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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팀장은 자신이 연희에게 대단한 특혜라도 준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실상은 연희야말로 그간 다른 이들의 일까지 떠맡는 통에 포화상태였던 참이었다. 본래 업무를 맡아 했어야 할 사람들이 항의까지 한다니 기가 막혔다.
다 떠나서, 지금이라도 이 일을 누군가 거둬가고 본래 자신이 하던 일을 도로 받아올 수 있다면 마음이 훨씬 편할 것 같다.
- 당장 이 감독 집에 찾아가서 빌어! 이틀 밤을 새우더라도 강의 장소까지 끌고 와.
일부러 피해 다니는 사람을 무작정 집에 가서 매달린다고 데려올 수 있을까요? 아니, 집에 있기는 할까요?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최 주임님이 처리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지금 맡고 있는 단기 프로젝트는 이거 하나로 알고 있는데요."
돌려 말하면서도 속이 쓰렸다. 그냥 '나도 바빠 죽겠으니까 최 주임 시켜!'라고 직언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 기억 안 나? 최 주임은 좀 이따 나랑 부산으로 출장가야 해. 내일부터 3일 동안은 나랑 제주도에서 하는 협회 세미나 참석하고.
서 팀장과 최 주임이 짝짜꿍이 맞아 참석한다는 걸 보면 가서 놀고먹는 성격의 세미나일 게 분명했다. 설사 유익한 교육이 있더라도 저들끼리 빠져나가 놀고먹을 것이고. 회 먹고 술 처마시고, 유람선 탈 생각에 신났겠네.
"그럼 특강 당일에 최 주임님이 현장에 안 계신 거예요?"
- 어차피 촬영업체 측에서 알아서 다 해줄 걸, 뭐. 전반적인 행사 진행은 예림 씨가 맡기로 했으니까 연희 씨가 옆에서 좀 봐줘.
왜 그 말이 안 나오나 했다.
"…네."
- 참, 말 나온 김에, 고(古) 김 화백 전시회 말이야. 한 대리가 그러는데 그 아드님이 담당자 바뀌었다고 영 불편해한다네. 연희 씨가 연락 좀 해봐.
이래서야 일을 넘겼다고 할 만한 게 있을까?
아무래도 이번 주는 단 하루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입사 때 고지 받은 업무범위는 경계가 모호해진지 오래였다. 일하던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이 업무 저 업무가 합쳐지더니 이제는 무엇을 본 업무라고 해야 할지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표정이 안 좋네요?"
언제부터 옆에 서 있었는지 선우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통화 내용이 대충 들린 모양이었다. 곧 주차요원이 차 키를 들고 선우에게 달려왔다. 차 키를 받아든 선우가 연희를 향해 물었다.
"태워줄까요?"
"아니요."
대충 목례를 하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냅다 뛰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진다 싶더니 금세 옷이 젖어들었다. 뒤에서 보면 꼴이 꽤나 우습겠다 싶었다. 종아리에는 흙탕물이 잔뜩 튀었고, 아릿한 발목 때문에 걸음도 부자연스러웠다. 행사 날도 아닌데 평소 신는 단화 대신 하이힐을 선택한 탓이었다.
내가 미쳤지, 누구한테 보이겠다고.
최소한의 자존심은 세우고 싶어 가진 구두 중 가장 비싼 걸 꺼내 신었다.
지난번 넥타이핀 하나까지 명품이었던 선우의 옷차림과 인터넷 쇼핑몰에서 산 자신의 옷차림이 얼마나 대조되었던가. 연희가 입은 원피스와 구두, 아무렇게나 메고 다니는 숄더백을 합쳐도 그날 먹은 도시락 값보다 쌌을 것이다.
우습게도,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벌써 틀려먹은 거 같지만.
마침내 도착한 버스정류장 대기석에 앉았다. 우선 가방을 열어 밴드부터 꺼냈다. 발뒤꿈치에 붙이고 발목을 살살 돌렸다. 지하상가에서 당장 슬리퍼라도 하나 사서 신어야겠다 싶었다.
빵빵.
바로 앞에서 차 경적 소리가 울렸다. 놀라서 시선을 드니, 버스 대신 검은 외제차가 서 있었다. 차 문이 스르르 열리고, 안에 든 사람이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부사장님?"
"얼른 타요. 버스기사 아저씨 화나기 전에."
안 그래도 뒤에 버스가 오고 있었다.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연희와 선우를 보며 숙덕거렸다. 정확히는 안 들려도 욕인 건 분명했다.
한숨을 쉰 연희가 차에 올랐다.
* * *
"잘 됐네요. 마침 나도 강남 갈 일이 있었거든요."
목적지를 들은 선우가 핸들을 돌리며 무심히 말했다. 연희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긴장한 몸을 바로 세웠다.
"내비에 정확한 주소 찍어요. 내려주고 나서 내 갈 길 갈 테니까."
"아닙니다.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내려주세요."
예상대로 도로 위 사정은 최악이었다. 차가 달리는 시간보다 서 있는 시간이 더 긴 것 같았다. 마음 편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선우와 있는 시간을 늘릴 이유가 없었다.
"그냥 적당히 아는 사람 차 얻어 타는 건데 왜 그렇게 불편해합니까?"
오랜만에 듣는 '적당히'라는 말이 귀에 콱 박혔다.
"이 매니저는 편히 대하는 거 같던데 나한테만 예민하게 구니까 섭섭하네요."
"제가 그랬나요?"
선우 말대로라면,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 사람을 옆에 태우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 더 이상했다.
지금이라도 차에서 내려줬으면. 연희가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창문 옆을 톡톡 두들겼다. 손가락은 차창 밖에 떨어진 빗방울의 궤적을 따라 점점 아래로 향했다.
"자꾸 그렇게 행동하면 내 쪽에서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무슨 생각이요?"
"아직 나한테 다른 사심이 있다거나…."
하!
연희가 코웃음을 쳤다. 사심이 있다면 있다. 짜증이 났다. 아주 많이.
자신을 물 먹인 상대에게 말 한마디조차 마음껏 해댈 수 없는 이 상황이 서글펐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길 수도 있었던 한때의 짝사랑을 진흙탕 속에 뭉개놓고 떠난 사람이 선우였다. 그래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고 있었다.
"그냥 상대를 지나치게 싫어해서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연희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선우를 보았다. 상대에 대한 경멸이 느껴지길 바라면서. 의도대로 되었는지, 선우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영 기분이 나쁜가 보네요. 날씨가 궂어서 그런가?"
"부사장님은 표정이 좋으시네요."
"네. 비 오는 날 좋아하거든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선우가 턱을 쓰다듬으며 눈매를 부드러이 했다.
"고백받았던 날이라."
설마 내 얘기하는 건가? 뻔뻔하게?
만족스러워만 보이는 얼굴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본인에게는 그 모든 일이 아련한 추억, 혹은 자랑스러운 훈장쯤으로 기억된단 말이지?
"저는 싫어해요."
"왜요?"
"차인 날이니까요."
"아!"
제가 한 짓이 그제야 기억이 났을까. 짧은 감탄사를 남긴 선우가 곤란한 얼굴로 운전대에 올려둔 손가락을 까딱였다.
"참고로 눈 오는 날도 싫어해요. 그날도 차였거든요."
차이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사이였지만,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말도 연희가 먼저 내뱉었지만.
심정적으로는 완벽하게 차인 셈이었다. 믿었던 사람에게 놀아났다는 것을 깨닫고 참으로 괴로워했었다. 지금은 희석된 감정이 고마울 정도로.
"음악이라도 들을까요?"
선우가 어색하게 라디오를 켰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음악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갑자기 수형아트갤러리 관장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도 작가와 염문설이 있다고 했던가? 안 관장에게는 뜬소문일 거라고 했지만, 지금의 선우를 보니 소문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다리를 걸치는 것도 가능할 만큼 충분히 뻔뻔해 보였다.
"혹시 요즘도 사방팔방 어장관리하고 다니세요?"
불쑥 튀어나온 말에 선우가 피식 웃었다. 핸들 위에 놓인 손이 다시 까딱였다. 불안하게 톡톡 대기만 했던 아까와는 달리 규칙적이고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지연희 씨는 그게 왜 궁금합니까?"
"행사에 차질이 있을까 봐요. 약혼 행사까지 겸해서 준비하는 건데, 파혼이라도 하시면 일한 보람이 없어지지 않겠어요?"
선우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리고 손의 까딱임도 멎었다. 전부터 연희가 '약혼'이라는 말을 꺼낼 때마다 묘하게 굳은 표정을 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짐작은 가는데, 일전의 일은 정말 오해입니다. 현아와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그날은 그 애가 장난질을 좀 친 거고…."
"네에. 그러시겠죠."
현아가 왜 그런 장난을 하겠는가? 무엇보다,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대신 현아의 눈치를 보던 선우를 기억한다.
"안 믿는 얼굴이네요."
믿을 수 있을 리가. 전남편이 딱 이런 식으로 변명했었는데.
오해라고. 그냥 친해서 허물없이 대한 것이 그리 보인 것 같다고.
심지어 증거로 찍어둔 사진을 보여주어도 사진이 잘못 찍힌 거라고, 각도의 장난이라고 우겼었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장면이 찍히기 전까지는 그랬다.
어쩌면 이리 똑같은지.
"어쨌든 어장관리니 뭐니, 그런 거 할 일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차이가 있다면 선우가 좀 더 덤덤해 보인다는 것뿐이었다. 절로 신뢰를 불러오는 얼굴과 목소리 때문인지 일견 진실을 토해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연인에게 성실한 약혼자라기에는, 선우의 얼굴 어디에도 약혼에 임하는 설렘이 보이지 않았다. 수정의 이름을 먼저 꺼낸 적 역시 없었다. '약혼식' 자체에 성실하게 임하는 것과는 별개였다.
단순한 선후배 사이로라도 남았다면, 여자 친구와의 연애 근황이나 이어질 결혼 계획을 물어볼 타이밍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연희와 선우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할 일이 없어 차창에 달라붙은 빗방울이 어그러지는 광경만 보고 있었다. 애써 자리를 잡은 빗방울이 새로운 빗방울에 자꾸만 씻겨 내려가는 모습을 보자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여기서 내려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침 끝 차선에 있을 때 정지 신호가 걸렸다. 연희가 문손잡이로 손을 뻗쳤다. 그때였다.
급히 튀어나온 선우의 손이 연희의 팔을 턱하니 붙들었다. 당황한 연희가 선우를 쳐다보았다. 선우 역시 자신의 행동에 놀랐는지 멈칫했다가 짐짓 불순한 의도는 없었다는 것처럼 무고한 얼굴을 했다.
짧은 순간 움츠러들었던 선우의 손이 다시 연희의 손끝을 조심스레 건드렸다. 흠칫한 연희가 서둘러 문손잡이에서 손을 떼어냈다.
탁.
미세하게 열렸던 차 문이 선우에 의해 다시 닫혔다.
"정확한 주소, 찍으세요."
선우가 내비게이션을 눈으로 가리켰다.
열없이 뜨거워진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연희가 엉겁결에 내비게이션 버튼을 눌렀다.
앞으로는 쓸데없이 손부터 대지 말라고 얘기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손가락 끝에 머물던 화끈거림이 팔을 타고 얼굴까지 올라왔다. 목덜미도, 귀 끝도 전기가 오른 듯 따가웠다.
너무 놀라서 그런 거다. 아니면 화가 난 탓이던지.
연희가 창으로 고개를 돌리자 쿵쿵대는 가슴을 무표정으로 가린 제 자신이 창문에 비쳤다. 선우가 연희의 시선을 좇았다. 창속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까만 배경에서 유일하게 반짝이는 것이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