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47)화 (48/98)

<47>

"조금 더 보면 좋은데."

도영이 주차장으로 향하며 말했다.

"집에 일 있다면서요."

"네. 갑자기 누나랑 매형이 온다고 연락이 와서요."

"미리 알았으면 서울에는 다음에 올 걸 그랬어요. 얼른 가요!"

연희가 도영의 등을 떠밀었다. 등을 떠밀던 팔은 곧 선우의 손에 붙잡혔다. 놀라 바라보자 선우가 입을 열었다.

"그럼 연희 씨는 제 차 타고 가시죠."

차 문을 열던 도영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차 문을 도로 닫고 연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누나, 차 안 갖고 왔어요?"

"네."

"그럼 말을 했어야죠! 제 차 타세요. 바래다 드리고 갈게요."

"난 괜찮은데 도영 씨 집에 갈 시간이 너무 늦어지지 않겠어요?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연희는 사실 누구의 차도 타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지하철을 타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영은 그게 엄청난 승패의 갈림길이라도 되는 듯 끈질기게 졸라댔다.

그 사이, 선우가 차 키의 버튼을 눌렀다. 근처 어딘가에서 삑, 차 문 잠김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연찮게도 도영의 차와 가까운 곳에 차를 세워놓은 모양이었다.

"지연희 씨, 갑시다."

"누나! 제발!"

이게 뭐라고. 연희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도도하고 건방진 도베르만의 얼굴과 순하고 불쌍한 새끼 진돗개(덩치는 성견이었지만)의 얼굴이 시야에 걸렸다.

굳이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타야 한다면 먼 길을 달려야 하는 도영보다는 선우의 차를 선택하는 게 나을지 모르겠지만.

"도영 씨 차 탈게요."

도영은 왕에게 간택이라도 받은 것처럼 좋아했다. 조수석 방향으로 걸어가더니 손수 차 문을 열어 주기까지 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멍하니 서 있는 선우를 향해 도영이 큰 소리로 인사했다. 연희가 선우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도영의 차에 올라탔다.

차가 서서히 주차장을 벗어났다. 백미러로 본 선우의 입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곧 고개를 떨어뜨린 선우가 검은 세단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바보 같았다. 누가 휴일에 고객과 단둘이 있고 싶어 하겠는가.

그게 아니어도, 선우와는 절대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선우는 연희를 너무 쉽게 흔드는 사람이었다.

번잡한 도시의 불빛을 스쳐 달리면서 도영이 연희의 눈치를 흘끗 보았다.

"누나. 그 사람 좀 이상한 거 같아요."

"그런가?"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높은 자리에 있어서 눈치가 없는 건지…. 눈치가 있는 거면 더 이상한 거고요."

"……."

"하여튼 별로인 것 같아요. 조심해요."

이미 경계하고 있어. 그런데 경계하느라 자꾸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게 짜증 나.

그 사람과 관련된 무언가를 다짐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게 피곤해.

연희는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바스락거리는 질감의 포장지가 손에 닿았다. 알맹이가 사라진 사탕 껍질이었다.

* * *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는데도 피곤했다. 어제 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도영과 선우 사이에서 긴장한 탓일 거다. 차라리 집에서 TV나 보며 엎어져 있는 게 나았으려나.

오늘 집에서 남은 업무를 처리할 생각을 하니 헛되이 보낸 어제가 더욱 아쉬워졌다. 전날 들었던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 업무용 숄더백에 옮겨 넣는데 가방 안이 무언가 허전해 보였다.

다이어리가 없었다.

지난 일정을 떠올리다가 그제 J호텔 회의실에서 다이어리를 사용한 게 마지막이었다는 결론이 났다. 당장 내일 아침까지 완성해 놓아야 할 프로젝트 기획서와 금요일에 있었던 회의 보고서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도 다이어리가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간간이 졸음을 쫓는답시고 한 낙서 중에 김선우에 대한 것이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다이어리가 J호텔 회의실을 벗어나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다면….

…그러니까 김선우 욕을 얼마나 적어놨더라?

실명을 쓰진 않았다. 하지만 추리하자면 충분히 알 수 있기도 했다. 더군다나 그가 일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다이어리에는 연희의 공적, 사적인 온갖 역사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언젠가 그 내용을 책으로 엮겠다고 다짐했을 정도가 아닌가? 일하면서 겪은 좋은 일도 담겨 있었지만, 안 좋은 일도 가감 없이 다 들어 있었다. 비굴하고, 치사하고, 부끄러웠던 일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우에게는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날 마지막으로 회의실에 남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설마 선우는 아니었겠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피로도, 컨디션 난조도 잊었다. 이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 다이어리는 이 매니저가 곱게 보관하고 있었다.

"별말씀을요. 회의 끝나고 보니까 두고 가셨더라고요. 바로 말씀드린다는 게 깜빡했네요."

"혹시 내용을 보신 건…."

"아니요! 이래봬도 저는 프라이버시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기에는 첫 만남부터 묻지도 않은 선우의 유학 생활을 잘도 떠들지 않았나.

"그나저나, 호텔에 계신 줄 알고 연락드렸는데 쉬는 날이셨군요."

이 매니저의 발랄한 차림을 보니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하. 오늘 제 옷차림이 많이 프리하죠? 근데 나랑 연희 씨랑 청바지 색 빠진 게 어쩜 이렇게 똑같지? 윗도리 색깔도 똑같고. 꼭 커플로 맞춘 것 같다, 그쵸?"

"재질이 완전히 다른데요."

연희가 입은 스판 블라우스와 이 매니저가 입은 후드 티는 그야말로 색만 같을 뿐이었다.

"그래도요. 누가 보고 오해하면 안 되는데…."

이 매니저가 중얼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누가 본다고.

"저 때문에 일부러 나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안 그래도 부사장님이 호출해서 급하게 나오려던 길이었어요."

곧 있을 호텔 VIP 초청 공연 준비 때문에 어차피 휴일을 반납할 상황이었다며 재민이 툴툴댔다.

이쪽도 윗사람 등쌀에 쉴 틈 없기는 매한가지구나 생각하니 이 매니저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풀어진 표정을 눈치 챈 이 매니저가 옳다구나 싶은지 수다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듣고 있는 동안 호텔 체크아웃 시간이 다가왔다.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이제 일하러 가야 하는데….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자 그제야 이 매니저가 정신을 차렸다.

"참. 할 일 있으시다고 했죠? 저도 VIP 객실 체크하러 가야겠네요."

"얼른 가보세요."

연희가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걸음을 뗐다. 가봐야겠다고 하면서도 도통 움직이지 않는 이 매니저부터 얼른 올려 보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VIP객실 전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이 매니저를 안으로 떠밀었다. 이 매니저가 최고층으로 향하는 버튼을 누르던 때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렸다. 음산한 목소리의 주인이 쿵쿵 소리를 내며 이 매니저와 연희를 향해 걸어왔다. 숨소리만으로도 느껴지는 적의에 이 매니저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전남편인 재민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재민은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자신을 변화시켰다. 필요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유하게 굴었고 필요 없다 싶으면 가차 없이 깔아뭉갰다. 한때 연희는 그에게 갖고 싶은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볼 꼴 못 볼 꼴 이미 다 보인, 굳이 잘 보일 필요 없는 상대였다.

"이 자식은 얼마나 만났어?"

한동안 잠잠했던 레퍼토리가 시작되었다. 마치 재민과 한참 싸우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결혼 생활이 파탄난 책임을 연희에게 떠넘기고 싶어서 기를 쓰고 연희를 몰아붙이던 그때.

"만나긴 누굴 만난다는 거야?"

"우리 이혼 전부터 만난 거 맞지?"

연희의 말은 가볍게 무시한 재민이 이 매니저를 눈으로 훑었다. 가녀린 체구에 하얀 옷을 걸친 이 매니저는 한 마리의 초식 동물 같아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얼굴로 엉거주춤 선 자세, 둥글게 깜빡이는 눈까지 더해져 더욱 그랬다.

"별 거 없네."

재민이 피식 웃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 매니저가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오려 했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튀어나오려는 이 매니저의 가슴을 재민이 '퍽' 소리가 나도록 크게 쳐냈다.

이 매니저가 엘리베이터 구석에 등을 부딪힘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는 그대로 VIP객실 층을 향해 올라갔다.

재민이 뒤를 돌아봤다.

"너도 다른 남자 있는 거 맞았잖아. 그런데 왜 나만 욕해? 나만 쓰레기 만들어?"

재민이야말로 없는 말을 지어내가며 연희를 쓰레기로 만든 사람이었다. 연희의 반론은 먹히지 않았다. 당시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며 초고속 승진을 이뤄낸 재민이었으니까. 틈나는 대로 술과 골프를 즐기며 인맥을 넓혀온 재민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지금까지 연희의 탓을 한다. 반은 비뚤어진 소유욕일 것이고 나머지 반은.

"그러면서 위자료는 왜 챙겨간 건데?"

결국 돈 얘기를 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집안에 돈도 많다는 놈이 더럽게 치사했다. 툭하면 위자료를 돌려내라고 난리를 쳤다. 차마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은근히 돌려서.

그래도 남들 보는 데선 조심하는 것 같더니. 오늘따라 장소도 잊고 거칠게 구는 걸 보면 대단히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거나 이번 주에 주식으로 손해라도 잔뜩 본 모양이었다. 연희 곁에 서 있던 이 매니저가 만만해 보이기도 했을 거고.

연희가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그러자 재민의 눈빛에 살기가 더해졌다.

"지금 나 비웃은 거야? 감히 네가 이 연재민을?"

"……."

"따라와."

재민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연희의 팔을 붙잡았다. 버티려고 했지만 연희가 당해낼 수 없는 힘이었다.

결국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큰 소리에 놀란 몇몇이 이쪽을 봤지만 당장 나서서 말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것 좀 놓고 얘기해."

"입 다물어."

재민이 연희를 끌고 간 곳은 아까보다 좀 더 외진 곳에 위치한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버튼을 누르자마자 입을 벌린 엘리베이터 안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객실을 향해 올라가는 동안, 불안한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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