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52)화 (53/98)

<52>

"이게 웬 헛수고야?"

주차된 차의 보조석에 앉고 나서도 서 팀장은 계속 구시렁댔다. 선우의 눈에 띄지 못한 것이 어지간히 아쉬웠던가 보다.

차에 시동을 걸고 사이드브레이크를 내릴 때였다. 창밖으로 무언가를 본 서 팀장이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연희의 팔을 툭, 치기까지 했다.

"잠깐만. 아직 출발시키지 말아 봐."

"왜요?"

"부사장이 여기 있잖아."

서 팀장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주차장 모서리 부근이었다. 언제 취했었나 싶게 허리를 곧게 편 선우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나가볼까?"

차문을 열려는 서 팀장을 말리려는데, 파란색 외제차가 선우 앞에 부드럽게 정차했다. 차 문을 열고 나온 이는 얼핏 보기에도 미인이었다. 목에는 붉은색 스카프가 걸려 있었다.

"저 사람이 누구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기억을 더듬던 서 팀장이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

"도영주 아냐? 요즘 'TV 예술 산책'에 패널로 나오는."

"……."

"몰라? 경주 갤러리에서 전시도 했잖아."

연희가 아무 말도 않자, 서 팀장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도 작가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도 작가는 선우의 팔짱을 끼고 호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적잖이 친근한 사이인 듯했다.

"아. 부사장이 저래서 바빴구먼?"

두 사람이 붙어 있는 거리를 가늠해 보며 서 팀장이 음흉한 눈으로 웃었다.

"부자 약혼녀에, 예쁜 애인에 세상 살기 재미있겠어."

반응 없는 상대 탓에 홀로 중얼거리던 서 팀장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다른 한쪽에서 튀어나온 수정 때문이었다. 머리채를 잡는 풍경이라도 기대했는지 서 팀장이 두 눈을 반짝였지만….

수정은 서 팀장의 예상과 정반대로 움직였다. 활짝 웃으며 선우와 도 작가 사이에 끼어들더니 도 작가의 어깨를 두드리며 함께 걸어간 것이다.

"에이. 아닌가?"

서 팀장이 대놓고 실망한 티를 냈다. 세 사람은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면서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뭐가 저렇게 친해? 사람 오해하게."

"……."

"앗! 그러고 보니 실장님은 왜 벌써 귀국한 거지? 다음 주에나 온다고 들은 것 같은데."

서 팀장이 휴대폰을 꺼내들더니 곽 전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정의 귀국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어 다른 윗사람들에게도 차례차례 전화를 걸었다.

그러는 동안, 연희는 세 사람이 사라진 엘리베이터만 멍하니 주시했다.

연희는 보았다. 선우와 도 작가가 수정의 등 뒤에서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둘만 아는 무언가 있는 것처럼.

그 사이 통화를 끝낸 서 팀장이 말했다.

"근데 신기하네…. 도영주가 한 집게 핀, 연희 씨가 한 거랑 모양이 비슷하지 않나?"

비슷한 게 아니라 똑같았다.

선우와 현아가 함께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모든 순간이 예전의 변주곡처럼 느껴졌다. 잠시 선우를 안쓰럽게 생각했던 조금 전도. 홀로 믿고 홀로 배신감을 느끼는 지금도.

연희에게 선우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 * *

마지막 회의 날이었다.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J호텔 로비에 들어서서, 연희는 한숨을 쉬었다.

수정이 사무실에 출근한 지 3일 째였다. 곧 자신의 약혼 행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될 거란 말이 들렸다.

공교롭게도, 호텔에서 수정을 본 다음 날 J호텔 측에서 '앞으로 남은 회의는 서면 교환으로 대체하자'는 요청이 왔다. 이제 와 행사 내용이 대대적으로 변경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은 행사 준비 사항은 서 팀장이 주도적으로 관리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현장에서 발로 뛰는 역할은 계속되겠지만, 호텔 측과 연락하는 일은 서 팀장이 맡게 될 터였다.

첫날처럼 이 매니저가 조금 늦겠다는 연락을 했다. 수미상관이 일품이었다. 오늘은 다른 행사 관계자들도 부르지 않았다고 했다. 덕분에 회의실에 선우와 단둘이 남았다.

"그동안 고생했는데 마지막 식사는 나가서 먹을까요?"

회의실에 들어오면 늘 호텔 도시락이 각자의 자리에 놓여 있었는데 오늘은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정말이지 쓸데없는 호의였다. 수정과 도 작가, 그리고 선우가 함께 있는 걸 본 이후, 선우와 있는 것이 전보다 더욱 꺼려졌다. 밥이 편히 넘어갈 리 없었다.

"이 매니저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시간 낭비잖아요."

연희의 거절은 아랑곳 않고, 선우가 먼저 일어서서 회의실 문을 열었다.

1층 로비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호텔에서 VIP를 대상으로 하는 오페라 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곧 공연이 시작될 시각이었다. 웅성대는 사람들을 피해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는데, 선우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느렸다.

그래서 기어이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말았다.

"여긴 어쩐 일이야?"

낯선 여자와 함께 있던 재민이 아는 척을 해왔다. 여자가 영문을 모르는 눈으로 연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 직장 동료."

아무것도 모를 여자가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외모도, 하는 행동도 연희보다 열 살은 어려 보였다.

"재민 씨는 어떻게 왔어?"

"원래 김 이사님 댁 사모님이 초대받았다는데, 갑자기 못 가게 되었다고 나한테 티켓을 주지 뭐야? 김 이사님이 유독 나 챙기시던 거 알지?"

몰랐다. 다만 이깟 티켓으로 물정 모르는 여자에게 얼마나 거들먹댔을지는 짐작이 갔다.

"연락 또 안 받더라. 뭐가 그렇게 바빠?"

얼른 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연희의 얼굴을 못 본 척, 재민이 능청스레 굴었다. 천연덕스럽게 작은아버지의 안부까지 물어왔다.

"연희 씨, 이제 그만 올라가 볼까요?"

선우가 중간에 대화를 끊고서야 재민이 입을 닫았다. 선우를 훑어본 재민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시 연희를 봤다.

그날 호텔 룸에서 본 사람임을 알아봤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대체 어떤 사이야?' 하는 속마음과 '생각보다 제법인데?' 하는 속마음이 동시에 들리는 것 같았다.

재민의 시선이 이번에는 선우가 찬 시계에 머문다. 착각일까? 재민이 어깨를 흠칫 굳히는 것 같았다.

"공연홀에 들어가 봐야 하지 않습니까?"

선우가 묻자 재민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했다. 평소의 태도를 생각하면 발끈할 만도 한데, 오늘 재민의 반응은 지나치게 유했다.

옆에 있는 여자를 의식한 것일까?

어?

시계를 보던 재민의 눈이 어느새 선우 뒤편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선우 몇 걸음 뒤에 떨어져 있는 한 비서를 향해 있었다. 워낙 비서라기보다 보디가드에 가까운 인상이긴 하지만, 재민의 표정이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선우를 보고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 왜 그래?"

여자가 팔을 잡아당기고서야 재민이 정신을 차렸다. 눈을 한 번 굴리더니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다음에 연락할게!"

제 맘대로 다음을 기약한 재민이 여자와 함께 공연홀로 사라졌다.

예전에 마주했던 비슷한 광경이 떠올랐다. J호텔과 비교 대상으로 자주 거론되는 H호텔이었다. 점심 약속을 위해 찾은 호텔 로비에서, 낯선 여자와 함께 프런트에 선 재민을 보았었다. 연희는 자리에 남았고, 여자와 재민은 팔짱을 낀 채 사라졌다.

그날 저녁, 재민에게 여자와의 관계를 묻자 재민은 외려 화를 냈다. 그때는 재민이 잠깐 이성을 잃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상냥하고 유쾌했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는 없다고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는 자기 위로를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재민의 태도는 갈수록 낯설어지기만 했다.

이제는 안다. 재민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연희가 미처 몰라본 것뿐이다.

선우도 그런 걸까.

"일식, 괜찮죠?"

연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선우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도착한 호텔 내 일식당은 고급스럽고 조용했다.

각 테이블마다 높은 칸막이가 있고 테이블 사이가 널찍해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 좋아 보였다. 선우가 건네는 메뉴판을 받아들면서, 연희가 물었다.

"오늘 공연을 누가 보러 오는지 호텔 측에서 미리 알 수가 있나요?"

평소와 다른 동선, 유난히 느려지던 걸음을 생각할 때 혹시 오늘 재민과의 만남을 선우가 기획한 것인가 싶었던 것이다.

"아니요. 초대권을 보낸 명단이야 있지만, 오늘 본 경우처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긴. 그런 것까지 선우가 파악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선우가 자신 때문에 그 정도로 신경을 쓸 리도 없었고.

음식은 금방 나왔다. 화려하게 장식된 각종 초밥을 보다가 버릇처럼 선우의 접시를 한번 훑어보았다.

"초밥, 좋아하세요?"

"그냥저냥요."

"비린 거 잘 못 드셨잖아요."

선우가 뜻밖이라는 듯 웃었다.

"기억해요?"

입술을 깨물었다. 선우의 입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은, 저 자신조차 몰랐다.

"이젠 잘 먹어요. 가리는 거 없이 웬만한 건 잘 먹습니다."

"아, 네…."

정신을 차린 연희가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나 무엇을 삼켜도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희 씨는 초밥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 잘 못 먹는 것 같네요."

함께 먹어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고생 많았는데, 이번 일이 끝나면 좀 쉴 수는 있는 겁니까?"

입 안에서 밥알을 세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릿느릿 씹어 삼키던 선우가 입을 열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곳에 단둘이 있는 상황이 불편했다.

이 매니저는 대체 언제 오려나. 시간을 확인하려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 화면을 켜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가 왔다.

화면 상단에 준호의 이름이 떴다. 지난번에 만나지 못한 유진과 다시 한 번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는데 그 약속 때문인 듯했다.

핑계 김에 잠시라도 자리를 뜰까 싶어 휴대폰을 짚고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연희가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을 집기 전에, 선우가 먼저 연희의 휴대폰 위에 손을 얹었다.

휴대폰을 바닥으로 내리누르는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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