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49)화 (50/98)

<49>

쉽게 긍정하지 못하는 연희를, 선우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돌아오지 않는 반응에 멋쩍은 듯 턱을 매만지더니 뒤에 두었던 다른 한 손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아.

선우의 손에는 연희의 가방이 들려 있었다.

오늘 자신이 가방을 들고 다녔었다는 것도, 어느 순간부터는 가방을 잃어버린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것도 몽땅 잊고 있었다.

재민에게 끌려가다가 떨어뜨린 건지, 호텔 룸에 두고 온 건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놓쳐버린 것을 챙겨주는 사람이 왜 하필 당신인 걸까?

손을 내밀어 가방을 잡자 갑자기 선우가 가방을 힘껏 끌어당겼다. 엉겁결에 연희까지 가방과 함께 선우 앞으로 끌려갔다.

"그게 아니면, 지금보다 좀 더 편히 생각해 주는 건 어떻습니까?"

연희가 한숨을 쉬었다. 평온을 가장하기에는 너무 피곤한 하루였다.

가방에서 얹힌 선우의 손을 붙잡자 선우의 눈이 커졌다.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손을 떼어냈다. 쉽게 떨어져 나간 손이 잠시 떨렸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부사장님과 제가 굳이 편해질 필요가 있는지."

"…딱히 멀어질 이유도 없지 않나요?"

"정해진 일 외에 자꾸 엮이는 게 솔직히 불편합니다."

이런 건 옳지 않았다.

"……."

"예전에야 어쨌든, 지금 우리가 추억 팔이나 하자고 만난 사이는 아니잖아요."

이번에 선우는 웃어넘기지 않았다. 적당히 눙치는 농담도 건네지 않았다. 연희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둔 선우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냥 안타까워서 그럽니다. 좀 더 잘 지냈으면 했는데."

선우가 기어코 숨겨놓은 속을 꺼냄과 동시에, 연희는 발밑이 아득히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무것도 몰랐다는 게 너무 아쉬워서. 진즉 알았으면 어떻게든 도왔을 겁니다."

동정에 기대어 받기만 해야 하는 상대가 얼마나 초라할지는 아나 모르겠다.

더 말하지 말라는 뜻을 담아 연희가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선우에게서 멀어지다가 뒤를 돌았다.

이게 맞는 거였다. 혼자 버텨 내는 게.

선우에게 아무 위로를 구하지 않는 게.

그러나 텅 빈 집에서 오롯이 혼자 남았을 때, 뒤늦게 이는 한기로 온몸이 떨릴 때, 제가 떼어낸 그의 손이 품었던 온기를 떠올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창문 아래로, 한참 동안 집 근처에 머물던 선우의 까만 세단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늦은 저녁, 현관 앞에 놓인 전복죽과 해열제를 발견했기 때문일 지도.

* * *

"회사에서 여기까지 뛰어온 건 아니죠?"

J호텔로 들어서자마자 복도에서 마주친 이 매니저가 연희에게 물었다. 전반적인 배치와 구체적인 진행 동선을 재확인하기 위해 이 매니저와 함께 홀을 둘러보기로 한 날이었다. 연희와 이 매니저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뭐라도 타고 와서 그나마 이 꼴입니다."

폭염주의보가 내렸다더니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나는 하루였다. 한여름의 태양이 어찌나 뜨겁던지, 불에 덴 것 같았다.

"난 견딜 만은 하던데. 연희 씨는 머리가 긴 편이라 더 더운가?"

"안 그래도 조만간 미용실 한 번 가려고요."

오랫동안 관리하지 못한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뻗쳐 있었다. 머리카락이 닿는 곳마다 땀이 찼다. 미용실에 가면 아주 짧게 잘라달라고 해버려야겠다.

머리카락을 그러모아 한 손에 틀어쥐고, 행사가 진행될 홀 안으로 들어갔다. 고무줄이라도 하나 챙겨올 걸 그랬다.

"포토테이블도 놓아야 할까요?"

"글쎄요. 약혼식보다는 바자회에 포커스를 두자는 게 부사장님 의견이라. 아직까지는 사진촬영 일정을 잡으시겠다는 말도 없었고요."

"식과 관련된 장식물은 최대한 줄이고 싶으시다는 뜻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홀을 둘러보는데, 이 매니저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괜찮으세요?"

뭘 묻는지 생각하다가 이 호텔에서 재민과 부딪힌 날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날 이후 처음 보는 자리였다.

"아. 괜찮아요. 그날 많이 놀라셨죠? 안 좋은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아니,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이 행사가 다른 행사도 아니고…. 아이, 참."

잠깐 뒷머리를 긁은 이 매니저가 다시 행사 이야기로 돌아갔다.

"최종 확정된 초대인원이 예상보다 좀 많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공간은 넉넉할 거예요. 배치는 재량껏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다이어리에 홀의 구성안을 대충 스케치해 보는데, 홀 입구에서 쨍한 빛이 쏟아졌다. 문이 열린 것이었다.

"이 매니저님, 말 다 끝났으면 먼저 나가볼래요? 처리해 줄 일이 좀 있는데."

뒤늦게 나타난 선우는 이 매니저에게 몇 가지 할 일을 추가로 지시했다. 이 매니저가 자리를 떠나자 홀에는 연희와 선우 둘만 남았다.

다른 행사 때문에 미리 세팅되어 있던 좌석에 선우가 털썩 앉더니 연희에게도 앉으라며 옆의 의자를 짚었다. 고요한 가운데, 이따금 선우가 수정된 행사 기획안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페이지 넘기는 소리가 유독 느렸다. 어딜 그렇게 열심히 보는 걸까? 머릿속으로 수정된 내용들을 되짚는데 선우가 갑자기 연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연희의 전신을 한 번 훑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에 연희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혹시 그날, 어디 다친 데는 없었고요?"

"아…."

참고 있던 질문을 뱉어내 후련하다는 듯, 선우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내내 그 일을 떠올리고 있었던 건가?

"그 전남편이란 사람이 꽤 거칠어 보이던데요. 무슨 수를 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선우가 넘겨보던 기획안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기획안이 테이블 모서리에 위태롭게 걸쳐졌다. 연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연희라고 재민을 막을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접근금지 신청을 알아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진단서라도 있으면 모를까 뚜렷한 폭행 증거가 없으니 강제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처음 뺨을 맞았을 때 진단서를 떼어두지 않은 것을 참 많이 후회했었다.

이후 재민은 직접적으로 흔적이 남을 만한 폭력은 좀처럼 행사하지 않았다. 다만 금방이라도 '너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다'는 분위기를 만들곤 했다. 손가락으로 가슴을 밀어내는 것만으로도, 손을 위로 한 번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날 선우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끝내 재민의 손이 연희에게 향해 날아들지 않았을 가능성이 훨씬 더 컸다. 그럼에도 무서웠다. 그래서 또 부끄러웠다. 지나고 보니 과한 엄살을 부린 것만 같아서.

"그날 일은…. 호텔에 누를 끼치고 부사장님도 곤란하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남편이 아직 미련을 못 버린 건가요? 혹시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의도를 잘못 짚으셨네요."

재민이 패악을 부리는 이유는 애정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다. 손에 쥐고 휘두를 수 있다 믿었던 장난감에게 졌다는 패배감, 내준 돈에 대한 아쉬움이 고루 섞인 것이었다.

그 알량한 위자료 몇 푼만 돌려주어도 지금보다는 더 유한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알면서도 재민이 원하는 돈을 내줄 수 없었다. 돈 몇 푼이 사람을 얼마나 가볍게도, 무겁게도 만드는지 선우는 모를 것이다.

그리고 이런 화제로 대화를 나누는 지금이 연희에게 얼마나 피하고 싶은 순간인지도, 선우는 모를 것이었다.

연희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자, 미간을 찌푸린 선우가 다른 걸 물었다.

"그런 사람과 어떻게 결혼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겁니까?"

"기대하지 않으면 그럭저럭 버틸 수 있으니까요."

언제부터인가 연희의 삶은 대개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포기하는, 그럼에도 생기고야 마는 상처는 시간이 씻겨 내주기를 기다리는 방식으로.

지친 얼굴을 본 선우의 낯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턱 근육이 바짝 솟았다. 무언가 더 말하려는 것 같기에 연희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이 이상 사적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선우가 입을 다물었다. 다만 몹시도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하릴없어진 연희가 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잡아 틀어 올렸다. 그러다가 묶을 것이 없다는 걸 깨닫고 그대로 내려놓았다.

선우가 연희의 긴 머리카락을 시선에 담았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단상으로 걸어갔다. 단상 안에 숨겨진 수납장에서 볼펜 꾸러미를 꺼내더니 꾸러미를 묶고 있던 고무줄을 빼냈다. 고무줄은 연희에게 내밀어졌다. 수납장에 다시 던져진 볼펜들이 좌르르 흩어지는 소리를 냈다.

"머리부터 좀 묶죠. 답답한 거 같은데."

순간, 대학시절의 선우가 겹쳐 보였다. 강의를 들을 때마다 노란 고무줄을 꺼내주던 긴 손가락은 지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 손가락을 두드려 만들어내는 박자도 그랬다. 느릿한 심장박동과 닮은 간격.

얼떨떨하게 고무줄을 받아 머리를 동여맸다. 단단히 묶은 머리채가 뒤에서 찰랑거렸다.

"살살 좀 묶지. 머리카락 다 잡아먹히겠네."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선우가 말했다.

"어제 행사 업체에서 전화 여러 번 왔었어요."

예림이 말하고서야 결재가 늦어져 비용을 지불하지 못한 대행사가 생각났다.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 서 팀장과 다툼이 생겼던 곳이었다.

서 팀장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더라? 기분은 어땠지? 언제 결재서류를 내미는 게 좋을까?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짚는데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책상 서랍에서 노란 고무줄을 꺼내 머리를 묶는데 선우의 말이 생각났다.

'머리카락 다 잡아먹히겠네요.'

이후로도 종종 생각이 났다. 뒷머리의 고무줄이 느슨해질 때마다, 그래서 튀어나온 머리카락이 어깨를 스칠 때마다.

다시 머리를 묶기 전, 싸움이라도 할 기세로 고무줄을 한참 노려보았다. 조악하고 힘없는 고무줄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제대로 된 머리끈은 다 어디로 가고 노란 고무줄만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역시 머리를 잘라야 해.

그랬으면서, 막상 퇴근길에는 미용실을 지나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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