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30)화 (31/98)

<30>

"연희도 종강 파티 왔네? 같이 한잔하자."

이번 학기에 부쩍 친해진 세나가 연희의 옆 좌석에 앉았다. 세나는 저번 학기에 편입을 했으나 교외 활동에 바빠 학과 활동에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참여하지 않던 친구였다. 그래서인지 연희를 따라다니던 소문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워낙 자신만의 길을 걷는 성격이라 소문을 들었다고 해도 개의치 않았을 것 같긴 하지만. 심지가 곧은 면은 혜진을 닮았으되 좀 더 거침없이 돌진하는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선우 선배는?"

"전에 인턴했던 회사 술자리에 있다는데, 아무래도 못 빠져 나올 것 같다네."

처음에는 조금 늦을 거라던 선우였다. 그러던 것이 조금씩 예상 도착시간이 늦어지더니 조금 전에 '아무래도 가기 힘들 것 같다'는 메시지로 결말을 맺었다.

"난 이제 집에 가 봐야겠다."

가방을 챙기는 연희를 세나가 붙잡았다.

"그럼 같이 가자. 잠깐만 기다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금방 올 것 같던 세나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리고 세나가 앉았던 자리에는….

10분 째 연희를 노려보고 있는 후배가 앉아 있었다.

"가영이에요."

도전적인 눈빛으로 이름을 밝힌다. 그제야 떠올랐다. 얼마 전 선우와 제가 어떤 사이냐고 묻던 낭랑한 목소리가.

시비조인 말투에 화가 나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가영의 눈가에 맺힌 눈물 때문이었다. 억지로 치켜든 고개는 외려 안쓰러웠다.

…왠지 뭐라도 물어봐달라는 느낌인데.

"혹시 나한테 할 말 있니?"

가영이 입술을 꾹 물었다 놓았다.

"언니! 저한테 왜 그랬어요?"

그리고 바로 따지고 들었다.

"뭐를?"

가영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떨어졌다. 티슈를 건네자 낚아채듯 받아들고 코부터 팽 풀었다.

"왜 한 번 부딪혀보라고 했어요?"

"뭘?"

드물게도, 자신이 뭔가 조언을 해주었던 모양이다. 내용은 기억 안 나지만.

"선우 선배요."

아.

생각났다. 같은 날 선우가 잠깐 옆자리를 비운 사이, 가영이 연희에게 했던 질문이.

"언니랑 선우 오빠랑 아무 사이도 아니신 거면, 제가 선우 오빠한테 고백해도 될까요?"

처음엔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가… 아무 것도 안하고 포기하면 후회할 것 같다기에 마음 가는대로 해보라고 답했던 것 같다. 수줍은 얼굴이 발그레해졌었지.

"나야 제3자인데 뭐라고 하겠니? 고백해 보기 전에는 잘 될지 안 될지도 확실히 모르는 거고."

"그래도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는 것 정도는 미리 알려줘도 됐잖아요."

…그랬나? 잠깐 연애를 쉬는 중인 건 알고 있지만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은 것 같은데. 하긴, 있다고 해도 얘기해줄 리 없겠지만.

"나도 몰랐어."

"모를 수가 있어요? 학교에서 거의 내내 붙어 있으면서?"

"우리 그렇게 가까운 사이 아니야. 선배는 속에 담은 이야기 잘 안 하는 사람이고."

"그럼 똑같은 사람들끼리 뭉쳐 다니는 거네요? 의뭉스러워, 정말."

어느새 눈물이 마른 가영의 눈에 독기가 어른거렸다.

"너는 왜 애꿎은 연희한테 그러니?"

한참 만에 자리에 돌아온 세나가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연희를 감쌌다.

"설마 연희가 나쁜 마음먹고 너한테 그랬겠어?"

"내숭쟁이들."

사람을 죽일 듯 노려보면서 나오는 욕이 겨우 이 정도라면 참 귀여운 애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든 소감을 말하라면…

안도감이었다.

짜증이 났다. 아직도 이런 감정이 들 줄이야.

선우 옆에 있을수록 치졸해지는 것 같다. 차라리 선우가 연애 중일 때가 마음이 편했다. 언제 또 새로운 누군가가 나타날지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고, 있는 줄도 몰랐던 희망이 자꾸 기어 나오는 걸 짓누르지 않아도 되고.

엉엉 우는 가영을 한참 달랬다. 가영의 실연에 안도감을 느낀 게 미안해서 더 열심히 받아주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연희의 테이블에는 가영과 자신 둘만 앉아 있었다. 함께 집에 가자던 세나는 연희를 기다리다 지쳤는지 다른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반쯤 잠이 든 가영이 테이블 위에 완전히 엎어졌다.

학회장 후배에게 가영을 부탁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나에게 함께 나갈지 물었더니 여기서 밤을 새우기로 마음을 바꿨단다.

혼자 집에 간 적이 숱하건만 오늘은 어쩐지 맥이 빠졌다.

가영을 달래면서 나눠 마신 술기운이 뒤늦게 올라왔다. 좁은 복도 계단이 무척 가팔라 보였다. 난간을 잡고 천천히 한 걸음씩 디뎠다.

"하아."

겨우 한 층을 올라왔을 뿐인데 숨이 가빴다. 별것 하지도 않았는데 한고비를 넘긴 느낌이었다. 다시 앞으로 발을 내딛기 직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왜 걜 달래고 있어?"

고개를 드니 눈앞에 선우가 있었다. 잔뜩 찌푸린 미간이 꼭 화난 사람 같다.

"선배는 왜 여기 서 있어요?"

왔으면 사람들과 어울릴 일이지, 왜 계단 앞에 서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언제 가영과 자신을 봤는지도 모르겠고.

"들어가 봐요. 아직 사람들 있어요."

못 온다던 사람이 어떻게 온 거냐고 묻지 않은 이유는 마음이 상한 탓이었다. 늦는다고 했다가, 못 온다고 했다가, 결국에 나타난 선우가 너무 제멋대로 같아서. 그 변덕에 따라 술자리에 참석해 자리를 지키고, 또 일어서고, 잠시나마 다시 자리로 돌아갈까 망설인 자신이 또 우스워서.

"갈게요."

선우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왜 달래고 있었냐니까?"

거듭되는 닦달에 멈춰 서고 말았지만.

돌아선 연희의 그림자가 선우의 그림자와 닿을 듯, 닿지 않았다.

"선배 때문에 울어서요."

"그러니까. 나 때문에 운 걸 왜 네가 달래느냐고."

왜 나한테 따지지? 자기한테 차인 사람 달래주는 게 그렇게까지 기분 나쁠 일인가?

"가영이가 선배한테 고백한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은 게 미안해서요."

"…네가 잘못했네."

뜻밖의 책망에 기가 막혔다. 행여 선우가 욕이라도 먹을까 싶어 조금 전까지 이런저런 변호를 해 준 건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후우, 선우가 한숨을 쉬고는 그대로 입술을 깨물었다가 뱉었다. 그리고,

"귀찮아서 안 되겠다. 앞으로 학교에서는 나랑 더 바싹 붙어 다녀. 그리고 누가 나한테 고백할까 물어보면,"

"뭐, 나랑 사귄다고 거짓말이라도 하라고요?"

그런 부탁이면 최악이지 않나. 자기가 차버린 사람한테.

"아니, 그냥 네가 날 너무 좋아해서 양보 못하겠다고 해. 찜 해놨으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더 최악이었다. 쌍방도 아니고 일방이라고? 당당히 짝사랑을 선언하란다.

뭘 알고 이러는 거야, 모르고 이러는 거야?

"그동안 내가 너 도와준 거, 이걸로 다 갚아라."

선우가 가볍게 웃었다. 오랜만에 선우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고 싶어졌다.

그럼에도 연희는 선우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동안 진 빚을 갚아야겠다는 의무감도 있었으나, 근본적으로는 선우의 말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던 탓이었다.

연희는 여전히 선우에게 약했고, 선우는 그런 연희를 너무 잘 알았다.

* * *

선우가 졸업 연기 신청을 한 것은 의외였다.

명목상 한 학기를 더 등록하고 몇 과목을 추가로 듣는다고는 해도, 선우가 학교에 머무는 시간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특히 중간고사 이후에는 학교에 머무는 시간이 일주일에 다섯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선우가 학점 관리나 교외활동에 소홀한 건 아니었다. 선우가 가져오는 결과물을 보면 쉬는 시간이 있긴 한가 싶을 정도였다. 취업처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는 마당에 왜 그렇게까지 애를 쓰는지 궁금했다.

연희의 생활에도 변화가 있었다. 선우와 있는 시간이 줄어든 만큼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준호와 유진, 세나와는 꽤 자주 만났다. 가끔은 청룡각에서 인연을 맺은 한철을 만나기도 했다. 여전히 주방 보조로 일하고 있는 한철의 말로는, 아직도 선우의 가족이 가끔 식당에 방문한다고 했다. 선우의 소화불량 문제도 그대로라고 했고.

"그런데 있잖아. 이번에 새로 뽑은 배달부가 그 집 아들을 안다더라? 같은 중학교를 나왔다나?"

"그래요?"

선우의 일이라면 아직도 귀를 기울이게 되는 연희였다.

"응. 근데 이상한 얘길 하더라고. 학교 다닐 때는 구질구질했다는 둥, 돈이 없어 수학여행비도 못 내고 빌빌댔다는 둥. 그때만 해도 자기 발밑에서 절절 기었다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혹시 배달하시는 분이 그 가족들이랑 직접 마주친 적도 있어요?"

"아니. 막상 그 가족이 오면 부지런히 피해 다니던데?"

그건 다행이었다. 거친 성정의 사람이라니 차라리 선우와 가까이 할 일이 없는 게 나을 것이다. 그 사람의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그런데 너, 정 회장 가족 소식에 은근히 관심 많다?"

한철의 물음에, 연희는 단 한 사람에게만 관심이 있는 거라고 말하지 못했다.

* * *

"언니들은 방학 동안에는 뭐 하실 거예요?"

종강을 몇 주 앞두고, 강의실에서 만난 유진이 물었다.

"난 기차 타고 전국 일주할 거고, 연희는 토익학원 다닐 거라던데?"

세나가 답하자 바로 뒤에 앉아 있던 준호가 반색하며 손을 들었다.

"그럼 나도 연희 선배랑 같이 학원 다닐래!"

유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빠는 학원 다닐 필요 없지 않아요? 950점 넘는다고 했잖아요."

"990점 도전하려고 그런다. 왜?"

"흐음…."

유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준호를 봤다.

"준호 넌 곧 군대 갈 계획이라고 하지 않았어?"

연희가 묻자 준호가 뒷머리를 긁었다.

"그냥 내년에 가려고."

"왜 내년인데?"

"그야 연희 언니가 내년에 졸업하니까, 겠죠?"

"야! 무슨 소리야."

준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사래를 치자 세나와 유진이 깔깔대며 웃었다.

"내가 오해한 거예요? 그럼 연희 언니 소개팅 주선해 줘도 되죠?"

유진이 휴대폰을 꺼내들고는 전화번호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세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장난 같던 태도들이 점점 진지해졌다.

"나 지금 누구 만날 생각 없어. 당장 취업이 더 급해."

연희가 급히 두 사람을 말렸으나 코웃음이 돌아왔다.

"시끄러워! 첫 키스 한 번 못해 보고 대학생활 쫑낼 거야? 얼굴이 아깝다, 이것아."

"맞아요. 취업도 중요하지만 연애도 중요하다고요!"

오늘따라 왜 유독 적극적인지는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선우의 새로운 여자 친구 소식이 화제가 된 참이었다. 작년까지 메이크업 모델로 활동했다는데, SNS에 올라온 사진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눈이 높으니 연희가 눈에 차지 않을 만도 하다는 이야기도 함께 돌았다. 세나와 유진은 그런 말들 때문에 연희가 행여 상처라도 입었을까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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