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이제 선우 오빠도 곧 졸업이잖아. 너도 맘의 준비 해야지."
"준비는 무슨. 선배가 있든 없든 달라질 게 뭐 있다고."
연희는 선우가 없는 시간들에 제법 익숙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허전했지만 견딜 만은 했다.
"참. 선우 오빠는 졸업식 못 온다고 했다면서요? 그 즈음 해외에 나가 있을 거라던데."
"그래?"
되묻자 세나가 혀를 끌끌 찼다.
"이제 그런 얘기도 안 해주냐? 진짜 둘이 무슨 사이인지 모르겠네."
"그냥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까."
"그런데 그렇게 신경을 써? 너 지금도 얼굴 엄청 안 좋아. 알아?"
이렇게 끝나지 싶었다.
한참 전에 끝났어야 할 관계를 억지로 애매하게 이어붙인 끝은, 마침표도 제대로 찍지 못하고 허무하게 스러져갔다.
선우는 자신의 졸업식에 오지 않았다. 남몰래 산 꽃다발은 연희 집 주방에서 식탁 위를 장식하게 되었다.
* * *
선우 없이 보낸 한 학기는 정신 차릴 새 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힘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마음이 평온했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선우를 신경 쓰고 있었는지, 선우의 사소한 말과 행동 하나에도 휘둘렸는지에 대한 반증이었다.
어느덧 겨울의 중간이었다. 기상청은 올해 유독 눈이 많은 겨울을 맞게 될 거라고 했다.
대학로에서 유진과 준호를 만났다. 소극장이 즐비한 골목을 걸었다. 근처의 식당에 자리를 잡고 한참 수다를 떨다가 지나가는 커플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여자의 허리에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재킷이 묶여 있었다.
갑자기 눈가가 시큰해졌다. 앉아 있는 이곳은 언젠가 꼭 선우와 함께 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한식당이었다. 선우와 함께 가보고 싶었던 곳과, 결국 가보지 못한 곳을 떠올리는데, 준호가 티슈를 내밀었다. 손짓에 따라 눈가를 닦았더니 물기가 묻어났다.
"언니, 저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연희가 민망해할까 싶은지 유진이 자리를 피해 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붉어진 눈가를 조용히 들여다보던 준호가 말했다.
"선배, 나랑 만나볼래?"
내년에 군대에 갈 예정이라 면목은 없지만…. 준호가 말끝을 흐렸다.
"선우 형 때문에 그만 힘들어 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힘들어 보였나?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고 싶어."
"준호야."
"선배가 힘들어하는 얼굴은 유독 마음에 오래 남더라. 그래서 그래."
오랫동안 준비해온 이야기라고 하는 얼굴이 불안함과 기대를 동시에 담고 있었다. 선우에게 고백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떤 마음인지 너무도 잘 알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고작 그 정도 대답에도 준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밝게 웃었다. 바로 거절당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준호가 잘 생각해 봐달라고,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진지하고도 간절한 태도가 선우와 대조되어 씁쓸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유진이 돌아와 준호의 싱글거리는 얼굴을 봤다. 덩달아 환해진 얼굴의 유진이 발 빠르게 채팅창에 공지를 띄웠다.
"언니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해야 돼."
"무슨 말이야?"
조금 뒤 채팅창을 봤을 때 상황은 다소 과장되어 있었다. 준호와 연희가 오늘 당장 1일을 맞은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채팅창을 연 채로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헤어졌다.
버스에 오른 뒤에, 동훈과 혜진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그러고도 어딘가 용건이 남은 듯 휴대폰을 한참 매만졌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끝내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준호를 만나다 보면 연락을 할까 말까 망설이지 않을 수 있게 될까? 오지 않는 연락을 더는 기다리지 않게 될까?
그렇다면, 연애란 거 한 번 해보고도 싶었다.
버스에서 내려 검고 희미한 밤길을 걸었다. 오전부터 하늘이 어둑하고 바람이 눅눅하더니 곧 눈이라도 내릴 것 같았다. 누군가의 입김 같은 습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걷고 걸은 끝에 익숙한 집이 보이고,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고장 난 가로등이 보였다.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담벼락에 기대어 선 사람도 보였다.
선우였다.
가로등의 변덕에 따라 어둠에 가린 얼굴이 드러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잠시간 드러난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아무 말도, 아무 움직임도 없이 벽에 붙은 포스터처럼 홀로 서 있었다.
말을 거는 순간 부서질 환영 같았다. 그래서 연희는 선우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하얗게 드러난 목선을, 좁은 그늘을 만들어내는 속눈썹을, 추위에 오래 노출되어 새파래진 입술을.
깜빡. 가로등이 꺼졌다. 차가운 것이 뺨에 닿았다. 만져보니 손가락에 물기가 걸렸다. 내리자마자 녹아버린 눈송이의 흔적이었다.
"그 친구, 좋아했던가?"
한참 만에 선우가 입을 열었다. 불과 몇 시간 전 들은 고백을 선우가 어떻게 알까 했다가, 학과의 단체 채팅방을 떠올렸다. 아직 채팅방을 나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선우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가로등이 다시 켜졌다. 선우는 고개를 들어 연희를 보고 있었다. 그것이 퍽 반가웠다. 속도 없이.
"그럼 이제 그 친구랑 사귀는 거야?"
선우를 향하던 연희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붙박였다. 벽에서 몸을 떼어낸 선우가, 연희가 다가선 만큼 옆으로 멀어진 까닭이다.
그랬지, 참.
다가가면 그만큼 멀어지던 사람이었다. 그래 놓고 멀어지려 하면 못 가게 붙잡았다.
"여기까지 찾아와서 그런 거 물어보는 거, 실례라고 생각 안 해요?"
날선 말을 쏘아 올렸다. 가로등 불이 다시 꺼졌다. 어둠과 정적, 흩날리는 눈송이가 연희와 선우 사이를 갈랐다.
"선배가 누구를 만나든지 전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자신을 거절한 선우가 뒤늦게 남의 연애사를 캐묻는 게 화가 났다. 자기가 뭔데.
"정 궁금하다면 대답할게요. 만나볼까 해요. 준호는…."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유치하게도, 이런 식의 자랑이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
"제가 좋대요. 앞으로 힘들지 않게 만들어 주고 싶대요. 그렇게 확실하게 말해주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죠."
깜빡. 불이 켜지고 확인한 선우의 얼굴에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그런데도 한 손을 들어 제 눈가를 한참이나 가리고 있었다.
"그때 좀 더 빨리 고백해 주지 그랬어. 그럼 조금이라도, 어쩌면 나도."
선우가 눈가에서 입가로 손을 떨어뜨렸다. 작게 읊조린 다음 말은 손바닥에 먹혀버렸다. 예전에도 농담처럼 그와 비슷한 말을 입에 올렸었다. 그들의 관계를 돌이키기엔 아무 소용이 없는 말.
새하얀 눈송이가 선우의 속눈썹에 걸렸다. 선우가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눈송이를 떨어냈다. 그리고 나서야 핏기가 가시도록 앙다물었던 입술이 무겁게 벌어졌다.
"너는 왜 날 좋아했니?"
"…보통 고백한 사람들한테 이런 거 다 물어보고 다녀요?"
만나면 어떻게 지내는지 묻고 싶었는데, 선우의 앞날을 응원해주고도 싶었는데. 기대와는 다른 전개에 자꾸 뾰족한 말만 나간다.
"아니. 처음이야."
"저는 기억 안 나니까 다음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차갑네."
"…선배만 할까요."
선우가 피식 웃었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연희를 마주하지 못하는 시선이 흩날리는 눈송이를 쫓아 허공을 맴돌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네 대답이 듣고 싶어서 그래. 왜 내가 좋았어? 내가 너를 도와줘서? 친절하게 대해줘서?"
물론 처음에야 그 이유 모를 도움들이 선우를 인식하게 만들기는 했다. 적시에 내밀어준 손에 안도하기도 했고 굶주렸던 위로 몇 마디에 두근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친절해서 좋아했냐는 물음에는 코웃음이 나왔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부터 선우는 연희에게 분명히….
"선배는 나한테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는데요."
친절하지 않았다. 정확히 되짚자면 연희의 진심 어린 고백을 무시한 그날부터.
거절당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연희의 고백을 장난으로 덧씌워 성급하게 덮은 것이 문제였다. 매끄러운 가면 속에 자신을 꼭꼭 숨기기 시작하더니, 귀찮은 스캔들을 막을 때는 연희를 이용했다.
그 과정에서, 연희는 아무 설명도 듣지 못했다. 일부러 그런 것일 테다. 굳이 상대를 이해시키고 배려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부탁한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는 걸 알았을 테니까.
선우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평온을 가장한 미소와 말투로 흔들림을 숨겼다.
"좀 상처인데? 난 나름대로 노력한 거였든."
"그런데 왜 나는 힘들었을까요? 가끔은 선배가 나를 갖고 노는 건가 생각하기도 했거든요."
"호의를 그렇게 받아들였다니 너무한데?"
선우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일렁이는 조명 탓에 웃음이 일그러져 보였다.
"호의는 상대를 먼저 생각해야 나올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선배의 행동에 '나'는 고려된 적 없잖아요. 내가 뭘 원하는지, 어떤 방식을 원하는지 묻지 않았잖아요."
선우의 눈썹이 팔자를 그리며 억울함을 표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잖아?"
선우 덕에 편해진 점은 분명 많았다. 그냥저냥 적당히 평범하고 평화롭게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냥 좋았다고 할 수 있을까?
선우 곁에 머무는 내내 연희는 외줄을 타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안 보이면 접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가까이에서 보는 선우의 웃음 하나에, 말 한마디에 흔들리고는 했다. 튀어나오는 마음을 억지로 깎아내고 긁어대느라 연희는 늘 아팠다. 매일 아파서, 종래에는 자신이 아픈 줄도 모르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다 비워낸 줄 알았는데….
선우를 오래도록 보지 못하게 되고서야 깨달았다. 실은 많은 것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을.
"너 쓸데없는 구설수에 안 오르게 막았고, 어디서든 너 손해 보는 일 없게 만들었고. 혼자 다니지 않게 도왔고. 또…."
연희가 웃었다. 선우가 진심으로 모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선배는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는 생각 안 해봤죠?"
"그 이상 내가 뭘 할 수 있었는데?"
"정말 친절했다면 저를 놔줬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