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희야, 일어나."
눈을 뜨니, 선우가 일어서서 연희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아까보다 조금 밝아진 표정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선우 특유의 세련된 PPT 안이 깔끔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미안해요. 선배 깨워주기로 해놓고 나까지 잠들어버렸네요."
"너도 많이 피곤한 거 같은데?"
선우가 연희의 안색을 살폈다. 이마부터 턱 끝까지 찬찬히 내리는 시선에 잠이 확 깨버리고 말았다. 아니, 반대로 꿈속에 잠긴 걸지도. 그러니 선우의 삶에 무심코 또 참견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둘 사이의 금기를 깨고.
"선배."
"왜?"
"굳이 공모전 실적까지 더 챙겨야 해요?
"무슨 소리야?"
"이미 다른 수상 실적도 꽤 쌓아놨잖아요. 학점도 좋고 연수도 다녀왔고, 할 건 다 했는데 꼭…."
"……."
"꼭 이렇게 무리해야 해요?"
선우가 연희에게 굽혔던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선우의 시선이 연희 옆의 빈 의자에 머물렀다.
"연희야."
"네."
"너, 나 잘 알아?"
"…아니요."
한때는 잘 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모르겠다. 언젠가 같잖은 충고를 했다가 선우와 실랑이했던 때가 떠올랐다. 지금보다 차라리 그때가 더 선우의 진심에 쉽게 닿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한계에 다다라서야 무의식중에 보여주는 민낯을, 그때는 더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무슨 생각 해?"
선우가 다시 제 얼굴을 연희 쪽으로 훅 당겨왔다. 멈췄어야 할 거리에서 그치지 않고 자꾸만 붙어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림자에 눈을 감고 싶어질 무렵, 선우가 멈춰 섰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한참을 그렇게 멈춰 있던 선우가 말했다.
"…어쨌든 고마워."
선우가 기지개를 켜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 장난이었구나.
왠지 모르게 긴장했었나 보다. 연희가 큰 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잘 잤다."
선우가 뒷걸음질로 다시 멀어졌다. 고개를 들자 언제 해가 떴는지 어느새 주변이 환해져 있었다.
* * *
"이런 걸 영혼이 탈출한 상태라고 하는 거니?"
잠을 제대로 못 잤다면서도 싱긋 웃는 연희의 이마를 세나가 한번 짚었다.
"열은 없는데, 왜 이렇게 너갱이가 나간거니?"
"너무 졸려서 그런가 봐."
사실은 선우의 과제가 무사히 끝난 게 다행스러워서였다.
"정신 차려. 곧 발표 시작이야."
선우가 강의실 앞 교탁에 노트북을 내려놓았다. 직접 PPT를 조작하며 발표를 할 생각인 듯했다.
"엥? 저 선배는 또 왜 너갱이가 나갔어?"
세나가 가리킨 선우의 발표 PPT 두 번째 장에는, 조원 이름으로 김선우와 지연희가 쓰여 있었다.
"조원 이름을 잘 못 적었네?"
교수가 지적했다.
"죄송합니다. 실수했나 봅니다."
선우는 그 자리에서 나윤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연희의 이름 바로 아래에. 끝내 연희의 이름은 지우지 않았다. 얼굴이 붉어진 나윤이 기가 막히다는 듯 입을 벌렸다.
"쟤, 결국 까였구나?"
연희의 귀에 세나가 속삭였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발표하는 선우가 줄곧 자신만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어서였다.
* * *
선우에게는 마지막이 될 종강 파티였다. 온다면 말이지만.
주량을 넘겨 마신 연희가 호프집 건물과 옆 건물 사이 그늘진 곳에 앉아 있었다. 세 발자국만 걸어 나가도 네온사인의 화려한 불빛을 볼 수 있을 텐데. 어둠 속에 두 무릎을 모으고 고개를 파묻은 꼴이 처량 맞았다. 사실 이렇게 혼자 숨어 있으려던 계획은 아니었는데.
결국 또 선우 때문이었다.
술에 취한 나윤이 연희를 찾아왔다. 선우가 안 받아줄 걸 예상했으면서 부러 저를 놀림감으로 만들었다며 원망하고 울고. 연희는 그거 달래느라 종강 파티를 제대로 즐겨보지도 못했다.
왜 다들 나한테 이러는 거야?
저번 학기 종강 파티에서 울어대던 가영을 달래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패턴이었다. 정작 문제의 원인인 선우는 매번 자리에 나타날지 안 나타날지 모르는 상태였고.
오늘 선우는 온다 간다 하는 말조차 없었다. 아마 못 올 거라고 짐작했다. 들어간 부서가 요즘 한창 바쁠 때라고 들었으니까. 취업계는 진즉 냈고 기말고사도 리포트로 대체했다고 들었다.
"지연희, 여기서 뭐해?"
그래서 지금 들리는 이 목소리에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연희가 고개를 들었다. 허리를 굽혀 시야를 맞춘 선우가 툭, 연희를 쳤다. 선우의 얼굴을 확인하자 반가운 웃음이 먼저 나왔다. 그러다 이내 눈가를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억울한 얼굴이 쉽게도 완성되었다. 선우가 픽 웃고는 연희 옆에 꼭 닮은 자세로 무릎을 모으고 털썩 앉았다.
"일찍 좀 오지! 선배 대신 나윤이 달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연희가 목 놓아 소리쳤다. 정작 상대는 타격 하나 받지 않은 얼굴로 연희만 빤히 바라보았을 뿐이지만.
"그러니까 왜 날 나윤이한테 팔아먹어."
"선배도 그때 그냥 웃어넘겼잖아요. 난 혹시나 호감이 생기려나 했지."
"이런 의미인 줄 몰랐지."
"어떻게 몰라요? 나윤이가 그렇게 확실하게 힌트를 주는데. 눈만 마주쳐도 알겠더라."
"눈을 안 마주쳐서 몰랐나 보네."
"말도 안 돼. 이상한 핑계 대지 마요."
연희가 알기로 선우는 다른 이의 시선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들이 다 연희를 피할 때도 올곧게 시선을 마주해준 사람이 아니던가?
"애당초 선배가 여지를 안 줬으면."
"나는 다른 사람들한테 하는 대로 똑같이 대했는데? 걔가 잘 못 알아먹은 거지.
"그러니까. 모두에게 공평한 그 방식이 문제라고요."
"내 행동에 문제가 있단 거야?"
선우의 말투가 날카로웠다. 왜 이런 실랑이를 하게 되었지? 마지막 종강 파티에서 싸우고 싶지는 않은데, 이게 다 술 탓이었다. 행동과 말이 도통 자제되지 않았다.
쿵쿵 뛰는 심장이 기대하지 않은 등장이 반가워서인지, 선우 때문에 맡게 된 뒤처리가 화나서인지도 알 수 없었다.
"네. 선배의 모든 행동이 문제에요!"
눈을 꾹 감은 연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그러니까 왜 친절하게 굴어서. 왜 야살스럽게 웃어대서.
내가 뭘 어쨌다고. 선배가 꼬여낸 사람을 나보고 어떻게 막으라고.
왜 사람 마음을 모른 체해서 나한테 화풀이하게 만들어요? 갖고 노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야?
대학생활 편하게 만들어준다던 말이 이런 거였어요? 선배 연막으로 쓰려고 나 휴학 못하게 한 거죠? 속았어. 완전 속았어.
불만 가득한 연희의 속마음이 다 들렸다. 정말로 '들렸다'. 본인은 속으로만 생각하는 줄 알겠지만, 옆 사람이 다 들릴 정도로 크게 중얼거리는 까닭이었다. 뾰로통한 입술 끝이 부풀어 올랐다.
"모르는 거거든?"
"네?"
"진짜 모르겠어."
"뭐라는 거야…."
점점 연희의 말소리가 작아지고 발음이 뭉개졌다. 균형을 잘 잡지 못하는 몸이 옆으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선우가 두 손으로 무너지려는 연희를 받치더니 연희의 얼굴을 제 어깨에 얹었다.
"그래. 너는 이렇게 잘 알겠는데."
"네?"
"네 마음은 이렇게 잘 보이는데. 걔 마음은 안 보였다고."
"……."
연희의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나한테는 안 보인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그 호감이라는 것이, 선우에게는 와 닿지 않았다. 다만 연희의 눈에 자신에 대한 걱정과 관심이 아직 남아있다는 건 알겠다. 그리고 그것의 밑바탕에 애정이 깔려 있다는 것도.
술에 취했다고 해도, 연희가 이 정도까지 풀어질 수 있는 상대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음을 안다. 선우는 자신이 그 대상에 포함된다는 게 좋았다. 비겁하지만 조금 더 그래주었으면 좋겠다.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봐주었으면.
"그러니까."
연희의 몸에서 뿜어내는 알싸한 술 냄새가 선우의 호흡에 섞여 들어갔다. 그 향이 선우를 취하게 했다.
"아무하고나 나 엮지 마라."
갑자기 선우의 어깨에 기댄 연희의 몸이 무거워졌다. 애써 눌러두었던 술기운이 퍼지면서 온 힘이 빠져나갔나 보다. 눈을 감은 연희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연희의 얼굴을 선우가 단단한 팔로 감쌌다. 어깨 위에 얹은 사람의 무게가 기꺼웠다.
조금 더 이렇게 있고 싶다고 생각할 때.
얌전히 잠이 드나 했던 연희가 갑자기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렸다. 비장한 표정을 짓고는 막상"선배~."하고 부르는 소리가 모깃소리만큼 작다. 선우가 연희 쪽으로 고개를 좀 더 기울였다.
"왜?"
"그래도 내가 착하니까 큰맘 먹고 하는 얘긴데요."
"응."
"나 졸업하고 나면 독립할 건데요…."
"그런데?"
"혹시 선배 가족이 집에서 많이 괴롭히면…."
"……."
"선배도 같이 들어와 살래요? 집세는 안 받을게요."
빠른 속도로 고개를 돌린 선우가 연희를 보았다. 반쯤 의식이 나간 연희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었다.
"괜히 그 집 가족 때문에 힘들어하지 말구…. 정 부담되면 밥이나 한 끼 사든지요. 네에?"
말끝까지 늘이는 걸 보니 확실하다. 완전히 맛이 갔다.
그래, 제정신인데 이런 이야기를 할 리가 없지. 다음날이면 기억도 못 할 거다.
그래도 입꼬리가 위로 솟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연희는 영문도 모르고"헤…."하고 따라 웃더니 제 무릎 사이로 얼굴을 가져갔다. 고양이처럼 무릎에 제 얼굴을 부비는 꼴이 몹시도 사랑스러웠다.
조금만 더 비겁해도 된다면.
선우가 연희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 올렸다. 선우의 숨소리가 연희에게 점점 가까워졌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연희의 이마 근처에 따뜻한 입김이 먼저 닿았다. 연희의 멍한 눈에는 너무 가까워 전체 형태를 짐작할 수 없는 목울대가 보였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연희의 이마에 부드럽고 뜨거운 것이 부딪혔다.
아무것도 모르는 연희가 헤실 웃고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풀린 그녀의 눈이 멀어진 선우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본다. 흔들거리는 무릎을 따라 연희의 얼굴도 흔들렸다. 그러다 순식간에 연희가 고개를 다시 들었다.
촉.
연희의 입술이 선우의 입술에 닿은 것도 순식간이었다. 도중에 힘이 빠진 탓인지, 속도에 비해 강도는 약했다. 말랑말랑한 촉감이 더없이 상냥하기만 했다. 따뜻하고 달큼한 공기가 선우에게로 넘어와 입 안을 간지럽혔다.
선우의 눈이 커다래졌다.
"야, 너 뭐…."
선우의 말은 상대에게 닿지 못하고 바람결에 흩어져 버렸다. 천천히 깜빡이던 연희의 눈이 마침내 아예 감겨버린 후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