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37)화 (38/98)

<37>

Hidden 2

남들에게는 짧기만 하다는 군 휴가가 선우에게는 너무 길었다.

집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아 대학 도서관을 찾았다. 책에 파묻혀 있는 것이 가족과 함께 있는 것보다 백 배 나았다. 정 회장이 언급했던 미술 전문 서적을 찾았다. 흥미가 있는 분야는 아니었지만, 정 회장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공부해 둘 필요가 있었다.

답답해.

두꺼운 책에 박힌 빽빽한 글씨를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외울 수는 있으나 이해하기는 어려운 문장들이 눈앞을 가로질렀다. 대단하다는 예술작품 사진을 보아도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낯익은 얼굴의 여자를 보았다.

어?

가족과 함께 정기적으로 들르는 중식당에서 본 얼굴이었다. 여자는 식기카트 대신 북카트를 밀며 걸어가고 있었다. 북카트에 있던 책을 정확한 위치에 꽂아 넣으면서.

"우리 연희,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네?"

그녀 뒤에 서서 친절함을 가장한, 그러나 한없이 위선적인 목소리를 낸 남자는 원준이었다. 학과에서 꽤 높은 서열을 차지한다는 후배. 웃는 얼굴이 자신을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기억한다.

이렇게 보니 썩 정이 가는 인상은 아니었다.

여자도 비슷한 생각이었던지, 원준을 노려보며 바쁘게 움직이던 손길을 멈추었다. 선우가 그 하얀 손끝을 주시하는 동안, 원준은 그녀 곁에 한 걸음 가까워져 있었다.

"요즘 과방에 통 안 오더라. 보나랑 불편해서 그래?"

조금 전 마주친 누군가가 열심히 떠들던 삼각관계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주인공들이었군.

"그럼 편하겠어요?"

"이제 화해할 때도 됐잖아. 내가 자리 한번 마련해 줄까?"

자신은 아무 책임 없다는 양 구는 원준이 얄미운 것과는 별개로, 여자의 언짢은 기색이 신경 쓰였다. 안면이 있어서일까? 혹은 작은 호의를 빚져서?

"됐어요."

"나도 껄끄러워서 그래. 지금이라도 나랑 같이 보나 만나러 갈까? 내가 잘 말해줄게. 다 오해라고. 그날은 그냥 우연히 마주친 거라고."

이쯤에서 '고맙다' 또는 '내가 오해한 것 같으니 미안하다'라고 말하라는 거겠지. 그렇게 굽히고 나온다면, 여자가 학과 내에서 발붙일 수 있게 해 주겠다는 회유도 숨어 있을 거고.

"선배가 변명해 줄 시기는 진작 지났죠."

똑 부러지는 차분한 음성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도 아니었잖아요. 선배가 나 불러낸 거지."

여자는 원준에게 부탁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직도 그렇게 얘기하고 다녀?"

"사실이니까요."

"네가 그렇게 버틸수록 보나는 더 화낼 텐데?"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순 없잖아요."

원준이 굳은 입매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그래서, 그 말을 믿는 사람이 있어?"

"…모르겠네요."

믿든 안 믿든 대부분은 침묵했을 것이다. 중립이라는 핑계 아래 누군가 몰아세워지는 꼴을 관전이나 했겠지.

"저런."

여유를 찾은 원준이 인자하게 웃었다. 가증스러운데, 자신과 닮은 점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너도 내 탓하는 거 이제 그만둬. 어차피 이제 들어줄 사람도 없을 거고."

"선배도 나 쫓아다니면서 사람 떠보는 거 그만두지 그래요?"

여자가 자리를 옮기자 원준도 따라갔다. 발소리를 죽인 선우도 뒤를 좇았다.

원준이 어쩌거나 여자는 제 할 일을 했다. 그녀가 조금 높은 위치에 책을 꽂아 넣기 위해 발끝을 든 순간, 원준이 책을 앗아가 꽂으려던 위치에 넣어주었다. 여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예요?"

"도와주는 거잖아. 넌 고맙다고 안 하겠지만."

"진심으로 안 고마우니까 가줄래요?"

"넌 나를 참 싫어하더라.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런 거 같아."

"자의식 과잉이에요. 처음에 전 선배가 누군지도 몰랐거든요?"

그래. 나도 걔 알아보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어.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원준이 몸으로 여자를 막아서는 게 보였다.

"참, 또 하나 전달할 거 있다. 선배들이 졸업 전에 교수님 선물 드린다고 돈 모으던데. 우리도 좀 보탤 생각이거든?"

"또 돈을 걷는다고요?"

여자의 황당한 얼굴에는 아랑곳없이, 원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동의한 거예요?"

"따로 동의가 필요한가? 단체 채팅방에서 얘기했는데 아무도 이의 제기 안하던데?"

"반대를 안 한 게 아니고 못한 거겠죠. 이미 결론짓다시피 한 일을 한 사람이 뒤엎기는 힘드니까요. 솔직히 거기서 이견 냈다가는 이기적이라고 조리돌림 당하기 좋은 분위기잖아요."

단체생활을 중요시하는 학과에 걸맞게, 학과에서는 걷는 돈이 많았다. 각종 행사 준비와 학과 잠바나 기념품 제작비, 잦은 엠티나 뒤풀이 비용 등이었다. 축제 때 낸 돈도 돌려받지 못했다. 원준의 말에 따르면 들인 금액에 비해 수익이 많지도 않았을뿐더러, 그 금액은 불우이웃 돕기에 쓴다고 했다. 학생회에서 매년 내놓는 핑계였다.

불우이웃을 돕는다는 게 보람된 일인 건 안다. 그렇다고 강요할 일은 아닐 텐데, 이 학과는 강요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반대했다가는 여자의 말대로 '인정머리 없다', '학과 일에 협력하는 자세가 부족하다'는 식의 비난을 받으리라.

여자가 북카트에서 손을 떼고 팔짱을 꼈다. 어차피 안 떨어질 상대라면 할 말이라도 하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축제 수익 말이에요. 불우이웃을 돕는다는 건 좋은데, 수익을 어떻게 쓸지는 먼저 학과 사람들 의견부터 골고루 들어보고 정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와. 너 정말 매정하다."

"돈이 아깝다는 게 아니라요. 이렇게 통보만 받는 상황이 이상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 네 돈 돌려받고 싶다는 뜻 아니야?"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제 맘대로 해석하는 놈이었다.

"정 그러면 네 돈은 돌려줄 수도 있어."

"어떻게요?"

"나랑 데이트 한 번만 해주면 내가 내줄게."

느끼한 농담이 우스웠다. 하지만 영악한 말이기도 했다.

농담 반, 진담 반 꺼낸 말은 어떻게 반응해도 원준에게 방패가 되어줄 말이었다. YES면 진담이 되고, NO면 농담이 되겠지. 비슷한 대화가 수십 차례 있었던 건지 여자는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다.

저기서 정색하면 꼴만 우스워지는 거다. 웃자고 꺼낸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예민한 사람이 되는 거다. 잠시 침묵하던 여자가 한쪽 눈썹을 치켜뜨고 잇새를 문 채 대답했다.

"꺼져."

퍽, 정강이를 차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여자가 가차 없이 뒤돌아섰다. 다리를 부둥켜안은 원준이 멍하니 여자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마음에 드네.

그런데 저런 식으로 학과 생활하면 여기서는 못 버틸 것 같은데. 조만간 자퇴하는 거 아니야?

가끔 그날 본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선우는 피식 웃었다. 학교에서 다시 마주칠 수 있다면 참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면서.

* * *

선우는 무척 기분이 나빴다. 연희가 자꾸만 얼토당토않은 일로 곤경에 빠졌다. 하나를 쳐내면 하나가 나오고, 또 하나를 쳐내니 다른 하나가 나온다.

보나라는 후배는 참으로 대단했다. 이상한 소문을 내고, 공공연히 조롱하고. 사람을 쥐어짜내는 열정이 얼마나 엄청난지 질려버릴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학과 사무실에도 비슷한 수준의 악의를 드러낸 녀석이 있었지. 원주영이라고 했던가?

아. 최경미도 있다.

보나 옆에 서 있던 주눅 든 얼굴, 내키지 않는 척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시녀 노릇에 나서던 어설픈 몸짓의 주인공.

사실 연희를 잘 모를 때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일들이었다. 세상에는 언제나 가십과 모함이 넘쳐나니까. 하지만 연희와 가까워질수록, 엉뚱한 사람 대신 연희가 더러운 소문을 뒤집어쓰고 다닌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보나는 애꿎은 연희만 붙들고 갖은 누명을 씌웠다. 연희가 축제 수익을 훔쳤다고 단정하며 모욕했을 때는, 너무 화가 나면 웃음이 난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했다.

미리 혜진에게 연희를 부탁해 둔 건 잘한 일이었다. 혜진이 증인을 찾아 사람들 앞에서 연희의 알리바이를 확인시켜 줄 계획이라고 했다. 잠시 고민했다. 집을 나갈 수 있으려나? 떨고 있다면 손잡아 주고 싶은데.

하필 그 주기였다. 어머니의 진짜 아들이 죽은 날. 최소한 일주일은 집에 머물며 어머니의 히스테리를 받아내야 하는 날이었다.

어떻게 하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혜진이 알려준 강의실 앞이었다.

강의실 문을 열자 불편한 자세로 서 있는 연희부터 눈에 들어왔다. 축제 때 발목을 움켜쥐던 작은 손이 생각났다. 저 혼자 몇 사람 몫을 하느라 무리한 탓이었지. 보나 마나 며칠 동안 방치한 결과일 것이다. 저런 애한테 뭐 하나라도 뒤집어씌우겠다고 눈을 밝혀? 게으름이나 피우다가 멍청하게 잃어버린 책임은 생각도 안 해?

연희의 부상까지 증거로 싹싹 해먹었다. 그런 거 없었어도 어떻게든 무죄를 만들어내고 말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연희가 제게 고백했다는 거짓말을 한 것은 반은 심술이 맞았다. 하지만 반은?

어쩌면 연희가 제게 그런 고백을 하기를, 기다려주기를 진짜 꿈꾼 건 아니었을까?

그럭저럭 잘 해결되었다. 연희가 제게 고마워했고, 마음의 벽을 조금이나마 더 허물었다. 집은 더욱 살얼음판이 되었지만 참을 만했다.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이래서야 연희의 남은 1년이 너무 힘들지 않을까? 졸업하면 더 이상 곁에서 도울 수도 없을 텐데.

문제가 터지고 나서야 방어하는 건 너무 느린 방법이다. 어떻게 해야….

그렇다. 시간이 부족하면 지름길을 만들면 된다.

뒷조사는 양부모의 전공 분야였다. 그걸 보고 자란 선우도 못할 건 없었다. 한때는 혐오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자신이 그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실장님. 부탁드릴게 있는데요."

집안의 권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건 처음이었다. 정 회장 일가에 머무는 게 고맙고 편리하다는 생각을 한 것도 처음이었다.

연희에게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다.

학교에 두 학기나 더 머물 생각은 아직 하지 않을 때의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