들이는 것은, 선우의 남다른 업무성과를 고려한다고 해도 다른 이들에게는 꽤 이례적인 일로 손꼽혔다. 안채에서 선우에게 허락된 공간이 오로지 서재 하나인 줄도 모르고.
선우의 양어머니인 현정은 이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로 보았다.
툭 하면 정 회장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캐내려 했다. 선우는 극히 일부의 정보만 건넸다. 회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내내 시달리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만. 자신에게 유리한 선에서.
어쨌든 선우는 늘 정 회장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안겨 왔다. 영양가 있는 작품들을 어이없도록 싼값에 들고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안 관장이 그 가치를 정확히 가늠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몰래 감정가를 의뢰하면 무엇 하겠는가? 그 감정가를 뒤에서 정한 사람이 선우인 것을. 선우만의 힘으로는 어림없었겠으나, 정 회장의 사람들을 이용하면 못 할 일이 없었다.
이렇게 평탄하게 일이 풀릴 줄 알았다면 굳이 번거로운 약혼 절차도 필요 없었을까? 아니다. 중간에 수정이 없었다면 안 관장과 그 아들이 이렇게까지 쉽게 경계를 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이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조금은 견딜 만해졌다.
게다가 이 관계에서 그림이 차지하는 위치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수형과의 지분스왑(*서로 상대의 주식을 교환하는 것)을 통해 상호 우호 지분 확보를 노리는 정 회장, 수형 산하 건설사와 합작해 대형 리조트 단지를 건설하고 싶어 하는 대호, 수형이 가진 해외 판로를 이용하고 싶은 현정의 요구가 고루 맞아떨어져 수정이 선우의 '공식적인' 연인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수정이 곁에 두기 피곤한 타입이었다는 점이다. 제멋대로인 시간관념은 둘째 치고, 앙칼진 목소리로 내뿜는 소음이 들어주기 힘들 정도였다.
적당한 계기를 만들어 수정을 해외로 보낸 것은 그래서였다. 지금 그녀 옆에 자리할 '비공식적' 남자 친구는 선우가 까다롭게 고른 사람이었다. 수정을 구슬리는 솜씨도, 눈치껏 행적을 보고하는 솜씨도 제법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내년 초에는 결혼을 시킬까 했다만, 아무래도 좀 지켜봐야겠구나. 그 집안 망나니 녀석 때문에 시작된 검찰 조사 규모가 예상보다 더 커질 모양이야. 괜히 엮여서 좋을 것 없지."
수정의 오빠인 수형이 약물에 취해 광란의 질주를 벌인 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약물 문제만 있었으면 대충 덮을 수 있었을 텐데, 약물을 산 자금의 출처가 회사 돈인 게 밝혀지면서 문제가 커졌다.
"조금 더 지켜보고 파혼 여부를 결정해 알려주마."
정 회장이 수형 그룹을 도울 생각이 없는 건 확실해 보였다. 검찰 쪽에서 피해 갈 수 없는 증거를 확보했거나 수형 재단에서 뽑아먹을 이익이 당초 계산한 것보다 별로였다는 의미이다.
"우선은 평소대로 잘 대해주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결국 파혼을 명하게 될 텐데.
왜 모르겠는가? 수형의 범죄와 관련된 증거를 검찰에 넘긴 사람이 선우인데.
자잘한 범죄 은폐 이력부터 문화재단 예산이 어떻게 허위 기재되고 어떻게 모기업으로 흘러들어갔는지 꼼꼼히 파악해 넘겼으니 쉽게 빠져나오진 못할 것이다.
모든 게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 단 하나의 문제만 빼고.
파혼을 한다 해도 연희의 마음을 쉽게 얻을 수는 없을 거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