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39)화 (40/98)

<39>

회의가 끝나고 나서는 경주 갤러리 내부를 한 바퀴 돌았다. 휴관일이라 그런지 유독 조용했다. 내일부터 새롭게 시작될 도영주 작가의 회화 전시장을 미리 둘러보았다.

도 작가는 하루가 다르게 그림 값이 오르고 있는 신예 화가였다. 과감한 구도 선정과 강렬한 색감이 인상적이라지만, 여러 매체에 노출된 작가 개인의 인기에 편승한 감도 없지 않았다.

"연희 씨! 왔어?"

반대편에서 그림을 둘러보던 안 관장이 아는 척을 해 왔다. 서울 갤러리와 경주 갤러리를 모두 관리하고 있는 안 관장은 이사장의 처제이기도 했다.

"잘 지내셨죠?"

"다 늙어서 잘 지내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어? 그보다,"

안 관장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가십을 입에 올리고 싶을 때 종종 하는 행동이었다.

"올 때 혹시 봤어?"

"누구요?"

"도영주 작가 말이야. 눈에 확 뜨이는 미인이던데."

"아무도 못 봤는데요."

"목에 빨간 스카프 한 여자, 못 봤어?"

연희가 고개를 저었다. 안 관장이 연희를 구석으로 끌고 가더니 손바닥으로 벽을 만들며 속삭였다. 아무도 없는 전시실에서 굳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반은 재미, 반은 비밀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이가 J호텔 부사장하고 꽤 가깝다는 말이 있어서 어떤 사람인가 했거든. 영국에서 종종 데이트하는 걸 봤다는 목격담도 있었고. 그런데 간도 크게 우리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고 싶다기에 이게 뭔가 했지."

무심히 듣고 넘기려다가 J호텔이라는 말을 되짚었다.

"J호텔 부사장님이요?"

"김선우 부사장 말이야. 내 조카 수정이랑 결혼 얘기 오가는."

입을 다물고 있자 안 관장이 몇 가지 설명을 덧붙였다.

"작년까지 해외 지사만 돌던 사람이라 일반인은 잘 모르려나? 올해 초에 한국 들어오자마자 J호텔 부사장으로 취임했는데."

"…어쨌든 도 작가 얘기는 뜬소문이겠죠.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니까. 혹시나 했는데 괜히 걱정했나 봐. 조금 전에 수정이한테 전화가 왔지 뭐야? 도 작가 전시회는 특별히 신경 좀 더 써달라고. 자기 약혼자랑 뭔가 있는 사이면 수정이가 그럴 리 있겠어?"

모르죠. 김선우 씨가 잘 구슬려 떠넘긴 걸지도. 그 사람 속은 알 수가 없거든요.

연희는 떠오른 말들을 애써 목 안으로 삼켰다.

* * *

아버지 제사를 핑계로 반차를 쓴 덕에 밝은 대낮에 거리를 걸어볼 수 있었다. 살갗에 닿는 햇볕이 뜨거웠다.

6월 초,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연둣빛 잎사귀들이 오늘은 반갑지 않았다. 그 눈부신 아름다움이 오히려 연희의 눈을 따갑게 했다. 모든 게 조화로운 세상에 연희 자신만 따로 노는 것 같았다. 땅에 붙들어 줄 뿌리 한 점 없는 생령 같은 존재가 자신이 아닐까?

그렇게 거리를 떠돌다가 막상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에 발을 들인 때는 새까만 밤이었다. 전에 살던 집으로 오랜만에 들어선 감상은 반갑지도, 그렇다고 서글프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몸에 자리한 악성종양을 발견했을 즈음은 아버지의 공장이 한창 어려워진 시기이기도 했다. 항암치료도 거부하고 사업을 다시 일으키려 노력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기 직전, 아버지는 작은아버지의 명의로 집을 돌려두었다. 덕분에 다른 재산은 모두 흔적 없이 날아갔어도 집만은 지킬 수 있었던 거라고, 작은아버지는 말했다.

하지만 그게 집을 지킨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버지가 직접 꾸린 가족 중 누구도 이 집에 머물지 않으니까.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고, 연희도 이 집을 떠난 지 오래였다.

"연희 왔니?"

현관문을 열어 준 작은어머니가 어색한 얼굴을 했다. 웃으려고 한 것 같았으나, 당혹스러운 표정에 가까웠다. 연중 연희가 집에 들르는 날은 총 세 번이었다. 설과 추석, 아버지의 제삿날. 그때마다 작은어머니는 늘 불편한 얼굴을 했다.

"일하고 와서 피곤할 텐데, 자고 가지 그러니?"

그렇다고 연희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연희 몫이 되었어야 할 집을 거저 차지하게 된 형국이니 미안해서 그러는 것이리라.

"빈방도 없잖아요. 괜찮아요."

본채에 있는 여러 개의 방 중, 연희가 묵을 만한 방은 없었다.

사과와 배, 약과와 떡, 조기와 고기 산적, 다섯 가지 나물과 전 등이 목기 위에 담긴 채 작은아버지의 숙고 아래 정해진 위치에 놓였다. 올 때마다 보아도 제자리를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연희는 중앙에 놓인 아버지의 사진을 보았다. 아버지는 사진 속에서 몇 년째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살아있을 때는 직접 보지 못 한 표정이기에 남의 제사상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끝내 어머니를 다시 만나지 못한 그 마음은 어떠했을까?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아버지에게 오히려 안식을 주지 않을까?

가끔씩 사랑도 별것 아니라던 선우의 말이 떠오를 때가 있다. 이제는 연희도 그 말에 공감한다. 그렇게 여기고 나니 편해졌다. 가끔 공허할 뿐이다.

"기어이 이혼을 해보니 어떠냐? 만만치 않지?"

꽤 오래 끌 것만 같던 이혼 수속은 작년에야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협의이혼은 없을 것처럼 굴던 전남편 재민은 제 부모가 압박을 가하자 곧바로 이혼 도장을 찍어주었다. 재민의 외도 장면을 찍은 사진을 시부모의 집으로 부친 덕이었다. 집안 망신을 더 시켰다가는 재산이고 뭐고 없다는 말이 무섭긴 했던가 보다.

"요즘 애들은 참을성이 없어 놔서."

작은아버지가 혀를 끌끌 찼다. 작은아버지는 결혼 전 인사를 왔을 때부터 재민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었다. 아니면 연희가 집을 떠난다는 사실 자체가 후련했던 것일 수도 있고.

1년도 채 안 되는 결혼 생활이 그렇게 지긋지긋할 줄 알았으면, 결혼하지 말고 조금 더 버텨볼 걸 그랬다.

언제부터 효녀였다고. 아버지 죽기 전에 자식 혼사는 봬드려야지 않겠냐는 작은아버지의 말이 그때는 자꾸만 양심을 찔렀다.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일로였던 시기.

작은아버지의 주선으로 일주일이 멀다 하고 선을 보았다. 그냥 가라니까 가서 앉아있었고, 만나라기에 몇 번 만나보았다.

남은 시간에는 그래도 자식이니까 응당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아픈 아버지 곁에 머물렀다. 지난 몇 십 년보다 아버지와 단둘이 보낸 시간이 많았지만 이미 서먹해진 사이가 새삼 애틋해질 리 없었다.

별다른 대화도, 교감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성급했던 결혼의 목적은 효도보다 탈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합법적으로 '딸로서의 의무'를 덜어낼 수 있는 기회.

주말 습관처럼 변해 버린 맞선 자리마저 질릴 때쯤, 마침 같은 회사에 다니던 재민이 적극적으로 구애를 해 왔다. 딱히 조건이 나쁘지 않았고 결혼해야 할 시기 같아서 결혼했다. 세상엔 그런 결혼도 많다니까.

당시에는 재민이 연희에게 워낙 잘 맞추기도 했고, 누가 되었든 적당히 적응하면 함께 살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심사숙고했어야 할 결정을, 그 어떤 결정보다 생각 없이 했던 것 같다.

결혼하자 재민은 본색을 드러냈다. 연희에게 한없이 맞추어 주기만 했던 연극을 끝낸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더 제멋대로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적응해 보려 했다. 어차피 회사에 있으면 일에 치여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나마 재민의 부서와 업무상 큰 접점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그래도 신의를 저버린 사람과는 살 수 없었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과는 더더욱.

결혼 5개월 만에 외도가 들통나자 재민은 적반하장의 태도를 취했다. 남의 휴대폰을 함부로 들여다보았다며 화부터 냈다. 그때부터 3개월 동안 얼굴만 보면 싸워댔다. 그러다 마지막에 재민이 손을 들어 올렸을 때, 더는 참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단 한 번이었지만 불신과 공포를 안겨주기에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재민의 얼굴을 수놓던 광기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깟 뺨 두 대에 이혼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작은아버지는 연희가 성급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몇 주 동안 재민이 간절히 용서를 구하는 척 하기도 했다. 작은아버지에게 달려가 연희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덤이었다.

"그렇게 반성한다는데, 인정머리도 없지."

작은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으면 연희도 헷갈릴 때가 있었다. 좀 더 참았어야 했나? 어디 한 군데 부러지기 전까지는 괜찮은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재민이 쓸데없는 버티기를 그만두고서야 잘못된 인연을 완전히 접을 수 있었다.

다만 이제는 재민이 '좋은 친구' 관계로 다시 시작하자면서 되지도 않는 수작을 부리고 있을 뿐이다. 사실은 언제든 내키는 대로 성질부릴 상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 일도 없던 척, 자기는 쿨한 전남편인 척 연락해오는 재민도 진절머리가 나지만, 조카 앞에서 남의 편을 드는 작은아버지와도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다.

"우리 때는 바람 안 피우는 남자 없었고, 손 한 번 안 올리는 남자 없었어."

작은아버지가 팔꿈치로 작은어머니 옆구리를 톡 찌르자 작은어머니도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아버지의 눈치를 본 후"우리 땐 다 그렇게 참고 살았지…."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남편은 없는 게 나았다.

* * *

"연희 씨, 마침 있었네?"

사무실에 들어오던 서 팀장이 연희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손가락을 까딱여 연희를 자기 자리로 불렀다.

"지금 맡고 있는 특강 프로젝트 마무리되어 가지? 김 화백 전시회도 슬슬 중요한 건 다 끝났을 거고."

일이 끝나지 않았어도 얼른 마무리하란 이야기였다. 주위를 살핀 서 팀장이 연희에게 좀 더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시키는 대로 바짝 붙어 섰더니 점심에 서 팀장이 무엇을 먹었는지 짐작할 만한 돼지기름 냄새와 마늘향이 났다.

"우리 이사장 따님 말이야. 이수정 대외협력실장님."

과장 좀 보태서 딸 뻘인 여자에게 지나치게 공손한 태도였다. 감히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조심스럽다는 어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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