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전화가 끊겼다. 다시 전화가 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서야 선우가 휴대폰에서 손을 뗐다.
"왜…."
연희가 반쯤 띄웠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이며 물었다. 선우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물컵 표면에 맺힌 이슬을 손가락으로 짓뭉개면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실까요?"
결국 연희가 재차 입을 뗐다. 모처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찰나였을 뿐 선우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연희의 몸이 선우에게로 좀 더 기울어졌다.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마침내 선우가 입을 열었다.
"요즘은 원준호 씨와 만나는 중인 건가요?"
"네?"
난데없이 튀어나온 준호의 이름에 연희의 말문이 막혔다.
"아니면 그 도영이라는 친구 쪽인가?"
"……."
"집까지 오갈 정도면 많이 친해 보이던데요. 뭐, 누가 되었든 그 전남편이라는 작자보다는 나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지금 무슨 말씀을…."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근처에 남자만 있으면 다 그런 사이로 보이는 건가? 하긴 도영이야 전혀 없는 소리라 할 수 없게 되긴 했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뭔가 이상했다.
준호라는 흔한 이름을 보고 예전의 준호임을 알아챈 것도, 도영이 연희의 집을 다녀간 사실을 아는 것도.
그간 곳곳에서 선우를 떠올리게 했던 흔적들을 떠올렸다. 그 모든 이들이 정말 선우였다면. 혹시 자신의 뒤를 캐고 있었던 거라면….
또 나를 갖고 놀 생각인가?
안 그래도 입 안에서 까끌대던 음식물이 점점 돌덩이처럼 느껴졌다. 홧홧한 것이 역류해 목 안을 달구었다.
탁,
들고 있던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지금 저랑 뭐 하자는 거예요?"
"…화났습니까?"
"그럼 안 날까요?"
"미안합니다.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당혹스러운 듯 앞머리만 연신 쓸어 넘기던 선우가 혀로 마른 입술을 몇 번 축였다. 입가를 일그러뜨리더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잘 좀 살지 그랬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지금 내게, 제대로 살지 못했다고 비난하고 있는 건가?
안다. 우습게 보일 점이야 차고 넘친다는 것을.
형편없이 끝나버린 결혼생활, 아직도 자신을 소유물로 취급하는 전남편, 근무하는 곳은 본연의 설립 취지보다 탈세와 비리를 위해 운영되는 곳이고 그 속에서도 자신의 위치는 계약만료가 코앞인 한시적 계약직이었다.
곧바로 다음 직장을 구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그래도.
연희에게는 아등바등 노력해 일궈낸 삶이었다. 잠깐 삐끗한 실수는 있었대도, 대부분의 순간은 최선을 다했고 결과를 책임지기 위해 노력했다.
선우의 말 한마디로 그 모든 발버둥이 부정당하는 기분이 되었다.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좀 알려주고 가지 그랬어요?"
"…지연희 씨."
"그동안 대놓고 화를 안 내니까 제가 많이 만만해 보였나 봐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손을 들어 선우의 변명을 막았다. 어차피 들어봐야 기분만 더 나빠지겠지.
"그건 부사장님을 좋게 생각해서가 아니에요. 화낼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지."
가증스럽게도 선우가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불안한 선우의 눈이 연희의 표정에서 혐오 이외의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해 애쓰다가 끝내 힘을 잃었다.
"연희 씨한테는 내가 아무 가치도 없을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연희 씨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또 이러지. 또 사람 마음을 쥐고 흔들려고 하지.
고작 애매한 말 몇 마디를 건네는 걸로. 자신에게는 손쉽기만 할 몇 가지 호의를 베푸는 걸로.
그런데도 잠시나마 선우를 믿고 싶어 했던 자신은 얼마나 우스웠는지.
의심이 튀어나올 때마다 서둘러 눌러 내렸던, 그래서 내내 삼키기만 했던 말을 끝내 묻고야 말았다.
"내가 이혼했다니까 쉬워 보여서 이래요?"
이혼했다는 게 알려지자, 말 한마디 못 걸던 남자들이 치근대기 시작했었다.
여유시간엔 무엇을 하냐고 은근히 수작을 걸어오기도 하고, 농담이랍시고 입에 담지 못할 음담패설을 건네기도 했다. 정색을 하면 알 거 다 아는 사람들끼리 왜 이러냐고, 외로우면 신경이 날카로워지나 보다고 비웃었다.
역겨운 것은 그렇게 농을 걸어오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이미 애인이나 아내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결혼을 앞두니 재미 삼아 뭐라도 해보고 싶은 건가? 그래서 이런 장난질을 치는 걸까?
"뭐든지 다 아는 김선우 씨니까, 내가 이혼한 이유도 알겠네요?"
선우가 입을 다물었다.
"모르면 지금 알려드릴게요."
"……."
"외도예요."
선우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응해주던 예전의 연희가 아니었다. 아니어야 했다. 선우로 인해 마음만 다쳤으면 됐지, 지저분한 추문에까지 휩싸이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선택한 남자들은 하나같이 지조가 없더라고요."
연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어머, 머리핀 예쁘다."
연희 옆자리에서 근무하는 유 대리가 모처럼 연희에게 말을 걸었다. 연희의 책상 위에 올려놓은 호화로운 집게 핀 장식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연희의 시선도 같은 곳에 있었다. 살구 색 큐빅과 진주 모양 구슬을 박아 넣은 집게 핀의 중앙 장식은 언젠가 선우의 머리 위로 쏟아지던 햇살과 비슷한 느낌이 났다. 복잡한 형태의 기하학적 무늬는 꼭 선우의 태도 같았고.
집게 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고민스러웠다. 처음부터 받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거 내가 백화점에서 봐뒀던 건데 생각보다 비싸서 못 샀거든. 대체 이런 비싼 걸 누가 하고 다니나 했더니 연희 씨였네?"
집게 핀 하나의 가격만 해도 이백만 원이 훌쩍 넘는다고 했다. 장신구 세트에 함께 들어있던 헤어밴드까지 더하면 얼마나 돈이 들었을지 짐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걸 직원들에게 종종 선물한다니, 선우의 말을 믿은 제가 바보 같았다.
"그럼 가지실래요?"
"정말?"
선우에게 받았던 장신구 세트를 케이스 째로 넘겨 버렸다.
* * *
"오늘 사무실에 그분 왔어요!"
연희의 자리로 뛰어온 예림이 연희의 팔을 격하게 쳐댔다. 한 톤 높아진 목소리가 흥분을 그대로 드러냈다.
둘러보니 흥분한 사람은 예림뿐만이 아니었다. 사무실 내 사람들이 책상 위로 고개를 뺐다가 도로 내렸다가 하면서 수런거리고 있었다.
"대체 누가 왔는데 그래?"
"실장님 약혼자분요. 실물 장난 아니다! 모델이네, 모델."
예림의 시선 끝에는 사무실로 걸어 들어오는 선우가 있었다.
근방에 서 있던 유 대리 앞에서 선우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곧 유 대리가 수정의 사무실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수정이 있는 곳을 물었던가 보다. 선우가 무언가를 더 말하자 유 대리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머리를 살살 매만졌다.
"실장님, 오늘 출근하시는 날이었나?"
"어쩐지 아침부터 어수선하더라."
주위를 둘러보던 선우의 눈이 연희 쪽에 잠시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연희는 뒤를 돌아 휴게실로 향했다.
수정의 사무실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아까 그분이 뭐라고 하신 거예요?"
자리에 돌아온 유 대리에게 예림이 물었다.
"내가 한 집게 핀이 예쁘다고, 어디서 샀냐고 묻던데? 연희 씨가 준 게 확실히 눈에 띄긴 하나 봐."
유 대리가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연희 씨 덕분에 J호텔 부사장님이랑 말을 다 터 봤네. 고마워!"
유 대리의 감사 인사를 한 귀로 흘리며 예전에 선우가 했던 말을 생각했다.
자신에게 받은 건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라고 했던가?
그래서 더더욱 다른 이에게 넘겨버리고 싶었다. 선우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될 줄 몰랐지만.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이쯤 하면 의미가 모호한 행동도 앞으로 그만두겠지.
* * *
드디어 약혼식 당일이 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전체 리허설을 진행했다. 모든 점검이 끝나기 무섭게 귀빈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남다른 부와 명예를 온몸에 휘두른 이들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J호텔에서 열린 자선바자회 행사는 상위층 사람들의 교류를 위한 정기 모임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사회자로 초청된 유명 아나운서가 행사의 취지를 설명하는 대본을 작은 소리로 읽어보고 있었다. 단순한 약혼식 대신 '뜻깊은' 행사를 함께 진행함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겠다는, 뭐 그런 개소리였다.
"안 의원님이 온다고요?"
"조금 전에 전화하셔서는 갑자기 참석하신다고…."
뜻밖의 소식에 이 매니저와 연희가 난감한 눈빛을 교환했다. 안 의원은 검찰총장 출신이자 다음 대선에 출마한다면 대통령 당선도 가능하리라 점쳐지는 인물이었다.
안 의원이 온다면,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최 회장과 더불어 국내 최고 거물급 인사가 나란히 자리하게 되는 셈이었다.
당연히 그와 아들이 나란히 앉을 자리는 무대에서 가장 가깝고 동선이 편하며, 최 회장과 비등한 자리여야 했다.
기존에 그 자리에 앉았어야 할 사람에게 겨우 양해를 구하긴 했으나 그 역시 대단한 인사이긴 마찬가지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급작스레 추가된 두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20여 개의 좌석 배치를 조금씩 바꾸었다. 기존 좌석 배치도 까다로운 손님의 취향을 반영하느라 힘들게 조합한 것이었는데 그 노력이 죄다 어그러졌다.
다행히 대부분의 손님들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안 의원의 이름을 대자 머뭇머뭇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매니저가 무전을 통해 원탁을 하나 더 들여놓으라고 지시했다. 곧 남자 직원 두 명이 테이블을 들고 와서 주변 테이블의 간격을 조금씩 조정했다.
"귀한 손님들이니까 항의 없도록 신경 좀 써주세요."
때마침 홀에 들어선 수정이 지시했다. 연희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은 채였다. 뒤에 선 선우와 연희의 눈이 마주쳤다. 연희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선우도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수정이 선우의 팔짱을 끼고 연희 옆을 스쳐가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목말라서 그러는데 생수 좀 가져다줄래요?"
구석에 비치된 생수를 갖다 주자 선우가 대신 건네받았다. 뚜껑을 따서 수정에게 건네는 것까지 확인하고는 뒤돌아섰다.
물병을 건네다 스친 손끝이 차갑다 못해 따끔한 통증이 일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