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41)화 (42/98)

<41>

"좀 떫었겠는데요?"

선우가 연희 앞에 놓인 녹차 컵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조금 남은 녹차물이 아까보다 훨씬 더 진한 색으로 우려져 있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음료를 내주라고 할 걸 그랬어요."

"…배려 감사합니다."

상대의 다정한 말투에 비해 연희의 대답은 딱딱하기만 했다. 연희가 회의 테이블 위에 놓아둔 다이어리를 펼치고 볼펜을 들었다. 전달할 사항이 있다면 알려달라는 뜻으로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선우는 맞잡은 두 손을 회의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채 내도록 말이 없었다. 마주친 시선 위로 숨 막히는 침묵만이 자리했다.

"담당자분은 언제 오실까요?"

결국 연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할 텐데요."

"……."

"아! 일단 식사부터 할까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선우가 문 너머로"한 비서!"하고 외쳤다.

곧 회의실 문이 활짝 열렸다. 호텔 로비에서 이곳으로 안내해 준 남자가 커다란 도시락 상자 두 개를 가지고 들어왔다. 케이스에 호텔 로고가 박힌 한식 도시락이었다. 똑같은 모양의 도시락 상자가 선우와 연희 앞에 각각 놓였다.

"음료 좀 다시 가져다줄래요? 먼저 번에 경 사장님께서 선물해 주신 걸로 갖고 와주면 좋겠는데요."

도시락만 보고 있던 연희가 서둘러 말렸다.

"아니, 저는 괜찮습니다만."

"지연희 씨 말고, 내가 목이 마를 것 같아서 그래요."

한 비서가 나가자마자, 대각선에 앉은 선우가 긴 팔을 뻗어 연희의 도시락 뚜껑을 열어주었다. 피할 수도, 그렇다고 반갑게 대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선우의 배려는 부담스럽기만 했다.

게다가 이렇게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정말이지.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예상치 못한 재회에 떨떠름한 연희와 달리, 선우는 평온하기만 했다. 친절하고 여유로운 자세로 상대를 배려했다.

이제는, 이 모든 행동이 선우가 사람을 다루는 기술인 걸 안다.

"지연희 씨는 나한테 할 말 없어요?"

선우가 한 팔로 턱을 괴며 물었다. 당당하고도 나른한 표정이 호텔 로비에 꽂혀 있던 잡지 표지의 그것과 똑같았다. 위에서 타인을 내려다볼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얼굴일 것이다.

"업무 관련 질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보통 이렇게 오랜만에 봤을 때는 잘 지냈냐고 물어보지 않나?"

저 혼자 세월을 빗겨나간 얼굴을 보니 잘 지낸 거 같은데 굳이 물을 필요가 있을까.

달라진 게 있다면 우묵해진 눈매와 조금 더 강해진 턱 선 정도일 것이다. 그마저도 나이와 지위에 맞는 무게감을 준다는 점에서, 더 짙어진 남성미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오히려 플러스 요인이었다. 검푸른 수트로 감싼 몸은 예전보다 더욱 굵고 강인해 보였다.

다만 빙그레 웃는 표정은 여전히 싱그럽기만 했다. 속은 그렇지 않을 텐데도.

선우를 보는 연희의 속이 복잡하든 말든, 선우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으로 연희의 답변을 기다렸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안부 정도야 못 물어볼 것도 없겠지만….

묻기 싫었다. 연희는 그에 대해, 연희가 모르는 그의 지난날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다.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선우라는 인간은 이후 연희의 삶에 확실히 영향을 미쳤다. 다가오는 사람의 호의를 의심하게 하고, 우연한 행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게 하고.

그렇게 경계해놓고 만난 사람이 재민이라는 게 아이러니지만.

어쨌든 연희에게 선우는 유해한 인간이었다.

"회의는 언제 시작되는 걸까요?"

그래서 선우의 질문과는 다른 말을 꺼냈다.

"난 잘 못 지냈어요."

선우도 연희의 질문과는 다른 말을 꺼냈다.

"곧 잘 지내게 되시겠죠."

이번에는 제대로 대답했건만, 의문 섞인 시선이 날아들었다. 그래서 연희는 이유를 알려주었다.

"약혼 미리 축하드립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약혼자와 나누면 될 일이었다. 설령 선우에게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따로 필요하다 해도, 그것이 연희에게 주어질 역할은 아니었다.

이제 선우는 연희가 그어놓은 선 밖의 사람이었다. 선우의 입가가 살짝 내려앉았다가 금방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연희가 다이어리에 볼펜을 콕 찍었다. 이 자리에서 꼭 필요한 말만 해달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약혼이 한 달 반 정도 남은 셈이라 일정이 빠듯하던데요. 바자회 기부물품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우선 확실하게 기부를 약속한 사람들의 명단은 한 비서가 넘겨줄 거예요. 참석자 명단 중에 더 기부할 사람들이 있는지는 연희 씨가 파악해 주세요. 연락할 때는 아무래도 연희 씨가 일하는 재단보다는 내 이름을 파는 게 더 나을 겁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판매 형식은 경매가 될 겁니다. 참고하시고요."

"네."

이어지는 말이 없어 볼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다시 수저를 들었다. 이후로는 수저 놀리는 소리만 간간이 이어졌다.

분명 맛있겠다고 감탄한 메뉴였는데 먹을수록 돌덩어리를 씹는 것 같았다. 가방 속에 소화제를 넣어 둔 게 다행이었다. 언젠가의 선우처럼, 이제 연희도 가방 안에 많은 것을 준비해 다녔다.

이후 한 비서가 J호텔에서 작성한 간략한 행사 초안을 가져다주었다. 선우와 연희가 똑같은 서류를 손에 쥐고 눈으로 훑었다. 선우는 이미 본 것일 텐데도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쩌면 다른 생각을 하는 채 눈만 거기에 둔 것 같기도 했다.

"무사히 끝낼 수 있겠죠?"

서류를 책상 위에 엎어두고서 선우가 물었다. 선우를 좋아했던 게 까마득한 옛일이건만, 이제 와 약혼식에서 난장이라도 칠까 싶은 걸까?

"실망하시는 일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선우가 예의 그 매끄러운 웃음을 흘렸다. 우습다는 건지, 믿는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저 미소를 어떻게든 해석하고 싶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아니꼽게만 보였다.

끝내 이 매니저는 나타나지 않았다. 선우는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니었던 것 같다며 약속시간을 다시 정해주었다. 일정이 넉넉지 않아 준비해야 할 일이 많다고 들었건만, 선우의 태도는 느긋하기만 했다.

* * *

3일 뒤에야 이현주 매니저와 명함을 나눌 수 있었다. 약속시간은 변함없이 7시였다. 이르게 도착했는데도 이 매니저가 미리 로비에 나와 연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연희 씨 맞죠?"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연희를 곧바로 알아채 악수를 청하기에 놀랐다. 이름의 주인공이 여자가 아니라는 데에도 놀랐고, 사복을 입고 있어서 또 놀랐다. 원래는 쉬는 날인데 순전히 회의 때문에 출근했다고 했다. 회의 날짜를 조정할 걸 그랬다고 하자, 선우의 일정에 맞춘 것이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부사장님과 대학 동기라면서요? 저도 부사장님과 동기입니다. 대학원 동기. 흐흐."

웃음도 많고 말도 많은 남자였다. 묻지도 않은 부사장과의 인연과 그의 과거 행적을 실컷 떠드는 통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영국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놀랐다니까요. 인생 다 포기한 사람처럼 굴어서."

하도 우울한 기색이라 집에서 쫓겨나온 줄 알았다는 둥, 뭐 하나에 몰두하면 그 하나밖에 몰라서 답답했다는 둥. 한 귀로 흘리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곧바로 순도 높은 찬양이 이어졌다.

"그래도 한 번 한다면 꼭 해내던 사람이 우리 부사장님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렇게 단기간에 객실 가동률도 확 오르고, 영업이익도 날로 증가하고…. 여하튼 제가 그분을 참 존경합니다."

이쪽에 말하면 전해지기라도 할 것처럼 구구절절한 칭찬 일색이었다.

"일할 때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을까요?"

이 매니저가 선우의 취임사까지 읊어대기 직전에 말을 끊었다. 시간을 아껴 조금이라도 일찍 호텔을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축의금은 받지 않을 거고요. 행사 수익은 모두 기부할 예정인 건 아시죠?"

"네. 수익 일부는 저희 재단 장학 사업에 기부하시겠다는 말씀도 전해 들었습니다."

"오시는 분들이 불편해하셔서 언론은 통제할 겁니다. 사진은 저희 쪽에서 찍어 보도 자료와 함께 뿌릴 예정이고요. 재단 쪽에서 별도의 보도 자료를 만드셔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사진은 저희 걸 써야 합니다. 외부에 사진이 유출되는 걸 꺼려 하는 분들도 계셔서요. 기부 물품도 공개했다간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는 것들이 있고요"

일 얘기로 들어서자 이 매니저의 자세도 달라졌다. 깐깐히 되짚는 사항을 듣고 있자니 확실히 재벌가 약혼이 남다르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같은 때에 약혼을 별도로 치른다는 것부터가 별나긴 하지만.

"부사장님이 회의에 종종 참석하실 예정입니다."

회의는 일주일에 한 번, 매주 금요일에 있을 거라고 했다. 채팅이나 이메일만으로도 충분히 의사교환이 가능할 것 같은데, 정기적으로 호텔에 와서 보고까지 하라는 건 시간 낭비 아닌가? 그러나 이 행사의 주도권은 명백히 호텔이 쥐고 있었다.

"다만, 회의록에서는 이름을 지워주시고 다른 데에서도 말씀을 삼가 주시겠습니까? 비공식적으로 참여하시는 거여서요."

"명심하겠습니다."

비밀도 많았다. 일에만 몰두한다고 알려진 사람이 본인의 사적인 일에 시간을 쓰는 게 낯부끄러워서일까? 아니면 예비 약혼녀 없이 혼자서 행사를 준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자존심이라도 상할 것 같은가?

이 시기에 함께 있어야 할 수정은 기나긴 해외 출장 중이었다. 이유도 모르고 언제 돌아올지도 알 수 없지만 회사 돈으로 가긴 했으므로 명목상 '출장'이라 하겠다.

"오늘 부사장님은 아무래도 회의 참석이 어려우실 건가 보네요. 이만 정리하죠."

휴대폰을 확인한 이 매니저가 몇 가지 당부사항을 추가로 전한 뒤 회의를 접었다.

"연희 씨는 차 갖고 오셨어요?"

"아니요."

워낙 차가 막히는 곳이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왔던 길 그대로, 버스로 두 정거장을 간 뒤 지하철을 탈 예정이었다.

"근처시면 제가 태워다 드릴까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저도 대충 정리하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 * *

호텔 출입구에 다다랐을 때는 가는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비를 맞고 뛰어가야 할지 멎기를 기다려 볼지 망설이는 사이 휴대폰 벨이 울렸다. 서 팀장의 사무실 내선번호가 휴대폰 화면에 떠 있었다.

- 연희 씨, 어떻게 된 거야?

다짜고짜 터진 고성이 귀를 찔렀다. 연희는 귀에서 휴대폰을 조금 떼어냈다. 그래도 그 쩌렁쩌렁한 소리가 멀리까지 다 새어 나왔다.

"네?"

- 다음 주 화요일에 생방송 특강하기로 했던 이 감독 말이야, 갑자기 잠수 탄 거 아직도 해결 다 안 났다며? 왜 처리 안 했어?

수정의 약혼식 업무(대외적으로는 자선바자회 업무)를 추가로 줄 때 기존의 잡다한 업무는 다른 사람에게 넘기라고 한 사람이 서 팀장 아니었던가. 그날 자신이 한 말은 아예 잊은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이 감독이 약속을 잘 지킬지 불안해 최 주임에게 미리 주의를 주었다. 예술가라는 미명 하에 '약속'이란 개념을 밥 말아 먹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나마 작품이 유명해지기 전에는 비위를 구슬리기가 좀 나았는데, 얼마 전 자신이 연출한 OTT 시리즈가 소위 '대박'을 치면서는 상태가 더욱 심각해졌다.

권 이사의 사촌 동생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서 팀장이 그를 적극 추천하지 않았다면 굳이 섭외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담당자는 최 주임님이신데요. 저는 추가 연락까지만 도왔고요. 혹시나 해서 대신 섭외할 만한 분들 명단도 보내드렸습니다만."

- 시작한 사람이 어떻게든 마무리를 해 놓고 갔어야지. 연희 씨는 책임감이 없어?

사흘 만에? 어떻게?

"저도 본래 업무와 신규 업무를 동시에 처리하려면 시간이 부족하기도 하고요."

- 신규 업무 핑계가 왜 나와?

자신의 일을 대신 시킨 게 지레 찔렸는지, 서 팀장이 부쩍 목소리를 높였다.

- 직장에서 동시에 여러 가지 일 진행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나마 내가 사정 봐주느라 몇 개는 떼어내 준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도 갑자기 일 폭탄 맞았다고 항의하는 통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랬으면 맡은 일은 깔끔히 처리해놓고 갔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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