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50)화 (51/98)

<50>

예림의 말로는 오늘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불꽃놀이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직접 갈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한강에서 쏘아올린 불꽃은 연희가 사는 연립주택에서 아주 잘 보일 터였다. 모처럼 일거리를 싸 들고 집으로 온 이유였다.

오랜만에 조금 풀어지고 싶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 뺨에 댔다. 차가운 물방울이 뺨에 닿아 부서졌다.

어둑한 하늘 위를 수놓는 불꽃을 보다가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낯선 세단 한 대가 집 근처에 서 있었다. 선우의 차를 떠올렸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차종은 같았으나 색이 달랐고, 무엇보다 선우가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요새 얼굴 좀 자주 봤다고 별것에서 다 선우를 떠올린다.

강렬한 소리를 내며 터지는 불꽃을 봐도 그랬다. 예전 선우의 얼굴 위에 반사되던 색색의 향연이 떠오르고, 근처 노점상에서 사 먹었던 붕어빵이 기억을 스쳤다.

펑펑 울던 어느 날, 눈물에 씻겨 퇴색되었던 기억들이 불시에 제 색깔로 다시 피어났다. 불꽃만큼이나 화려한 색채로, 그날 가장 아름답다고 느꼈던 사람을 품고서.

…그때는 참 어렸지.

누군가를 계산 없이 좋아할 수 있었던 지연희는 사라진 지 오래다.

흑맥주의 쌉쌀한 뒷맛을 감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잡생각이 나는 걸 보니 술은 그만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책상 위에 자리를 잡는데 진동 모드로 돌려놓은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회사에서 또 무슨 일이 생겼나? 곰팡이 난 육포에 미련을 두면서 발신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성질 급한 이의 목소리가 기계 밖으로 튀어나왔다.

- 웬일로 전화를 받았네?

재민의 빈정거림에 연희의 얼굴이 구겨졌다.

- 집 앞인데 나와.

"나 집 아닌데?"

- 불 켜진 거 다 보이거든?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제멋대로였다. 자기 때문에 누구는 공포에 질리고, 달갑잖은 타인의 시선을 받아내고, 며칠 동안 기운을 뺐다.

기존에 겪은 일들로 굳은살이 박이지 않았더라면 더 오래 힘들어했을 것이다.

그런데 재민은 그날을 '그냥 좀 더 예민한 날', 그래서 '심술을 약간 부린 날' 정도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올라갈까? 네가 내려올래?"

이러려고 한 칼퇴가 아니었는데.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번에는 미안했어. 순간적으로 너무 배신감이 들더라고."

그날의 패악이 일개 해프닝이었던 것처럼 재민이 사과했다.

가볍게 사과하면 가벼운 일이 되는 줄 아는 게 재민의 한계였다. 그렇게 세상을 살아올 수 있었다는 건 부러웠다. 당한 사람은 결코 가벼워질 수 없는데.

"어쨌든 놀랐다면 그것도 사과할게."

놀란 정도가 아니었다. 무서웠다.

그리고 지금도 무섭다. 아닌 척할 뿐.

재민이 연희의 집 주소를 알고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내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끝까지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오지랖 넓은 작은아버지가 재결합을 응원한다며 재민에게 주소를 알려준 게 문제였다.

"왜 이런 설명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본 사람은 일 때문에 만난 거야. 그리고 우리가 이혼한 지가 언젠데 재민 씨가 내 일에 간섭을 하니?"

"말 참 섭섭하게 한다. 그래도 내가 네 남편이었는데."

"이제 우린 그냥 남이야. 재민 씨 때문에 그날 내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알아?"

"왜, 그 자리에 누구 신경 쓰이는 사람이라도 있었어?"

재민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불안의 이유가 '예측할 수 없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재민은 존재 자체가 불안이었다.

뒷걸음질 치면 우스워 보일 거고, 우스워 보이면 다음에 약점이 되겠지.

하얘지는 시야를 숨기고 애써 눈을 부릅뜰 때였다.

커다란 그림자가 재민 앞에 드리워졌다. 재민이 무심코 고개를 틀었다. 누군가 연희 옆에 붙어 섰다.

"여기서 뭐해요?"

"도영 씨가 여기 웬일이에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연희도 놀랐지만 재민은 더 놀란 듯했다. 범상치 않은 덩치의 남자를 보더니 조금 전의 분노를 급격히 추스른다.

"갤러리에서 오늘 꼭 전해 달라고 부탁한 게 있어서요,"

재민에게 잘 들리도록 회사 일을 거론한 도영이 누런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도영과 저 사이에 급히 주고받을 게 있지도 않았고, 이거 하나 주자고 집 앞까지 손수 온 것도 말이 되지 않았지만 별것 아닌 핑계라도 지금은 반가웠다.

"김 화백 전시회 도록이랑 팸플릿 샘플 수정안 때문에 급히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대요. 한 대리님은 자기는 이제 모르겠다고 화만 내시고. 그간 너무 일정이 늦춰져서 서둘러야 하거든요."

"재민 씨 가봐야겠다. 우린 일 때문에 확인할 게 있거든."

"어디서 확인할 건데?"

재민이 급격히 누그러든 말투로, 그러나 아직도 현남편이라도 되는 양 물었다.

"사무실 가실 거죠? 저도 사무실 다시 들어갈까 하는데. 제 차로 같이 갈까요?"

"그럴까요?"

대화를 마친 연희와 도영이 재민을 보았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재민이 당당한 척 허리를 쫙 폈다.

"그럼 우리 오늘 화해한 거다?"

머쓱한 말투까지는 숨겨지지 않았지만.

재민이 휘적휘적 자리를 뜨자 도영이 한 걸음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누나, 괜찮아요?"

"때마침 와줘서 고마워요."

좀처럼 안심이 되지 않는지, 도영이 멀어지는 재민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한참 후 뒤를 돌아본 재민이 도영과 눈을 마주치고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재민이 다시 등을 돌리고 바삐 걸어갔다.

"누구예요?"

"전남편."

착잡한 얼굴로 연희를 바라보던 도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나 술 마셨어요?"

"티 나요?"

살짝 열이 오른 뺨을 매만졌다.

"네. 그렇다고 이상한 건 절대 아니고요. 더 어려 보여요."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도영 혼자서 쩔쩔맸다.

"근데 기억력 좋다. 한 번 데려다주고 우리 집을 어떻게 기억해요?"

"관심 있으면 다 외워져요."

"…네?"

"농담이에요. 그때 내비 찍고 왔었잖아요."

긴장이 풀어진 연희가 환히 웃었다. 바라보던 도영이 별안간 양손으로 제 뺨을 짝, 하고 쳤다.

"갑자기 왜 그래요?"

연희가 놀라 도영의 손을 붙잡았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도영의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도영이 연희에게 잡힌 손을 보며 물었다.

"한강에 불꽃놀이 보러 같이 갈래요?"

이미 한창 진행 중인 불꽃놀이였다. 지금 출발해 봐야 한강에 도착하면 다 끝날 시간이 될 것이다. 게다가 여기까지 운전해서 온 사람을 그 도로 한복판에 또 올려놓기도 그렇고….

잠시 망설이던 연희가 물었다.

"불꽃놀이는 우리 집에서도 잘 보이는데, 올라가서 같이 볼래요?"

펑펑.

시원한 폭발음과 함께 불꽃이 터졌다.

"이런 거 안 사와도 된다니까."

도영이 급히 사온 포도를 씻어 접시에 냈다. 오랜만에 먹는 신선한 과일 맛에 얼굴이 풀어졌다.

"초대받았는데 어떻게 빈손으로 와요?"

도영이 환하게 웃었다. 술을 먹어서일까, 평소보다 더 어리게 느껴져서 머리를 조금 쓰다듬어주었다.

"도영 씨 같은 막둥이 동생 하나 있었어도 좋았을 거 같아요. 뭘 해도 귀엽잖아."

"뭘 맨날 애 보듯이 하고 그래요? 나도 다 컸는데."

투덜대던 도영이 연희의 손목을 붙잡고 떼어냈다. 금방 놓아줄 줄 알았던 팔목을, 도영은 그대로 붙들고만 있었다. 연희의 손목을 보며"되게 가늘다…."하고 중얼거렸다.

도영도 취한 걸까? 눈을 크게 슴벅인 도영이 한참 동안 연희의 손목과 제 손목을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좀 더 아래로 손을 내려 연희의 손을 꽉 쥐었다. 허공에서 손과 손이 틈 없이 맞물렸다.

술기운 때문에 다소 둔해졌던 신경이 급격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멍하니 뜨였던 연희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고, 이내 난감한 빛을 띠었다.

"진짜 친누나였으면, 일부러 핑곗거리 만들어가면서 이렇게 찾아오지 않는다고요."

"…도영 씨?"

"그냥 얼굴 한 번 보겠다고 경주에서 서울까지 5시간을 달려올 일도 없고요."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도영의 얼굴이 조금씩 연희의 얼굴 근처로 다가왔다. 숨결 닿는 곳까지 접근했던 얼굴은, 연희의 흔들리는 동공을 보고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누나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구나."

"어…. 그랬네…."

도영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얼굴을 뒤로 뺐다. 연희를 붙잡았던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방금 나 좀 위험했다. 그죠?"

"응."

"……."

"도영 씨, 아무래도 이제 나가봐야겠다."

"더 있으면 안 돼요?"

"…가는 게 좋겠어."

본의 아니게 착각하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길가까지 도영을 바래다주던 길, 신발을 대충 구겨 신은 도영이 말했다.

"그래도, 오늘 아무 성과가 없진 않았네요."

"뭐가?"

"누나, 나한테 말 놨잖아요. 오늘."

씩 웃은 도영이 손가락으로 코끝을 문지르더니 물었다.

"아쉬운데 한 번 시험해 보면 안 돼요?"

"뭘?"

"나 한 번 안아볼래요? 영 아무 느낌 안 드는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눈빛은 간절했다. 연희도 잘 아는 간절함이었다.

어깨를 잡고 가볍게 안아주었다. 닿지도 않은 가슴이었지만 상대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너무도 잘 느껴졌다. 어쩔 줄 몰라 멈춰 버린 호흡도 여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연희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 역시 아닌 것 같아."

"아…."

탄식을 뱉은 도영이 멋쩍은 얼굴을 했다.

"할 수 없죠."

"…정말 미안."

"시간은 많으니까. 나 좀 더 기다려 봐도 되겠죠?"

그러지 말라고 말할 새도 없이, 도영이 앞을 향해 힘차게 달려 나갔다.

한껏 멀어진 뒤에야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연희에게 손을 흔들기 위해서였다. 민망할 텐데도 인사를 잊지 않는 도영이 가상했다.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불러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하면서.

도영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쯤, 연희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까 문득 생각난 사실 때문이었다.

재민이 다가와 불안했던 순간, 반대편에서 가까워지는 인영을 느꼈을 때.

선우인 줄 알았다.

그리고 선우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선우였으면 했다.

미친 게 분명했다.

아무리 근래 선우에게 도움을 몇 번 받았다고 해도 그렇지. 힘들 때마다 선우를 찾던 습관이 다시 튀어나온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그 사람 한마디에 더할 수 없이 비참했으면서. 부끄러웠으면서. 피하고 싶었으면서. 악연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면서. 그런데, 그런데도….

선우였으면 했다.

창 아래로 내려다보았던 하얀 세단은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