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Hidden 1
선우와 연희가 함께 보낸 마지막 학기의 일이다.
3월 초부터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을 타고 선우에게 접근하는 후배가 속출했다. 선우의 책상 위에 음료나 쿠키를 놓아두는 방식으로 관심을 표하는 이도 있었고, 선우가 혼자 있을 때를 노려 편지를 전하는 이도 있었다. 그중 나윤은 좀 맹랑한 편이었다.
"저기, 언니."
"응?"
"선우 오빠랑 사귀세요?"
강의실에 같은 학과 사람들도 많건만 목소리를 줄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저번 학기에도 비슷한 후배가 하나 있지 않았나?
"아니."
"저기 그럼 이번에 언니랑 선우 오빠랑 같이 하시는 조별 과제요. 저도 껴도 돼요?"
이래서 저학년이 많이 듣는 대규모 교양수업은 안 들으려고 했는데. 선우와 붙어 다니다 보면 종종 아무것도 모르는 후배들이 연희를 통해 선우에게 접근하려고 하는 일이 생겼다.
지난 학기 이후로, 선우의 부탁에 따라 연희가 선우의 곁을 졸졸 쫓아다니는 흉내를 내보기도 하고 유치한 경고를 날려보기도 했으나 새 학기가 되니 다시 원점이었다. 선우는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지켜달라는데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다들 나한테 이러지 말라고.
굳이 CC를 피하는 이유가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뭐라고 대답했더라? 학교 밖에서 만나야 헤어지고 나서도 깔끔히 끝이 난다던가?
실제로 선우는 학내 고백이라면 단칼에 -다만 부드러운 말투로- 쳐내 왔다. 그래도 안 되면 연희를 호출해 뒷감당을 맡겼고.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한데, 아직 자신은 다르리라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오늘은 말릴 기운도 없다.
혹시 알겠는가? 이 아이가 첫 예외가 될지.
"그냥 내가 빠질게."
"언니 괜찮겠어요?"
표정에서 '언니는 친구 별로 없지 않아요?' 하는 속마음이 읽혔다.
"이번에는 다른 친구들이랑 한 번 해보려고."
"아! 친한 분이 따로 있었어요?"
"세나한테 물어보지, 뭐."
"다행이네요."
나윤이 후련한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말했다.
"잘해 봐."
선우와 어울려 다니면서 방패막이 되어주는 것도 지치던 차였다. 연희는 세나가 앉은 뒤쪽 자리로 옮겨가 사정을 말했다.
"쟤가 선우 선배랑 한 조 하고 싶대."
"날 선택해 줘서 좋긴 한데, 잘 알지도 못하는 애 도와주려고 네가 빠지게 된 거는 좀 그렇다?"
예상대로 세나는 쿨하게 연희를 받아주었다. 연희가 세나, 그리고 주위의 몇 명과 역할을 분담하고 있을 때였다.
"연희야. 좀 실망이다."
연희에게 다가온 선우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새까맣게 어린 후배한테 날 팔아넘겨?"
"귀엽잖아요. 적극적인 게."
"적극적이기로 치면 한때 너도…."
"그만 놀려요."
선우가 장난 식으로 그날의 일을 입에 올릴 때마다, 연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선배는 그런 솔직하고 당당한 사람이 맞는 거 같아서요."
"뭐야. 네 얘기야?"
"아니요."
연희는 이제 솔직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솔직하지 않을 예정이었고.
뒤에서 나윤이 '오빠 얼른 와요!'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부르는데 얼른 가요."
"잠깐만."
선우가 노란 고무줄을 내밀었다.
"너 어차피 이따가 빌려달라고 할 거 같아서 미리 가져왔어."
연희는 긴 머리를 종종 풀어헤치고 왔다가 뒤늦게 고무줄을 찾곤 했다. 그때마다 화수분처럼 노란 고무줄을 내미는 사람이 선우였다.
"제대로 된 끈 좀 사라. 그러다가 너 머리 다 잡아먹힌다."
매번 듣는 잔소리를 흘려내며 머리를 질끈 동여맸다. 가는 목 위로 선우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나윤이 또 선우를 불렀다. 선우가 가벼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연희를 향해 씩 웃어주는 건 잊지 않았다.
"나 간다."
비밀로 해야 할 것이다. 선우의 친근한 웃음이, 가끔 연희를 잠 못 들게 한다는 사실은.
"선우 오빠랑 자주 보니까 좋아?"
"응!"
연희가 들어선 강의실 문가 근처에서 나윤과 그 친구가 벽을 보고 선 채 대화하고 있었다. 제 딴에는 몰래 하는 대화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목소리가 너무 컸다.
"이따 도서관에도 같이 가기로 했어. 어떻게 자료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선우 오빠가 도와준대."
"선우 오빠가 먼저 도와주겠다고 그래?"
"아니. 내가 졸랐지."
선우 선배 지금 바쁠 텐데…. 선우가 참여하는 지역 브랜드 마케팅 공모전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았을 터였다.
"야. 이런 과제 처음 해보는 척하지 마! 다른 강의에서도 비슷한 과제 해봤으면서."
"뭐 어때? 선우 오빠랑 한 조 되면 항상 오빠가 알아서 다 했다던데? 나 시간도 별로 없단 말이야."
"핑계가 좋다."
"진짜야. 아르바이트 늘렸거든."
"왜?"
"데이트 비용도 벌어야 하고, 오빠 옆에 섰을 때 어울리는 옷도 좀 사고, 오빠 선물도 사고 하려면 용돈 모자라. 선우 오빠 전 여자친구들이 장난 아니라더라고."
그거 아니야. 그런 거 안 해도 돼….
"누가 보면 벌써 사귀는 줄 알겠네."
"오빠 수준에 맞추려면 열심히 벌어야지."
약은 아이는 아닌 것 같은데 선우가 원하는 것과 거리가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다고 직접 자신에게 의논한 것도 아니니 주제넘게 나서기도 그랬다. 그냥 못 들은 걸로 할밖에. 세나 옆자리를 찾아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선우가 강의실에 들어서는 게 보였다. 선우가 연희의 자리를 한 번 확인하고는 나윤의 옆에 앉았다. 나윤의 얼굴이 환해졌다.
세나와 함께 도서관 열람실에서 막 나가려던 참이었다. 문으로 들어서던 선우를 만났다.
"웬일로 이 시간까지 학교에 있어요? 공모전 준비는 집에서 하고 있다지 않았어요?"
연희에게서 선우의 바쁜 일정을 들은 세나가 물었다. 연희가 알기로는 선우가 준비하는 공모전 중 하나가 모레 마감이었다.
"내일 오후 수업 발표 때 쓸 사례 조사를 아직 다 못해서."
"주제가 '미학의 사회화'였죠? 나윤이는 어디 있어요?"
"한 30분 얼굴만 비추고 갔어."
"왜요?"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서 급한 일이 생겼대."
말끝에 씁쓸함이 맴돌았다. 선우의 얼굴이 몹시 피곤해 보였다.
"PPT랑 발표는 선배가 할 게 뻔하고. 자료조사는 다 되어 있어요?"
"인터넷으로 찾은 사례를 몇 개 보내왔는데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것 같아."
남은 일 전부 다 선우 차지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분석하고 발전방안 제시하는 건요?"
"그것도 아직 의견 못 맞춰봤어."
"사례 간추리는 것보다 분석하고 방안 제시하는 게 더 어렵지 않아요? 저희는 그랬는데…."
세나가 양 눈썹으로 여덟 팔 자를 그리며 말했다. 저번 주에 먼저 발표를 끝낸 세나와 연희는 무임승차 없이 네 사람이 작업했는데도 적지 않은 시간을 들였다.
"선배, 처음부터 과제 양에 비해 조원이 너무 적었어요."
"나윤이가 둘이 하길 강력하게 원해서."
선우가 기운 없이 웃었다. 처음엔 자신이 다 알아서 할 거라고 장담했단다.
"와우. 속이 참 투명한 아이네?"
세나가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선우는 감정을 드러낼 기운도 없어 보였다.
"미리 나윤이 일정 확인 못 한 내가 잘못이지, 뭐."
말하는 선우의 눈에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연신 눈을 비비니 붉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배 어제 잠은 좀 잤어요?"
"아예 밤새우진 않았어."
그래봐야 쪽잠이나 잤겠지. 얼굴이 거칠었다. 연희가 선우의 가방을 빼앗으며 말했다.
"도와줄게요."
"연희야? 집에 안 가? 너야말로 어제 밤새워서 오늘 피곤하다고…."
이어지려는 세나의 말을 연희가 서둘러 막았다.
"괜찮아. 먼저 가."
세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마뜩잖은 얼굴로 선우를 힐끗 보았다.
"하여튼, 맨날 손해만 본다니까."
고개를 가로저은 세나가 문밖으로 사라졌다. 연희는 세나의 말을 선우가 신경 쓸까 싶어 선우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선우는 졸음이 담긴 눈으로 멍하니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연희는 선우를 끌고 도서관 2층의 세미나실로 향했다. 연희가 어깨를 누르는 대로 자리에 앉은 선우가 두 손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노트북 화면을 함께 봐야 하기에 연희가 그 옆에 앉았다.
보통 때 같으면 혼자서 충분하다고 연희의 등을 떠밀었을 선우였다. 연희와 적당한 거리를 벌릴 기운도, '예의'라는 가면을 덮어쓸 여유도 없다면 선우가 무척 지쳤다는 뜻이다.
다행히 연희의 조 발표 때 폭넓게 조사해둔 것 중 선우의 주제로 가져다 쓰기에 유용한 것들이 있었다. 적당한 사례를 추리고, 생각보다 빨리 끝난 김에 PPT 기본 안까지 만들어주었다.
타닥타닥.
키보드 치는 소리가 세미나실을 울렸다.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지났다.
단둘이 있는 세미나실은 지나치게 밝고 조용했다. 늦은 시간임을 의식해서인지, 한 번씩 고개를 돌릴 때마다 바로 옆에 선우가 있다는 게 어색했다. 집중할 거리가 있어 차라리 다행이었다.
"받아요. 저도 선배 도움 받은 적 있잖아요."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손바닥을 꾹 잡아 USB를 넘겨주었다.
"고마워."
"눈 좀 붙여요. 쓰러질 거 같아요."
"괜찮아."
숨소리마저 거친 사람이 괜찮다고 말하니까 이상했다. 그 와중에도 미소가 걸려 있어 더욱 기묘했다. 오랜만에 보는 힘없는 미소였다. 차라리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굴 것이지.
"제발 좀 자라고요. 지금은 좀 쉬어도 돼요."
무너지기 직전의 그를 못 본 척해 주는 게 도리인가 싶으면서도, 믿음을 주고 싶어서 선우의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그러자 선우가 힘겹게 손을 들어 미간을 긁었다. 얼굴 사이에 진 주름이 한 손에 가려졌다.
"더 할 수 있어."
"네?"
"할 수 있다고. 공모전도, 과탑도."
선우가 세수라도 하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한 발짝 떼기도 전에 힘이 빠진 선우의 손에서 USB가 떨어졌다. 손의 감각도 무디어졌는지 아랑곳없이 마저 걸어가려 했다.
연희가 선우의 팔을 잡고 끌어내렸다. 선우는 연희가 이끄는 대로 주저앉았다. 눈에는 초점이 풀려 있었다. 잠이 모자라니 술에 취한 모양새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USB를 주워 선우의 셔츠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할 수 있어. 다…해내야 돼."
잠꼬대 같은 말이 반복되었다. 연희는 선우의 고개를 책상을 향해 눌러버렸다.
"자요."
고개 들 힘도 없는지, 선우가 손만 까딱여 더듬더듬 연희의 팔을 잡았다.
"아직 안 끝났어."
"1시간 뒤에 깨워 줄게요."
알아들은 건지 선우가 조용해졌다. 내뱉는 숨이 규칙적으로 변하고 나서야, 옆으로 고개를 돌린 선우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입가가 일자로 다물린 걸 보니 진짜 잠이 들긴 한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갈아입을 옷이라도 하나 갖고 올걸."
아까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피곤했는데, 저보다 피곤한 사람을 보니 제 피로는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연희는 선우에게 한 팔을 붙잡힌 채로 휴대폰 알람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