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가까운 객실 앞에 멈추어 선 재민이 룸 키를 도어 인식기에 가져다 댔다.
방안에 들어서자 전날도 묵었던지 재민의 셔츠와 바지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방안에 가득 찬 향수 냄새는 명백히 여자의 것이었다.
"야. 벗어봐."
"뭐?"
오랜만에 듣는 재민의 말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취했어?"
그러고 보니 올라오는 동안 짙은 술 냄새가 났던 것도 같다. 바닥에는 빈 양주병이 두 개나 널브러져 있었다.
"아까 그 놈이랑 어디까지 갔는지 확인해 봐야 할 거 아냐. 나도 사진 다 찍어놓을 거야. 너도 내 사진 찍어갔잖아. 이래야 공평하지. 안 그래?"
재민은 외도 현장이 사진으로 찍힌 걸 그렇게 수치스러워했다. 연희도 내켜서 한 일은 아닐뿐더러, 그 적나라한 사진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증거라도 들이밀어야 합의이혼을 얻어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 끝난 일 갖고 왜 이래?"
"억울하게 뜯긴 내 돈 돌려받기 전에는 다 끝난 게 아니지."
테이블 위에 놓인 술잔은 두 개였고, 그 중 하나에 립스틱 자국이 묻어 있었다.
지금껏 같이 있지 않은 걸 보면 전날 함께 한 여자와 싸우기라도 했나 보다. 화풀이할 상대를 찾고 있던 참에 전 아내를 만났으니 얼마나 신났을까?
이혼한 지가 한참이건만, 작게 긁힌 상처 하나라도 찾아내면 외도 흔적이라고 우길 기세였다. 핑계 삼아 내키는 대로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겠지.
재민의 행동이 조잔하고 우습다는 심상과는 별개로, 재민의 힘과 덩치는 꽤 위협적이었다. 재민이 한 손으로 쥔 멱살을 떼어내기 위해 연희는 두 손을 다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연희의 안간힘이 무색하게도 재민의 손은 그 자리 그대로였다. 바닥에서 발끝이 들리고 숨이 턱 막혔다. 헐떡이는 연희를 보고 재민이 비소를 흘렸다.
마침내 재민의 손이 연희의 옷에서 떨어졌다. 재민의 의지로.
큼직한 만큼 두터운 손바닥이 연희의 머리 위까지 올라갔다. 그 손으로 얼굴을 맞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힘을 조절하지 않은 손속에 얼굴 반쪽이 날아가는 줄 알았건만, 시퍼런 멍이 들었을지언정 얼굴은 제자리에 있었다. 다만 애써 평범하게 가꿔왔다 믿은 일상이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지금 또 한 번 연희의 일상이 날아가려고 했다. 가장 먼저 날아갈 것은 어제의 평범한 외출. 거기에서 누렸던 선택의 사치. 유쾌함과 긴장감, 피곤함 따위의 소박한 감정들.
남는 것은 우울함과 자괴감, 끝 모를 무기력함이 될 것이다.
연희를 장난감처럼 쥐고 재민이 웃었다. 두꺼운 손바닥이 하강을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이 감길 때였다.
쾅!
잠겨 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안전요원과 한 비서 사이에 선우가 서 있었다. 당혹스러움에 얼굴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비참했다. 하잘 것 없는 모습을 모두 들키다 못해 이제는 전남편에게 맞기 직전인 모습까지 보이고 말았다.
"누구십니까?"
"이곳 책임자입니다만."
재민의 질문에, 선우는 정확한 직함을 말하지 않았다.
"웬 남자분이 여자분을 억지로 끌고 간다는 제보가 들어와서요. 경찰에 신고할까 하다가 우선 사정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와봤습니다."
경찰이라는 얘기에 재민이 몸을 움찔했다.
"부부 사이 일입니다. 조용히 할 얘기가 있어 방으로 온 건데 이렇게 함부로 문을 열면 어떻게 합니까? 사생활 존중도 모릅니까?"
재민이 뻔뻔하게 우겼으나, 선우는 그런 재민의 모습을 일별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연희에게 다가와 확인했다.
"맞습니까?"
"…아니요. 이미 이혼한 사이입니다."
아니라고 대답하는 연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결혼 소식도 알리지 않았던 선우에게 이혼부터 말하게 된 게 부끄러웠다. 평범한 결혼생활마저 실패했다는 걸 알려야 하는 처지가 초라했다.
"이 사람과 사적으로 할 얘기도 없고요. 오해가 있었지만 굳이 풀고 싶지 않습니다."
겨우 말을 마치자 선우가 재민을 보며"그렇다는데요?"했다.
입은 웃고 있었으나 매서운 눈에 적의가 깃들어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이 매니저가 손가락으로 재민을 가리키며 '나 밀친 사람, 저 사람 맞아요!'라고 앙칼지게 외쳤다.
엘리베이터 안에 혼자 갇히게 되어서 무서웠다고, 말 안 되는 엄살도 부렸다.
재민이 연희를 노려봤지만 잠시뿐이었다. 저보다 풍채 좋은 안전요원이 다가서자 재민이 뒤로 한발 물러섰다. 그 틈에 연희가 열린 문을 향해 걸어갔다. 선우를 지나칠 때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렇게 하면 지금 여기 있는 자신의 존재를 지울 수라도 있는 것처럼.
"됐습니다. 다들 나가주세요. 좀 쉬고 싶습니다."
불리한 상황을 피하고 싶은지 재민이 모두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선우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바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안전요원들이 연희를 먼저 방 밖으로 보내고서야 선우도 걸음을 뗐다.
선우가 연희를 앞서 걸었고, 이 매니저와 안전요원은 연희 뒤를 따라 걸었다. 한참 걷던 선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까지 오기 전에 막았어야 했는데, 호텔 대처가 미흡했네요. 죄송합니다."
깍듯하고 정중한 인사였다.
"아닙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데 아래쪽을 내려다 본 선우가 연희를 급히 막아섰다.
"왜…."
놀란 연희의 얼굴을 확인한 선우가 한발 뒤로 물러섰다.
"지금 보니까 옷이 좀 흐트러졌네요."
그게 대수인가? 지금이라면 설령 발가벗고 있더라도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이 남자 앞만 벗어날 수 있다면 상관없을 것 같았다.
"가슴 부분이…."
선우가 눈을 옆으로 굴려 연희를 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아차,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재민이 움켜쥐었던 블라우스의 단추가 세 개나 떨어져 있었다.
스판 재질이라 양옆이 제법 많이 벌어졌다. 가슴 중간까지 훤히 펼쳐진 블라우스를 서둘러 여몄다. 선우가 한 비서에게 지시했다.
"비어있는 룸 하나 내주세요."
"괜찮아요. 1층 화장실에 잠깐 들어가서 여미면."
당혹스러운 사람은 연희인데 선우의 얼굴이 더 붉었다. 그래도 말하는 어조만은 강경했다.
"1층까지 그런 차림으로 갈 겁니까? 쉽게 수습될 것 같지도 않고."
"……."
"들어가 있으면 갈아입을 옷 보내줄게요."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부담스러우면 옷값 받을 테니까 일단 가요."
일방적으로 상황을 정리당하는 가운데 점점 확실해졌다. 시간이 흐른 만큼 상대는 더욱 대단해졌는데 반해 자신은….
선우와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새삼 재민이 원망스러웠다. 하필 왜 이 호텔에 와서는. 차라리 다른 호텔에서 마주쳤으면 좋았을걸.
"말씀하신 옷 가져왔습니다."
급히 달려온 호텔리어가 같은 층의 빈 방을 하나 안내해 주었다. 호텔리어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리어가 가져온 옷을 갈아입은 뒤에는 한참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다리에 힘이 빠진 탓이기도 했고, 정신적으로 피곤한 탓이기도 했다.
겨우 몸과 마음을 다잡고 방을 나선 순간,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자리를 떠났을 줄 알았던 선우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다소 강한 어조였던 아까와 달리, 위험할 정도로 부드러운 말투였다.
"죄송합니다."
깍듯한 사과의 말에 선우의 미간이 급격히 좁아졌다. 말투도 다시 굳어졌다.
"뭐가 죄송합니까? 지연희 씨가 잘못한 게 없는데."
정말이지, 이럴 때 만나는 선우는 위험했다.
곁에 지탱해 줄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짠, 하고 나타나던 선우의 재주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근래에도 그랬고 예전에도 그랬다. 한때는 선우의 얼굴만 봐도 안심이 될 지경이지 않았던가. 그 끝이 좋지 않았음에 애써 묻어놓은 기억이지만.
지금도 그랬다. 불규칙하던 심장박동이 점차 제자리를 찾아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런 말이 듣고 싶었던 건 아닌데."
선우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어색하게 블라우스 끝자락만 만지작거리는 손을 선우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바래다줄게요."
"아니요. 바쁘실 텐데요."
"갈아입은 옷이 좀 작은 것 아닙니까? 움직이기 불편해 보입니다."
"아니 그래도 더는 신세를 질 수가…."
연희가 무어라 말하려는 것을 선우가 막았다.
"그냥, 오늘만."
"……."
"그래야 내가 안심이 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더 말릴 기운도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도움받아놓고 이제 와서 거절하는 것도 우습지.
변명 같은 혼잣말을 했다.
* * *
"많이 무서웠어요?"
운전대를 쥔 선우가 물었다. 지나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연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보다 더 충격을 받은 것 같은 선우 앞에서, 괜찮은 척 굴어야 할 것 같았다.
선우가 곁눈질로 연희를 보았다. 자유로운 한 손을 뻗어 연희 쪽으로 가져가려다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손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타닥타닥. 규칙적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선우가 손을 핸드브레이크로 옮겨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였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소리에만 집중하라는 듯이. 귓가에 들리는 소리를 따라갔다. 서서히 잡념이 사라진 덕인지 두통마저 약해지는 것 같았다.
골목이 점점 좁아진 끝에, 선우의 새까만 세단이 낡은 연립주택 앞에 정차했다.
"여기 살아요?"
"네."
"예전 집에서 사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작은아버지랑 작은어머니만 살고 계세요."
"아. 그래서…."
선우가 뜻 모를 한탄을 했다. 연희가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자, 약간의 틈을 두고 선우도 뒤따라 내렸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앞으로는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돼요."
그냥 뒀다가는 입구까지 따라올 것 같아 미리 인사를 건넸다.
나약해진 지금, 이 이상 선우 옆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온몸의 세포가 경고했기 때문이다. 그대로 뒤돌아 가려는데 성큼 다가온 선우가 연희 앞을 막아섰다. 두 손은 뒷짐을 진 채였다.
"아직도 내가 많이 불편한가?"
선우가 그들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려는 듯 고개를 옆으로 조금 기울였다.
기울어진 얼굴이 연희를 바라봤다.
객관적으로는 썩 거리가 있는 위치인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가깝게 느껴졌다. 연희가 뒷걸음질해 거리를 벌리자 선우가 쓰게 웃었다.
"아마도…요?"
"적당히 아는 사이도 이 정도 도움은 주고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적당히 아는 사이라니.
연희는 '적당히'도 선우를 모르겠는데.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상황에 따라 제멋대로 선택해 보여주는 얼굴 중 어느 게 진짜인지 여전히 헷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