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46)화 (47/98)

<46>

"뭐 좀 간단히 먹고 갈까요?"

"괜찮습니다. 얼른 올라가야죠."

남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선우는 늘어선 판매 부스 중 케밥 코너에 들어섰다. 시간이 걸린다고 하자 막 완성된 케밥을 받아든 여자에게로 선우의 눈이 돌아갔다.

"왜 이렇게까지."

결국 선우는 본래 가격의 세 배나 되는 돈을 들여 여자의 케밥을 빼내왔다. 가져온 두 개의 케밥 중 하나가 연희의 손에 쥐여졌다.

"배가 고픈데, 혼자 먹기는 양심에 찔려서?"

"제 몫은 제가 낼게요."

인상을 찌푸린 선우가 저지하려던 차, 연희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통화 버튼을 누른 연희가 어깨와 머리 사이에 휴대폰을 끼웠다. 놀고 있는 두 손으로 지갑을 뒤져 원래 케밥의 세 배가 되는 돈을 셈해 내밀었다.

선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하지만 허공에 뜬 손이 지폐를 몇 번이고 흔들어대자, 결국 지폐를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돌아오는 차에서는 서 팀장의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김 화백 전시회 문제로 그 아들과 한 대리가 대화를 하다가 다툰 모양이었다. 얼마 전까지 김 화백의 아들과 일을 진행해 온 연희가 중재를 좀 해보라는 내용이었다.

"또 무슨 문제 있습니까?"

연희가 통화를 끝나자마자 선우가 기다렸다는 듯 물어왔다.

연희는 헛웃음을 삼켰다. 남의 일에 함부로 나서지 않는다던 선우의 말은, 역시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왜요. 뭐 도와주시려고요?"

"……."

"이 감독님 때처럼 같이 가서 설득이라도 해주시려고요?"

"그럴까요? 내가 김 화백 댁하고 연이 조금 있는데, 지연희 씨가 필요하면…."

연희가 고개만 끄덕이면 당장이라도 행동으로 옮길 것 같았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대충 대답하고 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영도 당시 자리에 함께 있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 누나는 이제 이 일에서 손 뗀다고 해서 일부러 말 안 한 건데…. 보람이 없네요.

김 화백 아들이 갑자기 전시 작품 수를 줄이겠다고 선언한 것부터, 그로 인해 한 대리와 김 화백이 어떻게 자존심 싸움을 하고 얼마나 목청을 높였는지까지 알게 되었다.

도영과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는 동안, 선우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도영 씨랑 많이 친합니까?"

차에서 내리기 전 선우가 물었다.

"…그런 편이죠."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그래도 제가 준 거, 다른 사람한테 함부로 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네?"

"내가 준 게 싫으면, 차라리 다른 걸 요구해요."

좀 전까지의 허물없던 말투는 사라지고 차가워진 말투가 빈자리를 메꾸었다. 말의 내용은 다시 만난 선우의 존재처럼 모호하기만 했다.

일일이 신경 곤두세워봐야 나만 힘들지.

목적어 없이 애매하게 흘린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로 했다.

* * *

삼성역은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로 북적였다. 복잡한 구조 때문에 올 때마다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극장은 눈에 뜨이는 곳인데다 예전과 같은 위치라 다행이었다.

"누나 오늘 좀 멋진데요? 가방도 못 보던 거네?"

기분 전환 삼아 평소 입지 않던 원피스를 입고 핸드백을 챙겨들었다. 재킷 하나만 늘 입던 그대로였다. 도영 역시 평소에 입지 않던 차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캐주얼한 차림이 정장보다 훨씬 더 잘 어울렸다.

"주말에 서울 오느라 힘들었죠?"

새로운 기획전 준비로 고생하고 있을 텐데, 도영은 그리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건강한 청년의 표본 같았다.

청량해 보인다고나 할까. 여자들에게 매너도 좋을 것 같고, 농구랑 축구도 잘 할 것 같고. 왠지 누나들한테 맞으면서 제대로 된 인성교육도 좀 받았을 것 같고….

도영을 한참 관찰하고 있었나 보다. 자세를 굳힌 도영이 목울대만 한 번 일렁였다. 남들보다 두꺼운 목둘레가 조금 붉어졌다.

"누나, 나 뭐 이상해요?"

"아니요. 잘생겨서요."

도영이 말을 잃었다. 무슨 영화를 고를지 묻는데도 멍하니 입만 벙긋거리다가"뭐든 좋아요…."라고 했다. 그래서 그냥 상영시간이 가장 가까운 걸로 예매했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유명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신작이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굳이 영화를 볼 필요가 있나? 극장은 경주에도 있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캐러멜 팝콘과 사이다를 샀다. 이 또한 아무거나 좋다기에 그냥 연희의 취향대로 골랐다. 다행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는지, 도영이 커다란 팝콘 통을 보물처럼 껴안고 싱글벙글했다.

막상 영화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객석을 채운 관객들이 거의 다 N차를 찍은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좀 재미있을 만하면 앞뒤에 앉은 아이들이 대형 스포일러를 날렸다. 혹은 저들끼리 대사를 따라 하며 킥킥거렸다. 부모들이 입을 막으려 하는 것 같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우리 누나들 같으면 아주 혼꾸멍을 냈을 텐데."

"…진짜 누나가 있었구나."

"네?"

극장에서 먹는 팝콘이 제일 맛있다는 감상만 남았다.

"도영 씨, 이런 거 좋아하는 거 맞아요?"

도영이 짚은 식당은 일반 파스타 식당의 딱 두 배 가격으로 음식을 팔고 있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곳인가 했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처음 방문한 이의 모습이었다.

"아니. 누나가 좋아할 거 같아서 그랬죠."

"난 아무거나 잘 먹는데."

도영이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괜스레 창밖을 보았다. 그러다가 엇, 하고 소리쳤다.

"왜요?"

"저기 부사장님 있는데요?"

창밖에는 정장을 입은 선우가 엇비슷하게 차려입은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선우 혼자 유난히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린다는 점이었다.

이윽고 선우의 고개가 파스타 가게 방향 근처로 향했다. 잠시 스쳤던 시선은 이내 다시 돌아와 도영 쪽에서 멈추었다.

"어! 우리 쪽 본다!"

도영 씨 때문 아닐까?

190cm이 넘는 덩치가 의자 위에 거의 올라탄 자세로 창가에 딱 붙어 있으니 누구의 눈에라도 띌 수밖에 없었다.

눈을 좁힌 선우가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짓고는 주위 사람들에게 무언가 양해를 구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가 싶더니, 기어이 식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반갑네요. 이런 데서 다 만나고."

하지만 도영을 보는 얼굴은 전혀 반가워 보이지 않았다. 입매는 위로 솟아 있었지만 진짜로 웃는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짜증 난 얼굴에 가까워 보였다.

선우가 연희 옆의 의자를 자연스럽게 끌어 앉았다.

"일 있으신 거 아니에요?"

선우의 행동을 지켜보던 도영이 조금 굳은 얼굴로 물었다. 선우는 도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느라 바빴다. 조금 헝클어진 머리도 뒤로 쓸어 넘겼다.

"근처에서 관계자 미팅이 있긴 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요."

"아…. 그럼 피곤하실 텐데 집에 얼른 들어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도영이 심드렁하게 반응하는데도 선우는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직원을 불러 메뉴판을 부탁했다.

"기왕 왔는데 같이 밥이라도 먹죠. 제가 살게요."

"아니요. 제가 살 겁니다."

두 남자가 서로 밥을 사겠다고 주장했다. 머리가 아팠다.

"그냥 제가 계산할게요. 전에 도영 씨가 밥 사달라고 했었잖아요."

연희가 미리부터 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얹자 도영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그건 그냥 한 말이에요."

"아까 영화표도 도영 씨가 계산했잖아요. 밥은 내가 사야죠."

이번엔 연희와 도영이 실랑이를 하는데 선우가 슬쩍 끼어들었다.

"아… 영화를 봤구나."

"네. 꽤 재미있더라고요."

너무 시끄러워서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도 몰랐다던 도영이 선우에게 문제의 영화를 적극 추천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보고 가실래요? 제가 다음 회차로 예매해드릴까요? 곧 시작할 텐데 직접 가서 사는 게 나으려나?"

도영이 휴대폰으로 예매 사이트를 불러왔다. 선우가 황당하다는 듯 허, 하고 실소했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을 숨기려는 듯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어 올리고 딱딱하게 물었다.

"그런데 사회에서 만난 사람에게 함부로 누나라고 부르는 건 실례 아닌가요? 서로 존대하는 걸 보면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거 같은데."

선우가 입을 뗄 때마다 점점 눈빛이 매서워지던 도영이 날을 세워 답했다.

"앞으로는 놓게 되겠죠? 더 자주 만나고 더 친해질 테니까."

두 남자는 이후 계속 별것 아닌 걸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알 수 없는 기 싸움 때문에 연희는 비싼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다. 도영도 경주에서 서울까지 올라온 보람이 없지 않을까 싶었다.

근데 저 남자는 대체 왜 여기 끼어 있는 거야?

선우를 노려보자 할 얘기가 있냐는 얼굴로 몸을 기울였다. 사실 할 이야기야 없지 않았다.

"이수정 실장님과는 식에 대해 말씀 나누고 계신 거죠? 두 분 의견이 모두 반영된 게 맞는지 한 번 확인해두어야 할 것 같아서요."

생경한 존재를 떠올리는 것처럼 '수정'이란 이름을 한참 동안 되뇌던 선우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수정 씨가… 지금까지 아무 말이 없던가요?"

"네. 중간보고는 메일로 보내드리고 있는데 따로 피드백이 없으셨어요. 당장은 메일 확인이 어려울 거라고 전해 듣기는 했는데…."

아무리 바빠도 최소한 선우와는 의견을 조율하고 있겠지 싶어 물었건만. 선우 반응을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지금껏 선우의 말만 듣고 행사 계획을 진행해 왔는데 막판에 수정이 계획을 전부 뒤엎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수정 실장님이 그렇게 미인이라면서요? 저는 아직 한 번도 직접 못 뵀는데."

수정의 이야기가 나오자 도영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반면 선우의 얼굴은 잠깐 일그러졌다. 곧 옅은 미소를 지으며 표정을 관리했지만, 도영도 그 비틀어진 순간을 포착한 것 같았다. 도영이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느긋이 기댔다.

"우리 관장님이 항상 자랑하셨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미모로는 어디에 내놔도 안 꿀릴 거라고.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거라고 그러셨는데."

"아. 그런가요? 얼굴 본 지가 오래되어서 가물가물하네요."

"이탈리아에 가 계시다고 했죠? 오늘 같은 날 데이트하셔야 하는데 많이 보고 싶으시겠어요."

"네, 뭐."

때마침 선우가 새로 시킨 판넬 파스타가 나왔다. 선우의 얼굴이 뜨악해졌다. 맛을 기대하는 얼굴이 절대 아니었다. 모든 음식을 다시금 둘러보는 도영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좋아서 시킨 음식… 진짜 맞아요?"

연희가 묻자 두 사람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럼요!"

"맞습니다!"

선우와 도영이 경쟁하듯 음식을 집어삼켰다. 연희는 피곤한 눈가를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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