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51)화 (52/98)

<51>

퇴근 시간은 한참 전에 지났다. 은박지에 싸인 김밥을 씹어 삼키며 행사 참석자 배치도와 식순을 다시 검토하는데 갑자기 서 팀장이 연희를 불렀다. 함께 J호텔에 가자는 용건이었다. 행사 전에 무대 시설을 미리 점검해 보고 싶다는 이유였다.

연희로서는 애초에 확인이 끝난 사항이었다. 최종 리허설 때나 한 번 더 점검하면 될 일이었지만 막무가내인 서 팀장을 말릴 수는 없었다. 밀린 업무를 대충 접고 서 팀장과 호텔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수형문화재단에서 왔습니다."

사무실에 이 매니저는 없었다. 다른 직원이 그랜드볼룸 홀 문을 열어주었다. 홀 내부가 궁금하다던 서 팀장은 텅 빈 무대와 음향 시설을 성의 없이 둘러본 뒤 막상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다만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렸다.

"왜 아무도 없지?"

"오늘 이 시간에는 특별한 행사가 없어서 홀이 비어있을 거라고 들었습니다."

호텔에 출발하기 전에 미리 확인해 두었다. 행사가 있으면 홀을 둘러볼 수 없을 테니까.

"이상하네. 파티 플래너 말로는 오늘 이 시간쯤 호텔 내부적으로 약혼식 리허설이 있을 거라고 했는데. 부사장님도 둘러보러 올 거 같다고."

역시나. 목적은 따로 있었다. 안 그래도 수정이 곧 귀국하리라는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서 팀장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행사에 참여할 시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수정을 마주치기 전에 부사장에게 눈도장이라도 찍어놓고 싶은가 보다.

"그렇다고 그냥 가긴 아쉽잖아? 리허설 일정, 연희 씨가 한 번 확인해 봐."

"네?"

자체 리허설을 재단에게 알리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오지랖을 부려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행사 담당자든 비서든 연락해서 알아보라고. 너무 대놓고 물어보지는 말고, 알지?"

어떻게 돌려서 물어보라는 걸까? 직접 통화하시면 안 되겠냐는 말이 목구멍에서 막혔다.

서 팀장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외근 중일 이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솔직한 사정을 말했다더니 기막히다는 듯한 너털웃음이 돌아왔다.

"누가 그런 말을 했어요?"

못마땅한 어조로 묻더니, 파티 플래너에게도 공식적으로 말한 적이 없는데 어디서 엿들은 건지 모르겠다고 황당해했다. 아마 다음부터 호텔에서 해당 파티 플래너를 이용할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런데 우린 리허설 이미 끝냈거든요. 갑자기 시간이 앞당겨져서요.

"아. 그래요?"

- 연희 씨까지 괜히 헛걸음해서 어쩌나…. 기왕 호텔까지 왔는데 인사라도 하고 갈래요?

"누구랑요?"

- 부사장님요.

이 매니저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했다. 어색하게 하하 웃고 전화를 끊은 뒤 오 분이나 지났을까? 한 비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은 연희의 눈이 곧 서 팀장을 향했다.

"뭐라는데 그래?"

"부사장실로 잠깐 올라오라고 하시는데요."

"그래? 나를?"

반색한 서 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연희 씨는 여기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잰걸음으로 훌쩍 나가버렸다.

텅 빈 홀에 연희만 남았다. 전체 조명을 끄고, 무대 조명만 남겨두었다. 세팅된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약혼식 장면이 어떨지 떠올려 지지가 않았다. 선우와 수정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뿌연 안개로 덮인 것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할 동선을 떠올려 보던 중 위에 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한동안 괜찮았는데 또 왜 이럴까. 통증이 심해지기 전에 가방에서 생수와 약을 꺼내 먹고는 잠시간 눈을 감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끼익.

무거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까만 어둠 속에 선우가 서 있었다. 환한 빛을 등지고, 한때 연희가 잘 알던 얼굴로.

"꿈인가?"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몽롱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둠 속에 있던 선우가 연희에게로 다가왔다. 가까워진 선우에게서 술 냄새가 풍겼다. 무슨 일로 마신 걸까.

다시 만난 후로는 매번 정갈한 모습만 보다가 풀어진 모습을 보았으니 낯설어야 할 텐데, 도무지 낯설지가 않았다.

"지연희 씨가 왜 여기 있습니까?"

선우도 이상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아니, 신기하다는 얼굴이라는 게 맞겠다. 어쩌면 반가운 얼굴일지도.

"부사장님이야말로 여기 왜…. 팀장님은 부사장실에 올라가셨는데요."

"아."

잠깐 무언가 생각하던 선우가 낮게 웃었다.

"아무래도 우리 한 비서가 서 팀장님과 따로 할 말이 있었나 봅니다."

"아."

지금쯤 실망하고 있을 서 팀장의 모습이 그려졌다.

"서 팀장은 여기 왜 왔는데요?"

"행사 전에 확인할 게 있다고 하셔서요."

자체 리허설을 구경하겠다고 왔는데 시간을 잘못 알아 허탕을 쳤다는 이야기는 낯부끄러워 꺼낼 수 없었다. 어차피 곧 이 매니저를 통해 알려지겠지만.

"나도 확인할 게 있어서 왔는데."

당장은 아무것도 모를 선우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서 팀장에게 연락을 해줄까 싶어 휴대폰을 드는데 선우가 털썩, 연희 옆자리에 앉았다. 알싸한 술 향기가 연희의 호흡으로 섞여 들어왔다. 선우의 눈 깜빡이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게 보였다. 제법 많은 양의 술을 마신 것 같았다.

이런 상태의 선우라면 서 팀장과 만나지 않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참! 이거, 쓸래요?"

선우가 가방을 뒤적였다. 인상을 찌푸린 채 손을 몇 번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찾아냈다.

주섬주섬 꺼낸 것은 투명 케이스에 든 헤어 장신구 세트였다. 화려한 색감의 헤어밴드와 집게 핀이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이게… 뭐예요?"

"머리핀이잖아요."

그러니까 뭔지는 알겠는데, 이게 왜 선우에게서 나오는지가 궁금한 거였다.

"이런 것도 갖고 다니세요?"

"이 매니저가 산다기에 나도 하나만 사 달랬죠."

"그럼 부사장님이 필요하신 거 아니에요?"

품에 안긴 것을 그대로 다시 내밀었다. 연희가 내민 손을, 선우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난 필요 없는데."

"그럼 왜 사셨어요?"

"필요하니까."

그러니까 누구에게?

수정에게 주려던 것을 술김에 내민 것일까? 떨떠름한 얼굴로 선우와 장신구 세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안 묶어 봐요? 그 늘어난 노란 고무줄보다는 이게 훨씬 나을 거 같은데."

대충 뒤를 만져보니 미리 묶고 온 머리가 반쯤 흘러내려가 있었다.

더워 보여요, 선우가 소곤거리고는 아이처럼 쿡쿡 웃었다.

제 목을 쓸어내리며 묻어 나온 땀방울을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틀어놓은 에어컨 바람이 충분히 서늘했는데도 선우는 땀에 젖어 있었다.

그러니까, 정작 열이 오른 사람은 선우였다.

"혹시 저희 실장님 주시려고 산 거면…."

"누구? 수정 씨?"

고개를 끄덕이자 선우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훨씬 더 좋은 거 하고 다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고생하는 직원들에게도 종종 이 정도 가벼운 선물은 건네니까 부담스러워할 것도 없고요."

연희가 사용할 때까지 지켜보겠다는 듯, 선우가 연희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결국 연희가 머리채를 감쌌던 노란 고무줄을 빼냈다.

노란 고무줄이 머리카락을 몇 가닥을 품고 떨어져 나갔다. 고무줄이 있던 자리는 선우가 준 집게 핀이 대신했다.

매끄러운 표면이 목덜미에 닿아 소름이 돋았다.

"이건 나 주고."

연희의 손이 쥐어져 있던 노란 고무줄이 순식간에 선우의 손목에 감겼다.

…고무줄은 대체 왜 가져가는 거지?

돌려주면 제가 처리하겠다고 말하려던 찰나, 선우가 갑자기 눈썹을 늘어뜨리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핏기가 사라질 정도로 세게 물어 창백해진 입술이 아릿해 보였다.

연희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에도 실패네…."

중얼거린 선우가 의자 팔걸이 위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그리고 연희를 보았다. 옆자리에 앉은 탓에, 마주본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다시 만난 이후로, 나한테 한 번도 안 웃어준 거 압니까?"

웃을 일이 있었어야 말이죠.

그렇지만 그 흔한 비즈니스 미소도 짓지 않았던가 싶어 새삼 놀라긴 했다. 어떻게 보면 그 또한 감정적으로 군 것이니까.

"무슨 짓을 해도 안 웃네요. 매번 거절만 하고."

어쩌나. 앞으로도 그럴 텐데.

선우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깨달았으니 더더욱 자신을 단속하게 되리라.

"어떻게 하면 웃는 거지? 다른 사람한텐 잘만 웃어주잖아요."

투정하듯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주량 이상으로 마신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동요하는 마음을 숨길 수 있어서.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요. 한 비서님을 불러드릴까요?"

휴대폰을 들어 전화번호를 검색하는 동안 선우는 지그시 눈을 감고 의자에 등을 묻었다.

"여기서 잠깐만 쉬면 돼요."

"……."

"좋네요.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억지로 입매를 끌어올린 선우의 눈 밑 그늘이 깊었다. 움푹 팬 미간은 고통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괜찮으세요?"

"사실 안 괜찮았는데 그 말 들으니까 좀 괜찮아진 것도 같고."

"술 깨는 약 하나 드려요?"

온갖 약을 담고 있는 가방을 뒤적여 숙취 해소 음료를 내밀었다. 눈을 뜬 선우는 음료를 받아드는 대신 엉뚱한 질문을 했다.

"혹시 나 주려고 갖고 다닌 건가?"

나직이 덧붙인 선우가 다시 눈을 감았다.

"아~ 술 취한 날 만나면 안 되는 거였는데. 하나도 안 멋져 보일 텐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힘 잃은 선우의 몸이 서서히 연희 쪽으로 기울었다.

연희의 어깨에 선우의 뺨이 닿았다. 목에 닿은 선우의 머리카락이 간지러워 질끈 눈을 감았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려 했을 때는 선우의 숨결이 이미 규칙적으로 변해버린 후였다.

연희는 선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눈을 감은 얼굴이 고단해 보였다. 선우를 둘러싼 껍데기는 잠시 사라지고, 연약한 속살만 드러나 보이는 것만 같다.

착각이겠지.

몸이 힘들면 술 냄새만으로도 취할 수 있다던가?

온종일 굳어 있던 연희의 어깨도 선우의 것처럼 점점 아래로 쳐졌다. 점점 깜빡임이 느려지던 연희의 눈꺼풀이 마침내 완전히 닫혀버렸다.

"아니, 비서 제가 뭔데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거야? 부사장은 자리에도 없고. 별 쓸 데 없는 당부만 잔뜩 듣고 왔네."

불만을 중얼거리는 서 팀장의 목소리에 선잠에서 깼다. 정신이 들자 옆자리부터 확인했다. 선우는 사라지고 없었다. 처음부터 오지 않았던 것처럼.

머리를 틀어쥔 집게 핀이 아니었다면 정말 꿈인 줄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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