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결국 내비게이션에는 이 감독의 집인 고급 빌라의 주소가 입력되었다. 안내 시작 버튼까지 누르자 선우가 굳혔던 어깨를 아래로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밤중에 여자 혼자 남자 사는 집에 찾아가라니, 그 팀장은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걱정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 * *
역시나 이 감독은 집에 없었다. 문 앞을 서성이다가, 옆집에 사는 사람에게서 집을 비운지 오래라는 정보를 얻었을 뿐이다.
그럼 그렇지.
처음부터 짐작한 일이었는데도 힘이 빠졌다. 터덜터덜 건물 밖으로 나왔다가 눈부신 헤드라이트 불빛 때문에 얼굴을 찡그렸다. 선우의 차에서 나온 불빛이었다.
"아직 안 가셨어요?"
미간을 찌푸린 선우가 차 보닛에 기대어 서 있었다. 펴지도 않은 우산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우산을 펼칠 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좋은 양복 다 젖게 왜 저러고 있는지. 옷이 아깝다고 생각하며 혀를 찼다. 더 흠뻑 젖은 자신의 옷은 생각도 않고.
"여기서 뭐하고 계시는 건데요?"
"몰라서 물어요? 지연희 씨 기다렸죠."
팔짱을 푼 선우가 못마땅한 표정의 연희를 끌어당겼다.
"타요."
계속 기다릴 셈이었다고? 혹시 이 감독을 만나 대화라도 하게 되었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 줄 알고.
"아까 보니까, 못 만날 거 알고 가는 표정이더라고."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선우가 설명해 주었다. 아직도 표정을 읽힌다는 사실이 기분 나빴다. 연희는 선우를, 선우가 감춘 것들을 읽을 수가 없는데. 선우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만 볼 수 있는데.
"회사로 다시 들어간다고요?"
"네. 다음 방안을 생각해야죠."
도로 위 정지 신호가 꽤 길었다. 밤에 보는 붉은 신호등은 피곤에 젖은 직장인의 눈을 떠올리게 했다. 여전히 내리는 비는 신호등 아래로 하얀 빗금을 만들어냈다.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면서 선우가 입을 열었다.
"그 회사, 생각보다 일을 비효율적으로 하네요. 지연희 씨는 효율적인 거 좋아하지 않았나?"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 수 있나? 저 좋은 일만 할 수 있는 거였으면 예전에 선우 곁에 그렇게 오래 붙어 있지도 않았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돌아다니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됩니까? 내가 좀 도와줘요?"
진심인지 농인지 모르겠지만 선우가 도울 이유도 없었고 연희가 도움 받을 이유도 없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을다운 자세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선우는 남의 예의 어린 발언을 예의 있는 방식으로 돌려주지 않았다.
"일 참 어렵게 하시네."
연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선우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한 비서."
- 네.
"우리가 이번에 투자 들어가기로 했던 작품, 그거 연출할 사람이 이정효라고 했죠?"
- 네.
"그쪽 제작사에 연락해서, 수형문화재단 특강 펑크내면 작품 지원도 같이 펑크날 거라고 경고 좀 해줘요. 연락할 때 내 직함은…."
- 네. 어떤 직함으로 말씀드릴까요?
"현진홀딩스 상무이사여야겠죠."
현진홀딩스는 현진 그룹의 지주회사가 되는 곳이었다. J호텔의 이름값도 대단하겠지만 현진홀딩스라는 기업명은 파급력이 훨씬 더 컸다.
현진홀딩스는 작년에 해외 OTT 서비스 사업체를 인수해 새로운 플랫폼 서비스로 키우는 중이었는데, 그쪽에서 제작하는 드라마 시리즈 중 하나에 이 감독이 투입되기로 한 듯했다.
"일회성 특강 약속 하나 못 지킬 만큼 무책임한 사람하고는 일 못 하겠다고 해줘요."
그토록 어렵던 일이 선우의 손 안에서 쉽게도 해결되었다. 그럼에도 순수하게 고마워할 수만은 없는 것은.
"이렇게 편한 방법이 있는데. 도와달라는 한 마디 하기가 그렇게 어려워요?"
도와준 사람이 선우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곳에 선 사람인 걸 아는데도, 선우의 말에는 쉽게 수긍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다 닳다시피 한 가시가 선우에게만은 유독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쉬이 다듬어지지 않는 마음만은 선우와 함께 했던 옛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전 아무 도움이나 안 받습니다. 잘못 주워 먹었다가 체한 적이 있어서요."
냉랭하게 날 선 말투에 선우가 한 방 맞은 얼굴을 했다. 가라앉은 눈 밑이 잘게 떨렸다
"오래 아프진 않았어야 할 텐데요."
웃는 입술 끝이 일그러졌다. 떫고도 쓴웃음이었다. 왜 선우가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불쌍한 척은. 누가 보면 선우가 차인 쪽인 줄 알 것이다.
치사했다.
"추워요?"
선선해진 밤공기에 가늘게 몸을 떨자 선우가 조용히 히터를 켰다.
따뜻한 차 안에 피로한 몸으로 앉아 있자니 주책없이 졸음이 밀려왔다. 하루 종일 뛰어다닌 탓이다. 선우의 등장과 함께 격한 감정들이 튀어나온 하루기도 했다. 이제 그런 감정들은 몽땅 말라버린 줄 알았는데.
지친 얼굴을 쓸어내리자 선우가 힐끔 기색을 살폈다.
"피곤해요?"
"괜찮습니다."
선우가 잠깐 달싹이던 입을 다물었다. 대신 대시보드의 수납함을 열어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녹색 포장지에 쌓인 사탕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손 좀 줘 봐요."
무심결에 손을 내밀었다. 선우가 건넨 사탕 한 개가 연희의 손바닥 한가운데에 살포시 자리 잡았다.
"피곤할 때 단 거 먹으면 좀 낫더라고요."
손바닥 안에서 반짝거리는 포장지 질감이 간지러웠다. 연희의 손이 살짝 오므라드는 순간을 선우가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사탕 껍질을 까보자 민트향이 화하게 올라왔다. 껍질 안에 든 알맹이는 불투명하게 하얬다.
"…나중에 먹을게요."
껍질을 도로 감싼 뒤 사탕을 주머니에 넣었다. 진짜로 나중에 먹을 생각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맛이었으니까. 집에 가는 대로 버려야겠다. 차라리 처음부터 안 받았어야 했는데.
연희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는 사탕을 보면서 선우의 눈이 가늘게 휜 건 연희의 알 바가 아니었다.
뒤늦게야 선우는 연희가 민트 맛을 싫어하는 걸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연희는, 선우가 건넨 것은 무엇이든 맛있게 먹었으니까.
이젠 아닌데.
* * *
"J호텔 김선우 부사장님 약혼식 관련해서 연락드립니다."
선우의 이름을 팔아먹는 건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수형문화재단 이수정 실장의 이름을 댈 때는 여러 번 설명이 필요했지만 J호텔 김선우 부사장의 이름은 그렇지 않았다.
명품 시계를 비롯한 귀금속, 한정판 가방 등 나오는 기부물품이 호화스러웠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만 참여하는 바자회라 그런지 그간 봐왔던 자선바자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남달랐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가보로 간직할 만한 물건들이 기부되는 것을 보노라면 다른 차원의 세상을 엿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했다.
수정 역시 본인의 애장품을 기부함은 물론, 재단 차원에서도 몇 가지 물품을 준비할 예정이었다. 수형아트갤러리에 묵혀놓은 적당한 가격대의 그림 몇 점이 그것이었다.
선우도 자신의 애장품 외에 호텔 최고급 스위트룸의 장기 숙박권이나 보증금만 2억, 연회비가 1,200만 원에 달하는 피트니스센터 이용권을 함께 내놓을 계획이라고 했다.
바자회인 만큼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내놓게 된다고 했지만, 70%를 할인한다고 해도 연희에게는 엄두도 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구나. 그중에 선우가 있구나.
나와는 처음부터 너무도 달랐구나.
한 번씩 깨달을 때마다 이상하게 위가 조여들었다.
참석자 신상과 마찬가지로, 내놓는 물품이나 판매가 또한 위화감 조성을 이유로 극비에 부쳐질 예정이었다. 단지 서 팀장은 서류상 이 프로젝트의 책임 담당자였기 때문에 (그래서 연희가 '비공식적으로' 일을 '보조' 하게 된 것이었다.) 일이 돌아가는 상황은 수시로 보고받았다.
선우가 회의에 직접 참석한다는 사실만 제외하고.
"아무리 그래도, 내가 회의에 참석을 한 번도 안 하면 좀 이상해 보이겠지?"
공식적으로 서 팀장이 모든 업무를 관할한 척하려면 회의에 얼굴을 한 번도 안 비추긴 어려울 것이다. 이번 회의에는 본인이 직접 참석해 보겠다는 말에 서둘러 호텔 측에 연락을 해두었다.
시간을 쪼개어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되는 게 어디인가? 의견 하나 낼 때마다 꼬치꼬치 캐묻는 선우 앞에서 긴장할 필요도 없고.
다만 일에 있어서는 인정사정없는 선우를 회의실에서 은근슬쩍 노려볼 수 없는 것이, 이따금 주의가 흐트러질 때마다 다이어리 귀퉁이에 선우 욕을 끼적일 수 없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 * *
"J호텔? 거기에서 매주 회의를 한다고?"
회의가 사라진 일정을 틈타 오랜만에 만난 세나가 소리쳤다. 식당 중앙에서 초밥을 말던 요리사들이 식당 끝에 위치한 이쪽 테이블을 쳐다볼 정도로 큰 소리였다.
"진정해. 거길 돌아다닌다고 해도 선우 형 얼굴을 마주칠 일이 설마 있겠어?"
세나를 말린 사람은 함께 있던 준호였다.
"마주칠 일이 없어도 기분은 안 좋을 거 아냐. 호텔 들어갈 때마다 김선우 생각날 텐데."
아주 오랜만에 '김선우'라는 이름이 화제에 올랐다. 그동안 모두 연희 앞에서는 선우의 이야기를 피했었다. 연희가 선우와 있었던 일을 자세히 알린 것도 아닌데 그랬다. 아마도 선우와 그렇게 헤어진 후 몇 개월 동안이나 연희의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목소리 좀 낮춰. 여기 J호텔 근처야.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준호가 주변을 살피며 세나를 타박했다.
"그러게 너는 왜 하필 여기서 만나자고 해갖고는!"
이번에는 세나가 준호를 혼냈다. 그러고는 연희의 두 팔을 꽉 붙들고 말했다.
"하여튼 너는 김선우랑 더 엮이면 안 돼. 너 그때 시체처럼 돌아다니던 거 아직도 기억나. 그 꼴 또 보기는 싫다고."
"걱정 마. 곧 약혼할 사람이야."
"약혼한대?"
"응. 그러니까 네가 생각하는 식으로 엮일 일은 절대 없어."
선우의 약혼식과 관련된 업무를 진행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정기적으로 선우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전하자 세나가 또 한 번 흥분했다.
"미친 거 아냐? 너한테 그 일을 맡기고 싶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