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어떻게 알았어요?"
의도하진 않았으나 불퉁한 대답이 나갔다. 선우한테 된통 당했다는 느낌을 아직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금방이라도 같은 마음이라고 대답할 것처럼 굴어놓고서는.
고백을 받았을 때 기뻐 보였던 건, 헛된 기대가 만들어낸 착각이었나?
나와 더 가까워지고 싶다고 한건 대체 무슨 의미였는데? 왜 나만 보면 챙겨주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왜 그렇게 웃어주었는데? 왜 그렇게 위로해 줬는데?
혜진만 해도 틀림없이 잘 될 거라고 믿지 않았던가.
그래놓고 갑작스러운 잠수를 벌이고 장난스러운 거절을 했다.
혹시 이런 게 어장 관리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다.
"동훈이한테 듣긴 했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휴학할 거야?"
"네."
선우가 버석 마른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한 톤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 말지?"
"네?"
연희가 숙였던 고개를 바로 했다. 선우의 두 눈이 연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때문인지 낯빛이 창백해 보였다.
"왜요?"
"동훈이랑 혜진이. 이번에 조기 졸업하니까."
"그게 왜요?"
"나 혼자 학교 다니기 싫어."
"선배도 조기졸업하지 않아요?"
"난 계속 다닐 건데? 몇 과목 드롭할 예정이라."
학기 중 인턴 업무를 한 탓에 학점이 엉망이 되었다고 했다. 일부 시험 대체 과제는 놓친 것도 있다고. 증명 서류를 내고 미리 양해를 구했으면 될 것을.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던 선우가 D와 F를 받은 과목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너까지 없으면 심심할 것 같아."
연희가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굳이 응대를 해줘야 하나 싶었다.
"선배 친구 많잖아요."
설사 친구가 없다고 해도 혼자 잘만 다닐 것 같은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나 모르겠다. 불과 얼마 전에 연희를 걷어찬 사실은 잊은 듯이 구는 것도 얄미웠다. 지금 나랑 같이 다니자는 말이 나오느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한 가닥 남은 자존심 때문에 참고 있을 뿐이다.
"친구 누구? 나 아무하고나 친구 안 하는데?"
선우가 뻔뻔스레 물었다.
"그럼 여자 친구랑 다니면 되겠네요. 막 시작한 참이니까 떨어지기 싫을 거 아니에요."
"그런가?"
"아니에요?"
아닐 리가 없다. 연희 역시 선우와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면 늘 함께 있고 싶었을 테니까.
"…우리 학교 아닌데?"
잠시 생각하듯 뜸을 들인 선우가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저랑 다니는 걸 여자 친구분이 좋아할까요?"
"고맙다고 할걸?"
연희가 고백한 것까지는 여자 친구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여자 친구가 모른다고 해도 연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장난 그만하고 친한 사람 많은 거 아니까 그중에 하나 골라서 다녀요."
"적당히 아는 사람이 많은 거지 친한 사람이 많은 건 아닌데."
"저랑도 그냥 적당히 아는 사이잖아요."
그 말에 허를 찔린 듯 선우가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꼭 제가 차인 것 마냥.
하지만 어쩌겠는가? 달리 표현할 말을 못 찾겠는데.
이제 연희는 선우와의 관계를 그렇게 정의 내리기로 했다. 적당히 아는 사이로. 특별하지 않은. 그냥 어쩌다 알게 되었고 어쩌다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어쩌다 비밀도 조금은 공유하게 되었지만,
졸업 후에는 연락이 끊길 적당한 관계.
"…그 '적당히'가 딱 좋은 정도라 그래."
어느새 표정을 추스른 선우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연희는 웃을 수 없었다.
나한텐 딱 좋은 정도가 아닌데.
연희는 이제 선우와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 착각하게 될 테니까. 착각하고 싶어질 테니까.
"제가 좀 쉬고 싶어서 그래요. 너무 지쳤거든요."
선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도 많이 힘들어?"
"네?"
"꼭 학교에 안 나와야겠냐고."
연희가 대답하지 않자 선우가 연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전 같지 않은 선우와 제 사이를 확인시켜 주었다.
"혹시 강 교수님 때문에 그래? 그분이 안 계시면 너한텐 학교를 다닐 이유가 없어?"
"……."
"차라리 잘 된 거 아니야? 그렇게 단칼에 돌아서는 사람인데, 하물며 널 믿어주지도 않는 사람인데 안 보는 게 낫지 않아?"
선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분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
"그럼 왜? 너 괴롭힐 사람들도 이제 없잖아. 다 해결된 거 아니야?"
선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몇 사람만이 문제가 아니에요."
연희의 입에서 바람 빠진 웃음이 샜다.
"나랑 다니면 다른 누구라도 널 함부로 못 대할 텐데. 그래도?"
"그냥 지쳐서 그래요. 지금 당장은 더 버틸 힘이 없어요."
사람들 속에 다시 뛰어들기가 무서웠다. 자신을 외면하거나 의심하던 사람들. 남을 이용하고 합리화하기 바빴던 사람들. 소문을 퍼 나르기 바빴던 입과 입. 사과 따위는 모르는 무책임함. 그에 대한 실망과 자책.
누군가에게는 다 지난 일이겠지만 연희에게는 그저 지나간 일이 아니었다.
한번 생긴 상처는 작은 자극에도 쉽게 다시 벌어질 것이다. 애초에 누가 준 상처인지는 이제 상관없었다. 상처를 준 사람이 떠났다고 해서 아픔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그러한 상처를 위로해 주던 한 사람을, 이제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좀 쉬면 괜찮아질까 싶어서요."
"네가 이러면 내가 한 일이 보람 없어지잖아."
선우가 담벼락에 기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탓에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연희도 시선을 땅으로 내렸다. 시멘트 바닥을 힘없이 내리찍는 긴 다리가 보였다.
"들어가 볼게요."
"잠깐만!"
연희가 돌아서자 선우가 급히 연희를 붙잡았다. 얼마나 꽉 쥐었는지, 붙잡힌 팔이 아팠다. 연희가 인상을 찌푸리자 선우가 아차 싶은 얼굴을 하며 손에서 힘을 뺐다. 그래도 잡은 팔을 놓지는 않았다. 결국 연희가 선우의 손을 힘주어 떼어내야 했다. 완전히 떨어져 나온 손을 보면서 선우가 입을 열었다.
"내 부탁 하나 들어주기로 한 거 기억해?"
"…네."
"그거 이걸로 하자. 나랑 함께 학교 다녀주는 거."
대수롭지 않은 말투와 달리 선우의 표정은 간절했다. 그러나 선우는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팔부터 손까지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내가 잘 해 볼게. 너 후회 안 하게. 대학에서 편히 지낼 수 있게 해 줄게."
한참 동안 손을 내려다보던 연희가 결국 자신의 손을 그 위에 얹었다. 선우가 말한 편안함이 기대되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그래야 선우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
"대신 학교에서만 보는 걸로 해요. 수업 끝나면 용건 없는 연락은 서로 하지 말고요."
선우를 향한 마음을 선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 위한 방어책이었다.
"그렇게 해야 한다면… 그럴게."
선우의 손에 굵은 힘줄이 솟았다. 그러나 연희의 손을 잡아 쥔 힘은 그리 세지 않았다. 힘은 자신의 안으로 뻗쳐 있는 듯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힘이 보잘것없어도 연희의 손은 쉽게 흔들렸다. 힘겹게 떼어낸 손이 다시 연희를 붙들고 있었다.
* * *
"연희 어디 가? 선우 선배 만나러 가?"
"응. 좀 이따 봐!"
새 학기가 시작된 지 두 달째였다. 어느새 학과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연희에게 말을 거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스몰토크도 시간이 지나니 제법 익숙해졌다. 인사에 적당히 답하고 가벼운 농담에는 그에 맞는 무게로 웃어주었다.
선우와 함께 앉아 수업을 듣거나, 같이 밥을 먹고 과제를 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그렇지만 그건 학교 안에서의 일로, 학교 밖에서 연락을 나누는 일은 아예 없어졌다. 대화는 점점 간단해졌고 속마음을 나누는 일은 없어졌다. 농담과 잡담이 빈자리를 차지했다.
어쨌든 선우의 말대로 되었다. 선우와 다니면서 학교 다니기가 훨씬 편해졌다.
처음에는 단과대의 남신을 채갔다는 뒷말도 있었으나 어느 순간 그마저도 사라졌다. 선우가 다른 학교 사람들과 데이트 하는 장면이 여러 번 목격되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연희를 선우의 어장에 걸린 가엾은 피해자로 보는 시선이 많아졌다. 동정은 적의를 사라지게 만들었으므로, 연희에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선우가 이번 학기 동안 갈아치운 여자 친구는 총 5명이었다. 각종 공모전 참여에 자격증 취득에 어학 공부에 운동에 각종 인맥관리에…. 하는 일도 많으면서 언제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누구 보라고 과시하는 거야 뭐야.
속마음을 완전히 감춘 선우는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그럼에도 미처 숨기지 못한 초조함이 방심한 얼굴 위로 드러날 때, 무엇이든 완벽하게 해내려 발을 동동거리는 게 느껴질 때, 연희는 안타까워졌다.
어쨌든 겉으로는, 적당한 선후배 관계를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선우와 어떤 관계인지를 대놓고 묻는 사람이 생기면 어쩔 수 없이 당황하게 되었다.
지금처럼.
"왜 선우 오빠는 연희 언니하고만 다녀요?"
1학년 후배가 귀엽게 삐악댔다. 다행히 답을 구하는 대상은 연희가 아니라 선우였다.
"…그냥."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을 매만지던 선우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이틀 전까지 커플링이 있던 자국이 선연했다. 어차피 곧 다음 커플링이 자리하겠지. 내리깐 속눈썹은 여전히 길었다. 한때는 참 예쁜 부분도 많다고 감탄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것도 무감하다.
"연희는 적당해서 편하다고나 할까."
말하는 게 안 예쁜 것도 이제는 무감하고.
"네?"
"적당하다고. 모든 게."
연희가 선우에게 우리야말로 '적당히 아는 사이' 라고 규정한 이후. 선우는 그 말을 자주 입에 담았다. 나쁜 말도 아닌데 들을 때마다 속이 쓰렸다. 기이하게도 그 말을 뱉는 선우 역시 썩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후배를 향해 선우가 입으로만 웃었다. 그러다 연희와 시선이 마주치자 조금 다른 얼굴이 되었다. 눈매가 둥글게 휘고 입가가 조금 더 부드러워진다.
제발 좀 그러지 마요.
그 미세한 변화가 연희의 가슴 한가운데를 후려쳤다. 이럴 때마다 바싹 긴장하게 된다. 바닥 깊숙이 접어둔 미련이 목 위를 뚫고 나올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