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그건 못 해. 안 되는 일이었어."
눈을 꾹 감은 선우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니 당시에 연희가 어떤 의사를 표했어도 자신의 뜻대로 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결국, 선배는 선배 공식에 따라 내키는 대로 움직인 것뿐이에요. 단지 적용하는 대상이 나였던 거죠."
"……."
"선배가 마음대로 휘두르는 게 남들일 때는 실감 못 했는데, 막상 내가 당하니까 너무 힘들더라."
연희가 습한 한숨을 뱉었다.
"그럼 왜 날 좋아했는데?"
연희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이번에는 선우도 농담이나 변명으로 침묵을 메우지 않았다.
"다 지나간 일이에요. 대답해 봐야 의미 없잖아요."
과거를 돌아보는 순간, 그때의 마음이 같은 크기로 되돌아올 것만 같았다. 조금이나마 애써 줄인 마음의 크기를 다시 키울 순 없었다. 지금이야말로 선우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없애야 할 때였다. 다음으로 누군가를 마음에 들이기 위해서는.
연희는 선우를 남겨 두고 다시 걸었다. 철제 대문 앞에 섰다. 차가운 금속 손잡이에 손을 올렸을 때, 연희의 등 뒤에서 선우가 급박하게 외쳤다.
"알려줘!"
끼익.
대문을 열던 연희의 손이 멈추었다. 선우의 어조가 너무 간절했기 때문이다.
"네가 좋아하는 점이 내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지 알고 싶어."
연희가 뒤를 돌아 선우를 보았다. 긴장한 얼굴이, 차일 게 분명한 고백을 토해놓은 것처럼 아파 보였다.
"……."
"이젠 내가 싫어? 변할 거면 왜 나한테 고백했어?"
선우가 뛰듯이 연희의 앞으로 다가왔다. 조금 전 다가갈 땐 한 발 뒤로 뺐던 선우가, 멀어지려 하자 코앞에 서 있었다. 다 털어버리려는 순간 또 원점을 만들려고 했다.
선배에겐 까마득한 예전 일 아니었어요? 선배한테 고백했다가 마음 변한 사람, 한둘이 아니잖아요. 나라고 언제까지 옆에서 가슴앓이 해야 해요? 나 보란 듯 아무나 만나고 다녔잖아요.
그렇게 따져야 하는 건데….
오랜만에 가까이에서 선우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선우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귀 끝도, 코끝도, 눈망울도.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은 하지 말지.
툭. 툭.
대문에서 손을 뗀 연희가 발끝으로 땅을 찍었다. 운동화 끝이 젖어들었다. 축축해진 발이 금세 온기를 잃었다. 선우의 눈이 그 발끝에 머물렀다. 자신의 발이 시린 듯 눈을 찡그리면서. 갈 곳 잃은 선우의 손이 자꾸만 움찔댔다.
"나도 처음엔 내가 왜 고백했는지 몰랐어요."
얼마나 많이 그날을 되돌아보았던가.
"그냥 넘치는 마음을 뭐라고 정의해 두지 않으면 답답해 죽을 것 같아서, 다 꺼내서 정리하고 싶었나 보구나, 그랬어요."
처음에는 정말 그런 줄 알았다. 마음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싶어서, 후련해지고 싶어서, 자신에게 좀 더 다가와 달라고 말하고 싶어서 고백한 줄 알았다. 하지만 돌아보기를 거듭할수록 깨달은 것은, 그런 마음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른 욕심이 있었다.
"그럼?"
그냥 선우가 알았으면 했다.
"선배가 굳이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 아니어도, 있는 그대로의 선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았으면 했나 봐요."
남에게 무언가를 베풀고 쏟아내면서 정작 본인은 텅 빈 선우를, 자신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채워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되지도 않을 자신감이었다. 애초에 텅 빈 데는 이유가 있었을 텐데. 어쩌면 그게 선우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는데.
왜 나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 나만은 선배 마음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가로등의 깜빡임이 점점 느려졌다. 점점 수그러드는 빛은 선우의 얼굴도 희미해 보일 만큼 약해져 있었다.
"설사 거절당하더라도 선배가 내 마음만은 순수하게 받아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실패했다. 선우는 제가 전해 받은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던 양 굴었고 연희는 그런 선우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줄곧 상처받지 않은 척, 서운함을 구겨 넣은 것이 끝내 곪아 버렸다.
"차이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내 그릇이 생각보다 작더라고요."
"미안해."
선우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도 미안해요. 내 멋대로 고백하고 상처받고 심술부려서요."
"무슨 심술을 부렸는데?"
연희가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올려 선우를 보았다. 말의 무게가 가벼운 척 어깨를 으쓱했다.
"힘없는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요? 그냥 선배한테 더는 마음 안 주려고 노력했을 뿐이죠."
이미 넘치도록 흘러간 마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것마저도 잘되지 않아서 오늘까지도 노력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어떤 희망도 남겨놓고 싶지 않았다. 선우에게도, 제게도.
"그랬구나."
선우가 고개를 숙였다.
"이제 가요. 추운데."
연희가 대문을 열 때 뒤에서 픽. 가로등 퓨즈가 완전히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고쳐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볼 때마다 생각날 것 같아서.
고장 났는데 고장 나지 않은 척하는 사람 하나가.
오늘 해댄 말 역시 심술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선우의 마음이 아리라고 한 말에 왜 제 마음이 더 쓰라린지는 알 수 없었다.
뒤를 돌아봤을 때에는, 어느새 소복이 쌓인 눈 위로 선우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휴대폰을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준호에게 말했다. 아직은 누군가를 만나기가 힘들 것 같다고.
준호는 힘 빠진 목소리로 그럴 줄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래도 앞으로도 어색하지 않게 잘 지내자고.
준호와는 정말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선우와의 차이였다.
별빛은 너무 멀고, 가로등마저 꺼져 몹시 어두운 밤이었다.
* * *
졸업을 2주 앞두고 연희의 집에도 작은 변화가 있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온 것이다. 새삼 연희를 살피러 온 것은 아니었다. 사업 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잠깐 머물러 온 것이었다.
수년간 수주를 맡았던 주 거래처에서 갑자기 거래 중단을 통보한 탓에 미리 만들어둔 제품이 버려지게 생겼다고 했다. 원재료비며 인건비며 공장 임대료며 돈 나갈 곳은 정해져 있는데 돈 나올 구멍이 막혀버렸으니 아버지가 동분서주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한국에 들어와도 부녀가 오랜만의 해후를 함께 즐기는 일은 없었다. 집에 들어선 아버지가 연희에게 한 질문은 하나였다.
"혹시 네 엄마한테 연락은 없었니?"
어머니는 아버지를 버린 지 오래건만.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아버지가 안쓰러웠다. 조용히 고개만 젓자 아버지가 캐리어를 끌고 터덜터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이후 새벽같이 집을 나서 밤늦게야 들어오는 아버지와 말을 섞을 일은 없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그나마 많이 들은 날은 아버지가 집에 온 지 3일째 되던 밤이었다. 목이 말라 1층 주방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낮은 대화소리에 연희는 계단 중간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난간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작은아버지와 아버지가 1층 주방에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대충 뜯은 과자봉지 몇 개와 10병은 족히 넘을 소주병이 널브러져 있었다. 작은아버지도, 아버지도 얼굴이 붉었다. 작은아버지가 아버지의 술잔에 술을 새로 따라주며 물었다.
"아직도 형수 기다려요?"
"……."
"형! 이것도 집착이야. 형수, 이번에는 무슨 영화감독이랑 스캔들 기사 났더라. 엄청 유명한 사람이라던데, 형은 못 봤어?"
"사람 마음이란 건 알 수 없는 거다. 마음이 다시 돌아올지 아닐지는 끝까지 기다려 봐야 아는 거야…."
씁쓸한 아버지의 얼굴 위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못 들은 척 위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그러나 잠들지는 못했다. 한참을 뒤척거리다가 이제는 내려가도 괜찮을까 싶어 방문을 열었다. 다시 계단 중간쯤에 발을 디디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버지는 잠이 들었는지 식탁 위에 엎어져 있었고, 곁에 앉은 작은아버지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니. 너희 큰아버지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바로 말을 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자기도 돈 때문에 귀국했다는데 바로 돈 빌려달란 얘기를 꺼낼 수가 있나? 분위기 좀 봐야지."
뒤늦게 유학을 가고 싶어 한다던 둘째와 통화하는 것 같았다.
"또 너희 큰어머니 얘기로 시간만 낭비했지 뭐. 그놈의 사랑이 뭐라고. 이미 떠난 사람한테 뭘 그리 미련을 두나 몰라."
모자란 돈을 어디에서 충당해야 할지 고민하는 내용의 통화가 한참 계속되었다. 별 수가 없는지 짜증을 내며 전화를 끊은 작은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쩍 쇠약해진 아버지의 등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작은아버지가 중얼거렸다.
"하여튼 세기의 사랑 나셨네. 그것도 상대가 받아줘야 '사랑'이라고 하는 거지, 이건 그냥 구질구질한 미련이에요."
그렇게 정신 빼고 다니다 가진 거 다 잃으면 어쩌려고.
작은아버지가 아버지의 양쪽 겨드랑이에 팔을 끼웠다. 아버지의 몸을 일으키려고 끙끙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몸을 털썩, 주저앉히는 소리가 들렸다. 짧은 노력을 끝낸 작은아버지가 이마의 땀을 훔쳤다.
"하다못해 사업이라도 아주 잘 풀리고 있다면 몰라. 그 욕심 많은 여자가 퍽이나 돌아오겠수."
혀를 찬 작은아버지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아버지의 어깨가 들썩였다.
흐…
한참 뒤 고요한 주방에서 웃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아니, 웃음이 아니었다.
흐흐…흑
흐느끼는 소리였다. 희미하게 새어 나오던 울음이 점점 부피를 키우며 주방을 채웠다. 일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는 건, 이따금 흘러나오는 "은경아…." 라는 읊조림으로 알 수 있었다.
연희는 계단 위에 그냥 주저앉아 버렸다. 서로를 보듬을 만한 부녀 사이가 아니었다. 연희가 듣고 있다는 걸을 알았다면, 아버지는 절대 울지 않았을 것이다.
위로하는 사람 하나 없이, 누구도 듣지 않을 때를 빌려 겨우 눈물을 보일 수 있는 그 처절함이 처량 맞았다. 사랑이 뭐라고 저렇게 오래도록 사람을 힘들게 할까.
홀로 자기 연민에 빠진 패배자의 모습이 추했다. 상대는 그리워하지도 않을 과거에 갇혀 현재를 살지 못하는 아버지가 불쌍했다. 작은아버지의 말처럼 모든 게 구질구질했다. 다리가 저리도록 계단에 앉아 있다가 아버지가 완전히 잠든 후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주방에 내려갔을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가고 없었다. 밤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식탁 위도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깔끔한 아버지의 성정을 증명하듯 남은 설거지거리 하나 없었다. 이렇게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 제 마음 하나만은 정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자신은 그런 아버지의 딸이었다.
* * *
아버지가 집에 머무는 시간은 비교적 짧았다. 그러나 잠시간의 흔적만으로도 집을 떠도는 공기의 흐름은 한없이 비틀려지고 말았다. 아버지처럼 연희도 가능한 집 밖으로 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