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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관장과 선우가 전시회장 입구 근처에서 전시회 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연희는 도영과 함께 아트페어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전시 기획자의 입장에서 전시관의 동선과 구조, 그림의 배치 방식이라든지 조명 간격과 조도, 벽의 색감이나 재질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관람자의 입장에서 작품에 대한 개인적 감상을 나누기도 했다. 별것 아닌 말도 도영이 잘 반응해 주니 재미있는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도 작가 전시회는 잘 끝났어요?"
"네. 그럭저럭요."
실력에 비해 고평가된 화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거나 도 작가는 잘나가는 화가였다. 여러 방송에 출연해 대중적 인지도가 높았고 사람 자체에 호감이 쌓인 만큼 그림도 잘 팔린다고 들었다.
"사실 그림은 제 취향 아닌데…. 색감은 화려해도 오래 보고 있으면 자꾸 우울해져서요. 작가 설명을 들어보면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저도요. 작가의 뜻이 잘 전해지지 않더라고요. 국내 데뷔 전 작품을 보면 일반회화보다는 콜라주 쪽에 더 재능이 있어 보였는데, 요즘엔 그쪽으로는 작업 안 하는 것 같던데요?"
도영이 조심스레 건넨 평가에 연희도 맞장구를 쳤다. 도영이 역시 잘 통한다면서 손바닥을 펼쳤다. 연희가 손바닥을 쳐주자 아이처럼 웃었다.
슬슬 서울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자꾸만 뒤로 쳐지는 도영을 재촉해 안 관장과 선우가 있던 출발 지점으로 돌아갔다. 안 관장과 선우는 아직도 그대로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참! 우리 아들 갤러리 매출에서 선우 씨가 차지하는 부분이 꽤 된다던데? 여러모로 내가 너무 고마워. 경험도 없이 뛰어든다고 해서 걱정이었는데, 선우 씨가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많이 소개해 줬다면서."
안 관장의 아들이 최근 상업 갤러리를 연 것은 연희도 알고 있었다. 아들 사랑이 남다른 안 관장이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닌 덕이었다.
"안 관장님이 고맙다고 해주시니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어차피 한 가족인데 서로 도와야죠."
"말도 참 예쁘게 한다. 이런 걸 수정이가 좀 배워야 하는데."
이어서 선우와 수정의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다.
"수정이가 철이 많이 없지? 이해해야 할 부분이 많을 거야."
"저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더 노력하고 있고요."
"어쩜. 우리 수정이가 배우자를 너무 잘 만났네."
남의 집안 이야기에서 귀를 돌리려 도영에게 말을 걸었다.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에서 점점 연령이 낮아지고 있는 아트테크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다가 문득 도영이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아. 사탕!"
도영이 주머니를 뒤적여 오늘 연희가 건넨 사탕을 꺼냈다. 두꺼운 손가락으로는 껍질이 잘 까지지 않는지 힘들어하기에 연희가 대신 껍질을 까주었다.
알맹이가 사라진 사탕 껍질은 다시 연희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제가 특히 이 브랜드에서 만든 민트 맛 사탕 좋아하거든요."
"민트 맛은 다 그게 그거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도영이 큰 소리로 부정했다.
"게다가 누나가 준 거니까 다른 사탕하고는 다르죠!"
외치는 말에 선우가 연희와 도영을 힐끗 보고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 이어지는 안 관장의 말에 곧 다시 미소를 지었다.
도영이 덩치에 비해 앙증맞은 사탕을 입 안에 쏙 넣었다. 아깝다며 천천히 먹겠다던 것도 잠깐, 뺨 여기저기가 튀어나오도록 요란하게 사탕을 굴려댄다. 더불어 눈동자도 요란히 굴려대던 도영이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누나. 나 다음 주 주말에 서울 가는데, 잠깐 만나주실래요?"
친구도 많아 보이던데 서울까지 와서 뭐 하러 자신을 만나나 싶었다. 그래도 서울 맛집을 소개해달라며 매달리는 통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신이 난 도영은 벌써부터 그날의 일정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밥 먹는 김에 영화도 보고 차도 마시고 거리 구경도 좀 하고 싶다나. '잠깐'이라더니, 오후를 통으로 비워야 할 일정이었다.
"삼성역에서 2시 어때요? 몇 번 출구가 좋을까?"
휴대폰 검색을 하며 들뜬 모습이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똥강아지 같았다. 커다란 손에 쥔 휴대폰이 너무 작아 보여 웃었다. 내일 모레 서른이면서 다른 동네를 구경한다는 게 그리 좋을까? 마음껏 즐기고 표현하는 젊은 마음이 부러웠다.
갤러리로 돌아올 때도 연희는 도영과, 선우는 안 관장과 팀을 이루어 각기 다른 차를 탔다.
안 관장은 갤러리에 도착하자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직원들에게 그림 몇 점을 내오도록 지시했다. 약혼식에 있을 자선바자회에 내보내기 위해 추려 둔 물품이라고 했다.
꼼꼼히 포장되어 내용물을 볼 수 없는 액자는 선우 대신 도영과 연희의 손에 쥐어졌다.
선우의 차 위치를 묻자, 안 관장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 고속 열차 타고 와서 차가 없다네. 연희 씨가 가는 길에 선우 씨 좀 태워줘요."
연희가 몰고 온 차에 그림이 실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뒤에 그림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 다행인 건지, 다행이 아닌 건지.
"누나 불편하면 싫다고 해요. 내가 기차역까지 데려다준다고 할게."
트렁크 뚜껑을 닫기 전 도영이 속삭였지만 고개를 저었다. 안 탄다고는 할 수 있어도, 안 태운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연희에게 선우는 '모셔야 하는 분' 이었으니까.
게다가 선우는 이미 연희가 몰고 온 차의 조수석에 털썩 앉아 있었다. 거절할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누나 약속 잊지 마요!"
누나라고 부를 때마다 안 관장에게 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기어이 도영은 큰 소리로 '누나'를 한 번 더 외쳤다. 해맑기만 한 태도에 연희도 유쾌하게 웃어버렸다. 지켜보던 선우의 한 쪽 눈썹이 쓱 치켜 올라갔다.
* * *
축제를 찾은 사람이 많은지 달리는 차가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 옆자리에 있는 사람과 빨리 헤어지고 싶은데, 경주를 벗어나는 시간이 자꾸 지연되고 있었다. 남의 마음도 모르고 태연하게 차 내부나 둘러보던 선우가 말을 걸었다.
"오늘, 어땠습니까?"
"나름 유익했습니다. 이것저것 참고할 것도 많았고."
"재미도 있었고요?"
"네."
"같이 다니던 친구 덕분인가요?"
"그렇기도 하죠."
유쾌한 도영 덕에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선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흐음…." 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여기서도 바자회를 열더군요."
어쩌라고.
"한번 둘러보고 싶지 않습니까? 참고삼을 게 있을지."
"전혀요."
바자회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다 같은 바자회가 아니었다. 선우의 호텔에서 진행될 바자회와 일반적인 바자회는 물품부터 고객, 판매방식까지 무엇 하나 빗대어 생각할 만한 것이 없었다. 선우와 시간을 더 보내고 싶지도 않았고.
"난 가 보고 싶은데요."
하지만 모셔야 할 분이 뻔뻔스레 우긴다면야.
"저녁에 다른 일정은 없으신가요?"
선우가 얄밉게 고개를 저었다.
겨우 주차할 공간을 찾고 차에서 내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가로등에 매달린 알록달록한 배너와 푸르고 하얀 부스를 지나쳐갔다.
아까 혼자 거닐 때와 똑같은 풍경이건만, 함께 다니는 사람이 있어서인지 좀 더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사람들의 얼굴이 이렇게 밝았던가. 아이가 쥔 아이스크림이 이렇게 달콤해 보였던가.
"조심해요."
몰려드는 인파 속에서 연희가 발을 여러 번 밟힌 통에, 어느새 선우가 연희의 팔을 잡아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여긴가 보네요."
광장 한쪽에 넓게 펼쳐진 가판대가 보였다. 다양한 액세서리와 예술작품이 저렴한 가격으로 나와 있었다.
형광색 조끼를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손님들을 맞이하는 가운데, 부스 끄트머리에서 누군가가 물건 값을 흥정하는 게 보였다. 보아하니 구매자가 억지를 써서 어린 자원봉사자가 발을 동동 구르는 상황 같았다.
"이거 정말 더는 못 깎아 드려요."
"참 융통성 없네. 비슷한 작품이 인터넷에 수없이 돌아다녀요. 집에서 인쇄해도 되는 걸 돈 주고 사는 건데 훨씬 싸게 해줘야지."
남자가 천 원짜리 몇 장을 던지다시피 가판대에 내려놓았다. 그림 액자 여러 개를 옆구리에 낀 채 그대로 몸을 돌린다. 연희의 몸이 남자 쪽으로 향했다. 일단 도망가는 길이라도 막아주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움직임은 금세 저지되었다. 선우의 손이 연희를 붙잡은 탓이다.
"여기 있어요."
연희에게 한마디를 남긴 선우가 성큼성큼 걸어가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계산은 제대로 하고 가셔야죠."
"댁이 무슨 상관이오?"
저보다 건장한 체격의 선우를 올려다보며, 남자가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여기 관계자라도 돼?"
"관계자만 절도를 신고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 하는 거요? 난 분명히 돈을 냈는데."
선우가 남자의 팔을 쥐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뒷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천 원짜리 지폐 몇 개를 꺼냈다. 선우가 갖고 다니리라 생각지 않았던 잔돈이었다. 남자의 손을 으스러질 듯 쥐어 챈 선우가 그 안에 지폐를 구겨 넣었다.
"이제 아니네요. 그림 돌려주세요. 아니면 정말 신고하겠습니다."
단단한 악력과 험악한 기세에 눌린 남자가 그림을 끼고 있던 팔에서 슬그머니 힘을 뺐다. 남자의 팔을 놓은 선우가 재빨리 그림들을 받아들자, 틈을 놓치지 않고 멀리 뛰어가 버렸다.
"괜찮아요?"
뒤따라온 연희가 묻자 선우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괜찮을 리가."
"어디 다쳤어요?"
연희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선우의 몸을 꼼꼼히 훑었다. 그러나 선우가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제 관자놀이였다.
"몸 말고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남의 일에 함부로 나설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가?
이전에도 타인의 일에 꽤 나서주지 않았던가? 대학 때까지 갈 것도 없다. 얼마 전 이 감독의 집까지 연희를 데려다 준 것만 해도 그랬다.
잘만 나서면서.
바로 그런 면이 사람을 방심하게 만드는 거다. 그렇게 방심하다가 내가 당한 거고.
연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선을 피한 선우가 바자회장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연희 또한 그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걷던 선우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주변을 헤매던 눈이 연희를 찾아내고는 둥글게 휘었다.
한낮도 아니건만 눈이 부셔서, 연희는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또 방심할 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