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40)화 (41/98)

<40>

"그분이 자선바자회 행사를 진행하고 싶은가 봐. 연희 씨가 할 일이 아닌 건 알지만, 지금 다들 워낙 바쁘니까."

"네."

"장소는 정해졌거든. J호텔 그랜드볼룸 홀. 그런데 이게 좀…. 사실 약혼식만 진행하려다 자선행사도 겸하기로 한 거거든."

아하. 그러니까 폼 나는 약혼식을 진행하기 위해 조직을 이용하겠다는 거네.

"남들 눈을 생각하면 간소하게 진행해야 하고, 실장님을 생각하면 화려하게 해야 한다는 뜻인데…."

아무것도 확정된 게 없다는 뜻이군.

"우리 회사에 행사 전문 팀은 없어서 좀 애매하잖아? 공연기획팀이 한다, 장학팀이 한다, 각자 우기는 걸 내가 가져왔지. 그래도 명색이 우리 팀이 회사 제1부서인데 이 중요한 행사를 어떻게 놓치겠어?"

그래서 문화콘텐츠 개발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업무를 잘도 갖고 왔다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팀장인 내가 일선에서 뛸 수는 없잖아?"

보나 마나 위에 잘 보이고 싶어서 온갖 공수표를 날렸을 것이다. 그리고 일이 떨어지자마자 누구에게 미룰지부터 계산했겠지.

"내가 큰 틀을 잡아주면 연희 씨가 현장에서 뛰는 걸로 하자. 담당자 연락처 줄 테니까 지금 하는 일 중에 본업 아닌 건 대충 마무리 짓고 넘겨. 그리고 늦어도 모레까지는 꼭 호텔에 연락하고."

서 팀장이 J호텔 담당자 명함을 넘겨주었을 때, 연희는 한숨을 삼켰다.

"J호텔이랑 협업할 거고 부사장 쪽 참석자 명단은 그쪽에서 제공해 줄 거래. 명단 추리는 것만도 힘들었을 테니까 참석 여부 확인은 우리가 알아서 해줘야겠지?"

실장님 체면을 생각해서, 호텔 측에서 시키지 않아도 먼저 나서서 적극적으로 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잘만 하면 연희의 재계약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냐며.

서 팀장이 재계약을 빌미 삼아 일을 미룬 적은 이전에도 많았다. 하지만 재단에서 계약직으로 입사한 직원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준 사례는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서 팀장에게 인사권을 쥐고 흔들 힘은 더더욱 없었고.

그런데도 거부할 수 없었다.

지저분한 이혼 절차와 재민의 중상모략으로 인해 망가진 업계 평판, 그로 인한 경력 공백, 그렇다고 막 대하기에는 부담 가는 경력과 적지 않은 나이로 인해 연희를 선택해 주는 직장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니 무엇이든 담담히 받아 들여야 했다. 그래야 버틸 수 있으니까.

연희는 머릿속으로 기존의 일정을 다시 정리했다. 당분간 행사를 무사히 끝내는 것에만 집중해야 할 것이다. 행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 * *

J호텔 서울 지점은 혼잡한 교통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세계적인 건축가에게 의뢰해 재작년 리모델링했다는 호텔은 세련된 외관을 뽐내고 있었다. 32층 높이의 건물 외벽을 장식한 황금색 타일들이 저물어가는 태양빛에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였다.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30분이 남아 있었다. 일찍 출발한 보람이 있었다. 이 교통대란에도 불구하고 늦지 않았으니. 내부로 들어서자 거대한 조각상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신들의 왕 제우스를 조각한 것이다. 이외에도 곳곳에 작은 조각품과 유화가 전시되어 우아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우연찮게도 얼마 전 경주에서 얘기를 들은 신예 화가 도영주의 작품이 여러 개 걸려 있었다.

초기작인지 지금보다 화풍이 조금 더 거칠었다. 강렬한 색감을 쓰는 건 똑같았지만 새나 꽃 등 경쾌한 필치로 자연물을 주로 그리는 요즘에 비해, 예전에는 무거운 분위기의 인물화를 많이 그린 듯했다. 거대한 풍광 속에 던져진 인물들은 멀리서 볼 때는 한적해 보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외로워 보였다.

호텔에 걸기에는 조금 어둡지 않나?

하긴 보는 사람에 따라 그림에서 받는 감상도 다를 것이다. 어쩌면 연희의 기분이 그림에 투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뒤죽박죽 심란하고,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전시된 작품들을 따라가다 보니 라운지 끝에 이르렀다. 벽 모서리에는 매거진 거치대가 놓여 있었다. 거치대에는 각종 일간 신문과 함께 최근에 발간된 여행/숙박 관련 잡지가 꽂혀 있었다.

특히 지난달 발간된 '더 호텔' 매거진이 별도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올해 새로 취임한 부사장의 인터뷰가 실려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아직 국내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인사이니만큼 대외적으로 홍보도 할 겸, 대내적으로 자리 굳히기도 나설 겸 응한 인터뷰일 것이다.

표지로 쓰인 전신사진 속 모습은 웬만한 연예인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온통 검은 배경 속에서 인물의 화려함이 외려 돋보였다. 내용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연희는 손목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여유가 있었다. 1층 동선은 대충 파악했고, 2층에 올라가 행사 홀의 위치와 방향을 확인할 차례였다. 행사 홀 내부까지 미리 둘러볼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러려면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야겠지.

"여보세요? 이현주 매니저님 부탁드립니다."

"외근 중이신데요. 메모 전해 드릴까요?"

곧 회의인데 외근이라고?

"수형문화재단 지연희라고 하는데요."

"아. 회의 때문에 그러시죠? 열심히 오시는 중인데, 조금 늦을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그런 얘기는 진작해주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을의 위치에 있다 보면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 일쑤였다.

"아…. 네."

"지금 사무실로 돌아오시는 중일 텐데. 휴대폰 번호 알려드릴까요?"

휴대폰 번호야 이미 알고 있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까지 담당자와의 의사소통은 이메일로만 이루어졌다. 연희가 먼저 이메일을 보내면 자정이 되어서야 답변 메일이 오는 식이었다. 그나마도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시간, 장소만 겨우 꿰어 들은 행사만큼이나 담당자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다.

혹시 텃세 부리는 건가?

"지연희 씨 되십니까?"

때마침 누군가 연희에게 말을 걸었다. 고압적인 인상을 가진 장신의 남자였다. 흉터가 남은 날카로운 눈매를 봐도, 딱딱한 인상과 남다른 체격을 봐도 호텔보다는 어디 격투기장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었다.

"이현주 매니저님이신가요?"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선 회의실로 안내해드리라는 부탁을 받아서요. 매니저님이 오실 때까지, 다른 분이 행사내용을 대신 알려주실 겁니다."

남자는 시종일관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 다행히 호텔 측에서 재단 사람을 무시하거나, 기선을 제압한답시고 심술을 부린 건 아닌 모양이다.

사무실 옆에 딸린 회의실에서 땀을 식혔다. 올여름도 더울 모양인지 아직 6월 중순에 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낮 더위가 심상치 않았다.

남자가 내민 종이컵에는 시원한 녹차가 담겨 있었다. 티백을 내놓을 곳을 찾지 못해 종이컵에 담긴 그대로 마셨더니 지나치게 우러난 차가 조금 떫은맛을 냈다.

흰색 바탕에 노란색으로 포인트를 준 내벽을 관찰하면서 가방을 뒤적거렸다. 다이어리를 꺼내 오늘 논의해야 할 준비사항을 점검하던 중이었다.

"일찍 왔네요."

크지 않아도 묵직하게 울리는 저음이 연희의 귀에 쿵, 하고 떨어졌다.

아주 오랜만인데도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어느 날은 조금 떨리고, 어느 날은 단호했던 목소리. 어느 날은 그리웠고, 어느 날은 화가 났던 목소리. 언젠가 TV에서 듣고는, 실제를 다 반영하지 못해 아쉽다고 생각했던 목소리.

직접 다시 듣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이어리를 들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툭, 다이어리가 회의 테이블 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반가워요."

은은한 우디 향과 함께, 커다란 그림자가 연희 위를 덮쳤다. 남을 압도하는 체격과 반듯한 자세를 가진 남자는, 지금껏 본 어떤 그림보다도 고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드리우는 긴 속눈썹의 그림자도, 우아한 선을 그리며 날카롭게 떨어지는 콧대도, 단단하면서도 매끄럽게 떨어지는 턱의 형태도, 그 자체로 한 점의 작품 같았다. 굵은 손목에 두른 명품 시계도, 단단한 몸을 감싼 광택 어린 옷감도 사람에 가려 빛을 잃었다.

그리고 그런 그는 아주 익숙하고도 낯선, 친절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잠시간 인사마저 잊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고만 있자 선우가 먼저 양복 안주머니에서 명함 케이스를 꺼냈다. 커다란 손이 가죽 명함 케이스를 벌려 명함을 꺼내놓았다. 테두리에 금박이 박힌 두꺼운 종이에는 '부사장'이라는 직함 옆에 '김선우'라는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왜 심장이 제 박동을 찾지 못하는 걸까. 선우가 근무하는 곳인 걸 몰랐던 것도 아닌데, 진행해야 할 행사가 선우의 약혼식이나 다름없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닌데.

방심했던 탓이다. 선우와 직접 얼굴을 맞대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행사 당일에나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보게 될 줄 알았다.

선우가 연희의 맞은편 의자를 빼 앉았다. 시선은 연희에게서 떼어내지 않은 채였다.

"수형문화재단 지연희입니다."

사회인의 매너를 겨우 떠올린 연희가 뒤늦게 꾸벅, 인사를 했다. 뒤이어 재킷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다시 가방을 뒤적였다. 가져온 명함 지갑이 어디 있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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