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55)화 (56/98)

<55>

그 부분은 수정이 자신의 취향에 맞춰 추가 변경이 거듭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최종 디스플레이는 수정의 판단에 맞춘 것이라고 봐야 했다.

뒷마무리를 도맡아 했다는 서 팀장이니 모를 리가 없는데 무슨 트집일까.

"특히 플라워 데코."

아!

연희의 의견이 가장 많이 반영된 부분이긴 했다. 당초 연희가 계획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욕을 먹기에는 억울했다. 행사 성격에도, 다른 장식물들과도 꽤나 조화롭지 않았던가. 행사장에서 귀빈들이 칭찬하는 소리를 여러 번 듣기도 했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러게 내가 괜찮은 플라워 업체 추천해 줬잖아. 왜 도와준대도 못 받아먹어?"

…이 얘기가 하고 싶었던 거구나.

"내 친척이어서가 아니라, 진짜 실력 있는 업체라 추천한 거였다고. 우리 회사에서 연락 갈 테니까 특별히 신경 써달라고 미리 언질도 해놨고."

"네에."

"그런데 연락 한 번 안 해 보고 바로 쳐내버리면, 내 체면이 뭐가 되나?

술주정이라고 생각하자. 술주정….

속으로 참을 인을 50번쯤 쓰는 동안, 서 팀장은 쉬지 않고 연희를 비난했다. 자존심도 상하지 않는 이유는, 너무 자주 당한 일이어서일 것이다.

분풀이를 당해준 다음에 적당히 사과하고 자리를 떠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끝나지를 않았다.

서 팀장이 많이 취해서인지. 아니면 제 딴에 받아먹은 것이라도 있어 생각 이상으로 곤란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지?

생각할 때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두 분, 여기서 뭐 하십니까?"

"아, 부사장님!"

불청객이 선우임을 확인한 서 팀장이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선우는 웃지 않았다.

"아까부터 복도를 막고 서 계시던데요."

"이번 행사에서 이 친구가 미숙했던 점이 있어서요. 상사로서 조언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요? 하필 지금?"

선우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 물론 부사장님과 저희 실장님 축하에만 전념해야 할 좋은 날이긴 하죠."

선우의 입매가 조금 비틀어졌다. 그러나 취한 서 팀장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도 부하 직원 실수는 빨리 깨우쳐 줄수록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아."

픽, 짧고 날카로운 선우의 웃음소리가 복도에 내려앉았다.

"그런데 팀장님."

역시나.

"네?"

"오해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업체는 제가 선택했습니다. 지연희 씨가 아니라."

업체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서 팀장과의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이다.

"…아. 그러셨어요?"

서 팀장이 왜 진즉 알려주지 않았냐는 얼굴로 연희를 보았다. 알려줄 수가 없었다. 실제로 선우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희와 파티 플래너가 각자 제안서와 견적을 받은 뒤 이 매니저와 상의해서 결정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연희 씨가 보여준 업체 리스트 중에 유독 격이 떨어지는 업체가 하나 있긴 했던 것 같습니다만."

조금 전 서 팀장이 한 말을 그대로 차용한 대답이었다. 서 팀장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제 감각이 그렇게 촌스러울 줄은 몰랐네요."

분명 저를 돕는 건데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선우가 제멋대로 내미는 손이 더 이상 달갑지 않을뿐더러, 이래봤자 다음날 곱절로 불어난 서 팀장의 짜증을 받아내는 건 연희가 될 테니까.

"아닙니다. 제가 부사장님 취향을 몰랐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이 자리는 곧 정리가 되겠지 싶었다. 슬슬 벽에 붙어서 걸음을 옮기려는데, 선우가 다시 입을 뗐다.

"그리고 팀장님이 보내주신 행사 보고서는 잘 확인했습니다만."

연희가 작성한 보고서였다. 뭔가 실수라도 있었나 싶어 걸음을 멈췄다.

"네. 빨리 보여드리고 싶어서,"

서 팀장이 뿌듯하게 대답했다. 사실이기도 했다. 행사 끝나자마자 회사 돌아가서 보고서부터 써 내라고 얼마나 들들 볶던지.

"제가 그날 고생 좀 했습니다."

…서 팀장의 이 말은 사실이 아니고.

고생한 사람은 오히려 연희였다.

자정이 넘어서야 사무실에 돌아온 서 팀장은 책상 위에 올려놓은 연희의 보고서를 5초쯤 스캔하더니 대뜸 부사장의 직통 이메일 주소를 대라고 했다.

"보고서는 좀 수정해야 할 것 같으니까 나한테 파일로 보내줘."

잠깐 타이핑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호텔 측에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렸다. 드물게 신속한 태도였다.

"담당자 이름은 똑바로 써주세요. 윤명희인지 뭔지, 얼굴 한번 못 본 엉뚱한 사람 이름 올려놔서 사람 황당하게 하지 말고."

아무래도 그때 열심히 타이핑하던 소리는 이름을 더하고 빼느라 난 소리였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연희 씨 이름은 아예 보고서에 없던데, 왜 여기서 행사 때문에 혼이 나고 있는 거죠?"

"…그게."

서 팀장의 등에서 진땀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연희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곽 전무가 알려주지 않던가요? 내가 그런 거 정말 싫어한다고."

"아무래도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요."

"그래요? 그럼 제대로 들어봐야죠. 성심성의껏 설명해 보세요."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좀 전까지 의기양양하던 서 팀장이 산소가 부족한 것 마냥 호흡을 쌕쌕댔다.

"지연희 씨는 자리 좀 피해줄래요? 내가 서 팀장하고 나눌 대화가 좀 길어질 것 같아서."

선우가 웃으며 말했으나 이번에는 서 팀장이 웃지 않았다.

"예림 씨, 미안한데 나 먼저 갈게."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연희는 가방을 챙겨 식당을 나섰다. 선우와 서 팀장이 무슨 대화를 할지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으나, 식당에 계속 머물 이유는 되지 못했다.

밖으로 나가보니 새삼 8월 중순이 훌쩍 지난 걸 체감할 수 있었다. 열대야로 고생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밤바람이 꽤 서늘하게 느껴졌다.

옷 사이로 바람이 스며, 연희는 살짝 몸을 떨었다. 고기 냄새 자욱했던 탁한 공기가 그리울 정도였다. 하지만 술기운 덕에 감각이 둔해진 탓일까? 몇 걸음 걷다 보니 또 견딜 만해졌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나아가다 보면 다 괜찮아지는 것이다. 무뎌지고, 잊히고.

어두운 골목 사이사이로 떠들썩한 소음이 공기의 밀도를 높였다. 연희는 녹아들지 못한 도시의 풍경이었다. 취한 사람들을 최대한 피해 빠르게 걷는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어딥니까?"

술을 꽤 마신 것 같던데, 선우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집에 가는 길인데요."

- 인사도 안 하고?

약혼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직접 전해야 했던 건가? 아니면 조금 전에 서 팀장을 막아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듣고 싶은 건가?

어느 쪽을 원하든, 다시 돌아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동안 여러모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틀에 박힌 인사를 건넸으나 선우는 대답하지도, 전화를 끊지도 않았다. 그저 나직한 한숨만 쉬었다.

싸늘한 밤바람 냄새가 밀려왔다. 아니, 나무 냄새인가? 청량하고도 익숙한 냄새였다.

연분홍 꽃잎이 흩날리는 가로수 길에서 날 법한, 가로등 불빛에 사방이 노랗게 물들 때 날 법한, 생기 넘치는 풀벌레 소리와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 날 법한, 그런 냄새.

밀려오는 추억에 연희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오늘도 감사했고요."

한 번 더 인사를 했다. 정말 감사하다기보다는, 그냥 이대로 말없이 전화를 끊을 수는 없으니 끌어들인 인사였다.

- 이제 거짓말도 잘하네요. 하나도 안 고마우면서,

속내를 순식간에 간파당한 것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선우 때문에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일도 더는 없을 것이다.

"결과야 어쨌든 좋은 의도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심하게 살펴주신 것도 놀랐고."

- 다 끝나니까 아부도 해 주네요? 이제 굳이 마음에 없는 말 안 해도 되잖아요.

"…부사장님 덕분에 저도 많이 배워서요. 아. 그리고 다시 한번 축하,"

말도 안 끝났는데 갑자기 툭, 전화가 끊겼다. 하하, 하는 웃음 소리와 함께.

지금 비웃은 건가?

"황당한 새끼."

술의 기운을 빌려 중얼거렸다. 술도 들어갔겠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하면서.

전화까지 걸어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이유는 뭘까?

갑자기 욕지기가 일어 자리에 주저앉았다. 속이 진정되지 않아 쉽사리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프고, 힘들고, 등 뒤에선 찬바람이 불고. 무뎌진 줄 알았건만 하나도 무뎌지지 않은 추위가 다시 온몸을 쓸고 갔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오늘따라 왜 이렇게 춥지?"

말하자마자 등 뒤에서 불던 바람이 멈추었다. 머리 위가 조금 어두워졌다. 설마,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다행이네요 아직 멀리는 안 가서."

역시.

언제나처럼 예고 없이 나타난 선우가 있었다. 연희 딴에는 열심히 달린다고 달렸는데도, 늘 손쉽게 따라잡고 마는 선우가.

"왜 여기 주저앉아 있어요?"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저런, 약 사다 줘요? 아님 부축해 줄까?"

빙글빙글 웃으며 묻는 게 기분 나빴다.

"괜찮습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선우가 그런 연희의 양쪽 눈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닌데? 눈 풀렸는데?"

대답하지 않았다. 집으로 가려고 몸을 돌리자 힘 빠진 다리가 순간적으로 비틀거렸다. 선우가 재빨리 팔을 잡아 몸을 지탱해 주었다.

"많이 취했어요?"

"그동안 긴장한 게 풀어져서 그런가 봅니다."

"그게 아니라 화병 난 거 아니에요? 할 말 있는데 꾹 참고만 있어서? 원래부터 은근히 할 말 못 참는 성격이었잖아."

뺀질뺀질하게 잘도 말했다. 새삼 대학 때가 그리워졌다. 마음껏 대거리라도 하던 그때가.

"그래서 왔어요."

"네?"

"지연희 씨, 나한테 못한 말이 남아 있을 거 같아서. 오늘 다 꺼내 놓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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