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54)화 (55/98)

<54>

마침내 약혼식이 시작되었다. 당초 계획보다 초대 손님이 늘어난 거라지만 200여 명도 채 되지 않았다. 하얀 테이블보가 씌워진 수십 개의 원탁에 두세 명의 사람이 자리를 넓게 띄워 앉았다.

세울 일 없을 거라던 포토테이블이 홀 곳곳에 비치되었다. 선우와 수정이 다정하게 붙어선 사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 같았으나, 연희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

다만 액자의 배열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정리하고 소품의 위치를 조정했다. 그것이 오늘 연희의 역할이었으니까.

흰색과 초록색으로 색상을 통일한 꽃들이 곳곳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다양한 조각품과 은은한 조명등이 테이블과 벽면을 고루 장식했다.

막판에 수정의 변덕으로 이것저것 변경된 부분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포토테이블을 제외하면 딱히 눈에 띄는 차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매니저의 얼굴색만 눈에 띄게 죽어 있었다.

"바쁘신 와중에도 오늘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우가 마이크를 들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묵직한 저음이 홀에 울려 퍼졌다. 옆에 선 수정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수정과 선우가 나란히 서있는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수정이 발끝을 올려 선우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려 하자, 선우가 자연스레 어깨를 낮춰주었다. 수정의 귓속말이 끝나자 선우가 수정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사람들의 말대로,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수정과 선우가 마주 서서 다이아몬드 알이 굵게 박힌 백금 반지를 교환했다. 손을 겹쳐 잡고는 삼단 케이크의 가장 윗단을 반으로 잘랐다. 샴페인을 터뜨리고, 기포가 올라오는 술잔을 부딪쳤다.

내가 그동안 해온 일이, 이런 장면을 만들어 내는 거였구나.

고생한 결과가 눈앞에 있는데도 뿌듯하기보다는 씁쓸했다. 한쪽 어깨가 자꾸 욱신거렸다. 얼마 전 선우의 머리가 닿았던 자리였다.

평소 같으면 행사가 순탄하게 돌아가든 말든 머릿속으로 온갖 돌발 상황을 시뮬레이션 해 보았을 것이다. 행사 마무리와 관련 업체에 주어야 할 비용을 정리하고, 내일부터 새롭게 조율해야 할 업무 일정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머리가 통 돌아가지 않았다.

"안색이 안 좋은데 앉아서 좀 쉬실래요? 어차피 경매는 전문 옥셔니스트가 진행할 거고, 귀빈들도 대부분 점잖은 분들이니까 크게 백업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곁에 있던 이 매니저가 연희의 안색을 보고 말을 건넸다.

"그럴 수야 있나요? 저도 행사 담당자인데요."

"이렇게 지키고 서 있다고 누가 알아줍니까? 서 팀장님은 자기 혼자 이번 일 전부 도맡아서 한 것처럼 거들먹거리고나 있던데요."

아까부터 부산스레 홀을 헤집고 다니는 서 팀장이었다. 이사장 가족 눈에라도 띄고 싶었는지, 수시로 테이블 사이를 가로질러 사람들의 시야를 가렸다. 이 매니저의 무전을 받은 호텔 직원들이 서 팀장을 다독여 스태프 좌석에 앉히고서야, 웃기지도 않은 희극이 끝났다.

잠깐의 휴식 후 이어진 경매는 꽤 흥미진진했다. 어차피 낙찰자가 내정되어 있는 걸 알고 보는데도 그랬다.

옥셔니스트의 진행 실력이 탁월한 덕이었다. 적절한 유머와 긴장감 조성에 힘입어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추임새도 적극적으로 변했다.

수정의 이름으로 기부된 수형아트갤러리의 작품도, 귀금속과 한정판 의류도 금세 모두 팔렸다. 그중 몇 가지는 오늘 행사의 주인공인 선우가 사들인 것이었다. 당초 구매자 리스트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던 최 회장도 추가로 올라온 그림 몇 점을 구매했다.

만족한 표정의 선우가 수정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는 게 보였다. 연희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행사는 무난하게 마무리되었다. 다만 일부 사람들은 선우가 미리 잡아놓은 호텔 VIP룸을 제공받아 며칠 더 뒤풀이를 한다고 했다. 선우와 수정이 그들을 안내하며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제 정말 끝이 보였다.

남은 일은 미리 뼈대를 만들어둔 보도 자료에 살을 더해 언론사에 보내는 일과 행사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뿐이었다. 사진은 J호텔에서 제공된 것을 받아 쓸 예정이라 달리 작업할 것도 없었다.

"여기 있었네요."

뒤를 돌아보자 현아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형. 어깨선 위로 떨어지는 중단발. 붉은 색을 포인트로 한 화려한 성장. 시간이 흘렀는데도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현아의 옛 모습을 선명히 기억하는 이유는, 마지막으로 본 그 얼굴이 선우의 얼굴과 겹쳐졌던 장면을 오래도록 곱씹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기막힌 우연이네요?"

현아가 연희 가슴에 부착된 스태프 명찰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선우가 시켰어요?"

현아는 여전히, 선우를 '오빠'라고 부르지 않고 있었다.

"네?"

"혹시 선우랑 몰래 만나는 사이인 건 아니죠?"

무례한 질문에 연희의 얼굴이 굳었다.

"농담인데 뭘 그렇게 정색해요? 꼭 진짜로 만나는 사이 같잖아."

"그쪽이야말로, 진심으로 약혼 축하하러 오신 건 맞죠? 그렇다면 참 좋은 동생이네요."

무슨 낯으로 새언니 될 사람을 보느냐는 힐난이 목소리에 절로 묻어 나왔다.

아무리 피로 이어지지 않았대도, 가족인 선우와 남다른 사이였으면서 그와 그 연인을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는 현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댁한테 그런 얘기 들을 이유는 없지 않나? 선우한테는 좋은 동생이 아닐지 몰라도, 그쪽한테는 내가 좋은 사람 맞을 텐데?"

현아가 연희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내 덕에 그나마 조용히 산 줄 알아요. 그날 일 덕분에 선우랑 깨끗하게 끝내고 자기 인생 살았잖아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말을 한 현아가 나직이 웃고는 돌아섰다.

* * *

'바자회 뒤풀이'는 행사가 끝난 지 2주가 넘은 뒤에야 이루어졌다.

오늘 통째로 빌렸다는 식당은 웃고 떠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오가는 술잔도, 식당을 가득 채운 연기와 소음도 연희에게는 아무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연희 선배님이 오늘 주인공이나 마찬가진데. 취급이 형편없네요."

문가 바로 앞에 자리한 테이블을 함께 차지한 예림이 투덜거렸다. 와중에도 상추에 고기와 마늘, 파채를 얹는 움직임은 부지런했다.

"주인공은 무슨."

연희가 주관한 소위 '자선바자회'의 본질은 화려한 약혼식에 딸린 부속품에 불과했다.

귀한 손님들에게 행사 전후 무료로 제공한 숙식까지 생각하면 행사로 얻은 기부 수익보다 지출한 돈이 훨씬 클지도 몰랐다. 물론 그 숙박비나 식대는 J호텔에서 부담하기로 했지만.

그런 행사였던 만큼 오늘 연희의 역할도 애매했다. 보통 뒤풀이의 주인공은 행사를 진행한 직원이 되지만, 오늘 뒤풀이의 주인공은 선우와 수정이라고 해야 정확할 듯했다.

회식 날짜와 장소도 그들의 일정에 맞추어 정해졌다. 새삼 행사 뒤풀이라는 핑계를 댈 필요가 있었을까. 뒤늦은 피로연이라면 또 모를까

예상과 달리 선우와 수정은 함께 있지 않았다. 불콰한 얼굴의 선우가 중앙에 위치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긴 했으나 옆에 있어야 할 수정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나 올 거라고 했다.

"부사장님이 산다기에 모처럼 비싼 거 먹을 수 있으려나 했는데, 서 팀장님이 여기를 적극 추천했다면서요? 부사장님 돈 아끼게 해주면 칭찬이라도 들을 줄 아나…."

평소 같았으면 말만이라도 연희를 띄워주었을 서 팀장이, 오늘은 아무 말도 없었다. 약혼식을 축하하는 하객 역할이나 충실히 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곽 전무의 성화에 선우가 일어나 '약혼'이란 단어를 뱉어내자마자 자리에 있던 직원들이 커다란 함성과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직도 해줘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니.

성의 없이 손뼉을 몇 번 친 연희가 예림 옆에 앉아서 조용히 술을 들이켰다. 기분이 자꾸만 아래로 침잠했다.

그간 뒤로 미뤄왔던 일을 처리할 생각에 걱정이 되어서? 애써 해온 일이 공식적으로는 서 팀장의 업무실적으로만 남아서?

종종 그래왔던 일인데 왜 이렇게 허탈할까.

"고생했어."

서너 명 되는 팀원들이 연희를 찾아와 어깨를 두드리거나, 어색한 미소를 지은 뒤 돌아갔다.

팀원들과 짧게나마 눈을 마주친 것도 오랜만이었다. 연희가 바삐 돌아다녀서이기도 했지만 다들 연희를 피해 다닌 탓도 있었다. 감당하기 힘든 일의 무게가 넘어오기라도 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보여주기'식 재단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회사 인력 중 윗사람은 본사에서 퇴임 시기가 다가오는 사람이 차출된 케이스가 많았고, 아랫사람은 대부분 인맥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대행사를 동원한다 해도 실무를 뛸 사람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편한 사람은 여전히 편했다.

그런 사람들이 딱히 부럽지는 않았다. 다만 오늘은, 아무도 안 보고 싶었다.

"여력이 되면 도왔을 텐데 통 정신이 없어서. 이번에 디지털콘텐츠 발굴 사업 쪽이 워낙 바빴던 거 알지?"

같잖은 변명에 억지로 미소를 지어준 연희가 화장실로 향했다.

화풀이하듯 먹어댄 음식물과 술 때문인지 속이 좋지 않았다. 변기를 붙들고 헛구역질을 하다 겨우 진정된 배를 붙잡고 복도로 나왔다.

"연희 씨."

복도 한가운데에는 술기운으로 얼굴을 붉힌 서 팀장이 연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했어."

남들 귀를 피해, 비좁은 복도에서 받는 칭찬은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인사를 했다. 그래야 자리를 뜰 수 있을 것 같아서. 한데 서 팀장은 연희를 보내주지 않았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그래도 윗사람으로서 부족한 건 지적을 해야겠지?"

가만 보니 연희를 보는 표정이 꽤 못마땅했다. 수고했다는 인사는 다음 말을 잇기 위한 포석에 불과했나 보다.

"행사장 디스플레이 말이야. 격이 영 떨어지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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