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44)화 (45/98)

<44>

"못 맡길 건 또 뭐겠어."

"그럼 오늘 서 팀장인지 뭔지 아니었으면 지금도 김선우 만나고 있었을 거란 얘기잖아. 넌 진짜 괜찮아?"

"괜찮지 그럼."

"웃기시네. 김선우 때문에 너 한동안 밥도 제대로 못 넘겼잖아. 툭하면 넋 빼놓고 다니다가 사고 날 뻔하고. 내가 그날 김선우한테 너 있는 곳 알려준 게 어찌나 후회가 되던지. 그럴 거면 대체 왜…."

준호가 세나를 향해 메뉴판을 내밀었다.

"진정하고 주문부터 좀 하자. 나 배고파"

"그래 그만하자. 연희랑 관련된 남자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소화에 좋지. 김선우든 연재민이든."

첫 단추부터 선우로 시작해서 그런가? 괜찮은 사람도 많았을 텐데. 왜 그런 사람들과는 연이 닿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긴 최고의 남자 친구로 증명된 준호도 거절한 연희였다.

연희는 남자 보는 눈이 낮다는 게, 친한 이들의 중론이었다.

"야, 그래도 선우 형은 재민이 자식이랑 비교하기엔 너무 아깝지."

"그건 그래. 바람은 자기가 펴 놓고 연희한테 다 뒤집어씌운 통에 연희 전 직장에서 잘리다시피 퇴사하고 업계에는 요상한 소문만 잔뜩 나고…. 그뿐이야? 꼴에 의심병까지 있었잖아. 연희가 다른 남자랑 있는 것만 보면 난리난리를 쳐서 인맥 다 끊어 놓고."

세나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재민의 악랄한 행각을 듣고 연희보다 노발대발해준 친구들이었다. 직장까지 찾아와 다 엎어버리겠다는 걸 말리느라 힘을 뺐었다. 연희에게 폭행을 행사한 적이 있다는 사실까지 알았다면, 세나는 정말로 재민의 머리채를 휘어잡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연희 보면서 결혼 생각을 접었잖아."

세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준호가 서운한 듯 말했다.

"야, 그럼 곧 결혼할 나는 뭐가 되냐?"

준호가 오늘 만남의 목적인 청첩장을 꺼내들었다. 세로로 긴 직사각형 종이에 선남선녀가 마주보며 웃는 모습이 박혀있었다.

"하필 결혼식이 연희 생일일 건 뭐니?"

"미안. 올해 안에 가능한 한 빨리 하려다 보니 선택지가 별로 없더라고."

두 사람 다 워낙 바빠서 다른 일정을 잡기는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함께 하는 날을 하루도 더 미루고 싶지 않다고도.

활짝 웃는 준호의 표정이 청첩장 속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준호가 청첩장 속 신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유진이가 오늘은 아무래도 못 나올 것 같다네. 섭섭하다고 전해달래."

"회사에서 유진이 너무 부려먹는 거 아냐? 이러다 유진이는 결혼식 때 신부대기실에서나 제대로 보겠다."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랑도 있다는 걸, 연희는 준호와 유진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래도 그런 사랑이 제게 찾아오는 날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준호와 유진이 하는 사랑 이야기가 잘 와 닿지는 않았다.

그저 잘 만들어진 극을 관람하는 관객이 된 기분이었다.

"동훈 형이랑 혜진 누나도 같이 보면 좋았을 텐데."

두 사람은 제주도에 있었다. 동훈은 펜션을, 혜진은 편집 숍을 운영하면서. 동훈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 때문에 혜진은 집을 뛰쳐나오다시피 한 상태였다. 동훈은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한 번씩 허락을 청하러 혜진의 집을 방문하고 있었고.

연희가 잃어버린 열정을 그들은 아직 간직하고 있었다.

선우 이야기를 하면, 동훈이나 혜진도 세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려나? 세나보다는 조금 더 선우 걱정을 해줄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뚝 끊겨버린 선우와의 인연을 내심 아쉬워하는 것 같았으니까.

연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가 문득 선우를 떠올렸다. 눈에 띈 어느 남자의 외로운 뒷모습이 선우와 닮아 보인다는 이유로.

이제 그럴 리가 없는데도.

* * *

"뭐, 별것도 없는 회의더구먼."

다음날 J호텔 회의에 다녀온 서 팀장이 혀를 찼다.

"내가 이 직급에, 거기 말단 직원들하고 회의에 껴있으려니 면이 안 서서, 원. 별것도 아닌 주제로 시간은 어찌나 잡아끄는지…."

서 팀장이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회의 때마다 잡담으로 시간을 잡아끄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이후로도 고급 호텔에서 겨우 김밥 쪼가리나 내밀 줄 몰랐다는 둥, 차도 우리 사무실 것이 훨씬 낫겠다는 둥 쓸데없는 감상평이 이어졌다.

그런데 말단 직원들만 만났다니?

"부사장님은 회의 참석 안 하셨나요?"

"바쁜 부사장이 거길 왜 와?"

서 팀장이 세상 한심한 말을 들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 매니저는 못 봤냐고 묻자 회의 시작 때만 잠깐 얼굴을 비추고는 아랫사람에게 일을 맡긴 뒤 나가버렸다고 했다. 서 팀장과는 몇 마디 제대로 나누지도 않았단다.

"아무튼 난 당분간 그쪽 회의 참석은 힘들 것 같으니까, 연희 씨가 알아서 잘 처리해 놔."

"네."

"내가 가기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그쪽에서도 연희 씨가 왔으면 좋겠대. 아무래도 난 직급이 있으니까 편하게 의견 내기는 어려울 거 아냐."

오로지 일만 하는 회의가 서 팀장의 체질에 맞지 않았나 보다. 서 팀장의 출장비를 대신 청구하면서, 그날의 회의록은 호텔 측에서 작성해 주겠다는 말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어제 본 사람이 정말 선우는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가 왜 선우 생각을 하고 있나 싶어 얼른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 * *

- 오늘 회의 못 오신다고 했죠?

"네. 경주에 출장을 가야 해서요. 근데 저 운전 중이라…."

재단 소유의 커다란 차를 운전할 때는 늘 신경이 곤두섰다. 급히 통화를 마무리하기 전에 이 매니저가 누군가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2주간 열리는 경주문화축제에는 연희가 기획한 몇 가지 한지 소재 소품과 재단 지원을 받고 있는 청년예술가들의 공예품이 함께 소개될 예정이었다.

또한 때맞춰 함께 시작된 경주 아트페어에는 그간 수형문화재단에서 발굴한 갤러리 소속 작가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다.

축제 연합 부스에 들러 자신이 기획한 상품의 판매 현황을 메모한 뒤 경주 갤러리로 향했다. 안 관장, 도영과 함께 아트페어 전시장을 둘러보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왔어요?"

갤러리 주차장까지 마중 나와 있던 도영이 손을 흔들었다. 함께 기다리겠다던 안 관장은 보이지 않았다.

"왜 도영 씨만 있어요?"

"갑자기 귀한 손님이 오신다고 연락 왔대요. 이따 손님이랑 같이 오시겠다는데요?"

조수석에 앉을 때, 얇은 여름 재킷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뭔가 싶어 주머니에 손을 넣었더니 일전에 선우에게서 받은 민트 맛 사탕이 있었다.

버린다는 걸 깜빡 했다.

"도영 씨, 민트 맛 사탕 먹을래요?"

"주시면 감사하죠."

사탕을 건네자 도영이 운전대를 잡지 않은 손으로 사탕을 받아들었다. 신경 쓰이던 바스락 소리가 저쪽 편으로 넘어갔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누가 눈꺼풀을 내리누르는 것처럼 눈이 감겼다. 뒤에 기댄 가죽시트가 솜털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도영이 달리는 속도를 늦추는 게 느껴졌다.

"…희야"

흐린 의식 위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어디지? 누가 나를 부르지?

"지연희."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분명 도영의 차 안에서 잠들었는데, 나이 어린 도영이 연희의 이름을 직접 부를 리는 없었다. 게다가 도영이 있어야 할 운전석이 비어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멀리 도영이 안 관장과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가 연희를 보았는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주 웃고 옆으로 눈을 돌렸을 때,

몇 미터 간격을 두고 선우가 서 있었다. 다소 경직된 얼굴로.

현실감이 없어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혹시 선우가 자신을 부른 걸까 의심했다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선우는 연희를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지 않았다. 그럴 사이도 아니었고.

벨트를 푼 연희가 차 문을 살짝 열었다. 인사를 하기 위해 선우에게 다가가자, 선우가 연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례부터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부사장님이 여기는 어쩐 일로…."

"안 관장님하고 이야기할 게 있어서 오늘 내려온 참입니다. 갤러리에서 받아 갈 작품도 좀 있고요."

하지만 먼저 뒤돌아 안 관장에게로 가지는 않았다. 연희가 먼저 발을 뗀 이후에야 반걸음 떨어져 연희를 뒤따랐다. 뒷짐 진 선우의 주먹이 쥐었다 펴지기를 반복했으나 연희는 볼 수 없었다.

* * *

시 문화재단이 주최한 아트페어는 90여 곳의 국내 갤러리와 10곳의 해외 갤러리를 초청해 총 2천500여 점의 그림을 선보였다. 그 중 40여 점은 수형아트갤러리 소속 작가들이 출품한 것이었다.

미리 전시장에 나와 있던 갤러리 소속 직원 및 작가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한 쪽에서는 먼저 자리를 잡은 안 관장과 선우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희 호텔도 내후년에는 아시아 호텔 아트페어를 유치해 볼까 계획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정말 이쪽에 관심이 많구나?"

일전에 선우를 언급했을 때보다 훨씬 더 친밀해진 말투로, 안 관장이 선우의 팔을 가볍게 터치했다.

"외할아버지께서 워낙 미술작품에 조예가 깊으시다 보니까 저도 관심을 갖게 되어서요."

"하긴 웃어른 영향을 무시할 수가 없지. 언니도 처음에는 우리 아버지가 모으신 작품들을 관리하다가 예술 자체에 흥미를 갖게 된 경우니까. 갖고 싶은 작품이 있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아대는데 나중에는 기가 다 질리더라니까? 그리 힘들게 모아 놓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잘 보여주지도 않아요. 오죽하면 형부한테 다른 재산 다 갖다 바쳤을 때도 이 갤러리만은 언니가 손수 운영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잖아. 수장고 안에 든 작품들은 제대로 관리해야 한다고."

"대단하시네요."

선우 역시 갤러리 운영에 관심이 있었는지 안 관장에게 관련 이야기를 열심히 물었다. 특히 소장품 관리 방식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 안 관장은 냉미남의 싹싹한 태도와 세련된 매너에 혼이 나간 모양이었다. 연방 웃으며 손뼉을 치거나 선우를 토닥였다. 별로 웃긴 이야기도 아닌 것 같은데.

"우리 관장님은 진짜 얼굴 밝히나 보다. 나한테 하는 거랑 너무 다르네. 사람 섭섭하게."

가만 보고 있던 도영이 입을 삐죽였다.

"왜요. 도영 씨도 괜찮은데."

도영도 어디 가서 빠지는 외모는 아니었다.

워낙 키가 크고 운동으로 다져진 두툼한 몸 때문에 곰 같다고 느껴지는 것일 뿐, 얼굴 자체는 단정하고 말끔하게 생겼다. 비교 대상인 선우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튀어서 그렇지.

몸의 두께는 큰 차이도 없는 것 같은데 왜 날렵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누나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나 괜찮아요?"

도영이 반색을 했다. 목소리가 커지는 바람에 안 관장과 선우가 이쪽을 보았다.

민망해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안 관장이 무어라 말을 하자 선우가 고개를 다시 안 관장 쪽으로 돌렸다.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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