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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점 (33)화 (34/98)

<33>

그렇게 연희의 졸업식 날이 되었다. 연희의 가족은 참석하지 않았다. 조용히 졸업장만 받아 가려 했는데 준호와 유진이 찾아와서 꽃다발을 전해주었다.

"선배 축하해!"

고백을 거절한 뒤에도, 준호는 잘 지내자던 자신의 말 이상으로 연희와 아주 잘 지내주었다. 언제나처럼 허허실실 웃으며 티 나지 않게 연희를 챙겼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왜 이성으로는 보이지 않는 걸까 스스로도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졸업해도 연락 자주 해요!"

"군대 가서도 연락할게!"

유진과 준호가 아쉬움을 표했지만 연희와 오래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둘 다 학과 졸업 행사에 차출된 탓이었다. 연희는 참석하지 않을 행사였다. 졸업장을 챙기기 위해 홀로 학과 사무실로 향했다.

준호와 유진이 준 커다란 꽃다발 덕분에 시야가 조금 가려졌다. 학과 사무실에 거의 다 당도했을 때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꽃다발을 아래로 내렸다.

경미가 잠든 아기를 안고 보나 앞에 서 있었다. 보나 역시 혼자였다. 보나는 꽃다발 하나 없이 졸업장만을 들고 있었다. 서둘러 나가려던 기색이 역력한 보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경미를 노려보았다.

"이제 혼자 다니나 봐?"

경미가 빙긋 웃으며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이전에 보나를 대하던 것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요즘은 혼자가 편해서."

거짓말이었다. 보나를 따르던 친구들이 일제히 등을 돌렸다. 보나는 그것이 자신의 달라진 가정형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보나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예술재단이 작년부터 급격한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 경미를 향해 일방적으로 쏟아지던 화풀이가 주변 사람들에게 골고루 분산되면서, 참다 지친 사람들이 집단으로 반기를 든 까닭이었다.

개중에는 뒤늦게 연희를 찾아와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충분히 알겠다'는 식의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그간의 방관이나 휩쓸림은 모두 다 잊은 것처럼.

"원준 오빠 재입대 문제 마무리되는 대로 우리 살림 합치려고 해."

"그거 자랑하러 온 거야?"

보나가 얼굴을 구겼다. 더 대화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응. 네가 궁금해할 거 같아서."

"하나도 안 궁금하거든?"

"섭섭하네. 난 네 안부 궁금했는데."

경미가 보나에게 꽃다발을 내밀었지만, 보나는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보나가 쳐 내린 꽃다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보나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경미가 꽃다발을 다시 집어 올리려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손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아기를 안고 있어 허리를 구부리는 데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잠깐 망설이던 연희가 경미 근처로 다가가 꽃다발을 주웠다. 그리고 경미에게 건네주었다. 경미에게 친절을 베풀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경미가 자세를 바꿀 때마다 품에 안긴 아기가 불편해 보여서 그랬다.

"고마워."

연희가 곁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양, 경미는 놀라지 않았다. 아기의 표정을 살피는 연희를 경미가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연희가 받은 두 개의 꽃다발에 시선이 머물렀다.

"선우 오빠한테 받은 거야?"

"아니."

쓴웃음을 지었다. 선우는 오늘이 자신의 졸업식인 줄도 모를 것이다. 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경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쭉 같이 어울려 다녔다면서. 그래서 난 둘이 잘 됐나 했지."

자세한 소식까지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경미가 학교를 그만둔 이후 선우가 얼마나 많은 여자 친구들을 갈아치웠는지.

"아니."

"다행이네. 그래도 네가 내 충고를 아주 흘려듣지는 않았나 보다?"

"무슨 충고?"

경미가 다 알지 않느냐는 얼굴로 씩 웃었다.

"선우 선배 네 말처럼 그렇게 무서운 사람만은 아냐."

저도 모르게 선우를 변호했다. 선우를 좋아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선우를 미워하게 된 건 아니었다. 남들도 그를 나쁘게 기억하지 않았으면 했다.

"다시 이야기해 줘? 그날 학교에 있던 것 중에 내가 가져다 놓은 건 하나도 없었다니까? 그 사람이 우리를 갖고 논 거야."

"그렇다고 해도 내가 선우 선배를 탓할 수는 없잖아. 원준 선배 책 속에서 그런 사진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내가 곤란해진 걸 도우려고 한 일인데."

경미와 제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이해가 안 됐다. 서로 안 좋았던 일만 들추어내서 무엇 할까.

경미가 거짓으로 연희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도 사실이었고, 선우가 경미 집에 있던 증거를 가져와 학교 사람들 눈에 띄도록 심어놓은 것도 사실이었다. 둘 다 자랑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만 자리를 뜨려던 중, 경미가 연희를 잡고 물었다.

"네가 내 말을 잘 이해 못 하는 거 같은데?"

"어?"

"그것도 선우 오빠가 가져다 놓은 거라니까?"

"무슨 소리야?"

"원준 오빠 책에 있던 초음파 사진, 내가 끼워둔 거 아니라고."

"어?"

"그날 선우 오빠가 지각했었지? 필기할 거 있는지 확인한다고 원준 오빠 책을 잠깐 빌려 봤다더라. 굳이 수업시간 중간에. 그것도 까칠하기로 유명한 강 교수님 수업 시간에 말이야."

"그게 무슨…."

"하나 더 알려줄까? 어떻게 강 교수님이 예술재단 해외사업부 이사로 단박에 올라섰는지 알아? 현진 그룹에서 해외사업진출 후원금을 댄 조건이 강 교수를 발탁하는 거였대. 원준 오빠가 믿을 만한 데서 알아낸 정보야."

선우가 현진 그룹 일가의 일원이라는 건 모르지 않았지만, 은경이 속한 예술재단을 현진 그룹이 후원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완전히 묻어놨다던 강 교수 과거가 그즈음 발견된 것도 이상하지 않아? 덕분에 강 교수가 해외로 출국하기로 완전히 결심하게 된 거잖아."

"……."

"내 생각엔 선우 선배가 강 교수랑 너를 완전히 떨어뜨려 놓으려고 작정했던 것 같은데. 다시는 마주할 일 없게 말이야. 넌 어떻게 생각하니?"

딛고 선 땅이 흔들리는 듯했다. 비틀거리는 연희에게 경미가 다가왔다.

"있잖아. 원준 오빠 말이야."

심호흡을 한 경미가 아기를 한 번 추어올렸다. 파리한 안색이 몹시도 지쳐 보였다.

"그렇게 개망신을 당하고도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버릇 못 버렸다? 애를 봐서라도 이제 정착할 줄 알았는데.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 그리고 나쁜 본성은 누구 하나한테만 예외로 빗겨날 수 없지."

"그런 얘기를 왜 나한테 하는데?"

"선우 오빠도 다르지 않을 거란 뜻이야."

자신이 선우의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 끔찍했던 상황이 모두 선우의 계획 아래 벌어진 거였다고, 그 극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너였다고.

경미가 말하고 있었다.

아니, 주인공이라고나 말할 수 있을까? 선우가 연출한 무대 위에서는 모든 등장인물이 공평히 취급받았는데. 연출자의 기획 의도를 사전에 고지 받지 못한 건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모든 게 거짓이고 기만이었을지 모르겠다.

한때의 다정함도, 제게만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던 어리숙함도, 때때로 거르지 않고 내보이던 분노도

둘이 나누었던 동맹도, 저를 향한 위로도.

그저 자신을 갖고 놀기 위한 장치였던 걸까?

하지만 어느새 경미의 말을 온전히 믿고 있는 자신의 태도 역시 혼란스러웠다. 예전이라면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자리를 떴을 텐데. 왜 이렇게 된 걸까?

아니야. 그 정도로 제멋대로인 사람은 아닐 거야.

역시나 믿고 싶지 않았다.

* * *

학교를 나서기 전에 세나와 잠깐 만났다. 억지로 사진을 잔뜩 찍었는데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세나가 '많이 아쉬운가 보네' 하고 중얼거린 기억은 남았다. 세나와 헤어지고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학생 식당 앞 벤치였다. 혼자 있을 때 자주 왔던 곳이자, 선우가 난데없이 첫사랑 타령을 해댔던 곳이기도 했다. 나무 의자 표면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겨울밤 공기에 코끝이 시렸다. 유독 눈 많은 겨울이 될 거라더니 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았던 눈송이가 점점 크기를 더해갔다. 바람도 거세져서, 눈은 전보다 큰 경사를 그리며 사선으로 미끄러졌다.

"어떻게 지내요?"

연희는 닿지도 않을 말을 허공에 대고 건넸다. 휴대폰에 있던 선우의 전화번호는 벌써 예전에 지웠다. 아직은 지운 보람 없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지만 금방 잊힐 거다. 앞으로는 결코 누르지 않을 번호니까.

묻고 싶은 게 많지만, 각자 엇갈려 가는 게 서로에게 맞는 길이라면 멀어져야겠지. 이대로.

"잘 버티고 있어."

스스로를 토닥이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연희의 머리 위로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다.

"전화 왜 안 받아? 못 만나는 줄 알았잖아."

선우였다.

꺼내본 휴대폰에는 선우의 번호가 잔뜩 찍혀 있었다. 아직 학교가 맞는지 묻는 세나의 메시지도 있었다.

꿈인가 싶었다. 난데없이 왜, 어떻게 선우가 학교에 나타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술 냄새까지 풀풀 풍기면서.

"술 마셨어요?"

"오늘 환송회가 있어서…."

선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잘 지냈어?"

뒤늦은 안부 인사를 건넸다.

연희는 선우와의 지난 만남을 떠올렸다. 결코 좋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오늘 경미에게서 선우에 대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참이었다. 그러니 선우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다. 정말 그 모든 일들이 당신에 의해 계획된 것이었는지, 나를 가지고 논 것인지.

그러나 막상 마주하자 반갑다는 마음만 들었다. 오늘 들은 말은 기억에서 지우고 싶을 만큼. 이래서야 함께 다니지 말았어야 했다고, 눈에 닿지 않는 곳에 있었어야 했다고 말한 게 우습지 않나.

선우의 한쪽 무릎이 꺾였다. 연희가 얼른 일어서서 선우를 붙잡았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예요?"

선우의 팔을 잡고 의자에 앉혔다. 이렇게 잔뜩 취해서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 모르겠다.

"나 보고 싶었어?"

차마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조금요."

"거짓말."

거짓말이긴 했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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