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설사 선우가 넣어둔 게 사실이더라도, 잠시 경미와 연희의 사물함을 착각해서 벌인 실수가 아닐까.
경미의 충고가 고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따지고 싶었다. 네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냐고. 너야말로 누구보다 무서운 사람이라고.
그러다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하려는 행동이 보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나는 언제나 원준의 말만 믿었고 원준에게 불리한 사실은 외면했다.
진짜 선우의 모습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주는 거라면? 자신이 좋아하던 다정한 얼굴도, 가끔 보이던 냉철한 얼굴도 필요에 따라 연기한 것이라면?
연희에게 돕고 싶다 말했던 그 간절한 얼굴조차 계산된 것에 불과하다면?
자신을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연희를 도울 때도 언제 어떻게 움직여야 사람들에게서 가장 극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는지 파악하고 움직였다.
그렇다면 그가 쥐고 흔든 사람 중에, 연희는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럼 어쩔 건데?
나에게 해를 끼친 건 없잖아. 모두 날 돕기 위한 거였다잖아.
생각이 너무 과했다. 어쩌면 선우가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는 부끄러움과 원망 때문에 선우를 비뚤게 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서로 똑같은 무게를 갖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연희는 선우에 대한 의심을 털어냈다.
* * *
개강을 몇 주 앞두고 혜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동훈과 함께 근처에 들를 테니 얼굴이나 보자고 했다. 선우도 함께 나올까 염려했는데, 선우는 다시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하느라 바쁘다고 했다. 전과는 다른 회사였으나 현진 그룹의 계열사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흔쾌히 약속을 잡았다. 안 그래도 혜진이 보고 싶은 참이었다.
아담한 커피숍은 볕이 잘 들었다. 투명한 유리문을 열자 햇살처럼 웃고 있는 혜진이 보였다.
"동훈 선배는요?"
"동훈이는 30분 쯤 뒤에나 올 수 있다던데?"
"그럼 좀 더 늦게 만나도 될 걸 그랬어요."
"너한테 따로 묻고 싶은 것도 있었는데 잘 됐지, 뭐."
주문한 음료가 도착하자마자 혜진이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어떻게 됐어?"
무슨 말을 기대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왜 둘 다 말을 안 해줘? 나 궁금한데."
"선우 선배도 아무 말 안 했어요?"
"안 해주던데? 기다, 아니다 말해주는 게 그렇게 어렵나? 답답해서 정말…."
"사실, 그게…."
아하! 혜진이 박수를 딱 치며 음흉하게 웃었다.
"알았다! 그동안 둘이 데이트하느라 바빠서 그런 거야?"
자신의 일인 듯 신나 하는 사람한테 말하려니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하다. 그래도 나한테는 얘기를 해 줘야지. 내가 얼마나 속으로 응원했는데."
그래도. 혜진의 상상이 더 뻗어나가기 전에 얼른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차였는데요?"
혜진이 물고 있던 빨대를 입에서 떨어뜨렸다. 오렌지에이드가 든 컵에 포말이 일었다.
"왜?"
"선우 선배 말로는 선착순에서 밀렸대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혜진이 눈을 뾰족하게 뜨고 외쳤다.
"걔가 언제부터 그런 거 따졌다고. 오는 사람 순서대로 다 받아줬으면 진작 바람둥이라고 소문났지."
혜진이 테이블을 쾅쾅 내리쳤다. 자신보다 더 열을 내주는 혜진이 고마웠다. 언제나 앞과 뒤가 똑같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물을 수 있었다.
"있잖아요."
"응?"
"왜 동훈 선배한테 고백 안 하세요?"
내가 너무 성급했던 걸까요? 그래서 실패한 걸까요?
혜진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잠시 컵을 만지작거렸다. 생각에 잠긴 눈매가 우묵해 보였다.
"나야 말하고 싶지. 근데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서."
"무슨 상황이요?"
"사실 우리 집 졸부거든? 나 중 3 때부터 갑자기 살림이 확 폈어. 돈 많아지니까 없던 기사 삼촌도 생기고, 도우미 이모도 생기고 그러더라?"
다소 뜬금없는 서두였다. 혜진은 더 들어보라는 듯 연희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면서 동훈이 아버지도 우리 집에서 일하시게 됐거든."
전에 말한 것처럼 단순히 고등학교 동창이나 재수학원 동기라서 친해진 것이 아니었다. 동훈이 곤란해할까 봐 집안이 얽힌 이야기는 빼고 설명한 것이리라.
"그래서 동훈이가 잘 알아. 우리 집 사람들이 얼마나 속물인지. 나를 이용해서 혼맥으로 비벼보려는 집안이 어떤 곳들인지."
혜진의 얼굴에 경멸과 분노, 씁쓸함이 고루 스몄다.
"그걸 동훈이도 다 아는데, 날 쉽게 선택할 수는 없을 거야. 그래서 좀처럼 말이 안 나오네. 고백 후에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면 깜깜해서 말이지."
혜진처럼 고백 전에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했던 걸까? 왜 거절당했을 경우의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는지 새삼 후회가 되었다. 앞으로 선우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동훈 선배가 거절할까 봐 망설이신다는 거죠?"
"꼭 그게 전부는 아니야."
"그럼요?"
혜진이 에이드를 다시 마시고는 톡 쏘는 기포에 인상을 찡그렸다."동훈이는 대체 이런 걸 왜 좋아하지?"라고도 중얼거렸다.
"나랑 동훈이랑 같이 붙어 다닌지 10년이 넘어. 그 사이에 얽힌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니?"
혜진이 말한 오랜 인연은 연희가 부러워했던 점이었다. 선우와 그렇게 오래도록 알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동훈이가 나 차면, 걔는 나 피해 다닌다고 그 인연 전부 끊어버릴 애거든. 내가 그 꼴을 어떻게 보니? 동훈이가 혼자 남는 꼴을."
아….
혜진은 생각보다 훨씬 더 동훈을 아끼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밝혀서 줄 수 있는 것과 그래서 앗아갈 수 있는 것들까지 모두 무게를 달아본 결론이 지금의 상태를 만든 것이다.
"이렇게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쉽기야 하지. 어쩌면 좀 더 가깝게 지내면서 내가 뭔가를 더 해줄 수는 없을까 자주 고민해."
혜진이 휘두르는 빨대의 흔적을 따라 오렌지빛 물결이 소용돌이쳤다. 얼음 알갱이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지나치게 경쾌해 혜진의 무거운 표정과 대조되었다.
"그래도 지금 동훈이랑 보내는 시간은 오롯이 내 거니까, 우선은 그렇게라도 만족해 보려고."
옅게 웃는 얼굴은 평화로워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허탈해 보이기도 했다.
"둘이 무슨 얘기 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훈의 큰 목소리가 야속하도록 해맑았고,
"배불러서 난 더 못 먹겠다. 남은 에이드는 동훈이 네가 다 없애주라."
마음을 숨기며 명랑하게 말하는 혜진의 목소리는 서글펐다.
"저, 휴학할까 해요."
단호한 선언에 혜진과 동훈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꿀꺽. 한참 뒤에야 동훈이 입에 든 음료를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차였다고 휴학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뭐라고? 누가 감히 우리 연희 후배를 찼는데?"
제풀에 놀란 혜진이 입을 헙, 다물었다. 미안하다는 입모양과 함께 두 손을 모아 비는 시늉을 했다.
"선우 선배요."
"헐."
동훈의 턱이 크게 벌어졌다.
"차여서 휴학하는 건 아니고요.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는 게 부쩍 힘들어져서요."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모두 사람과 관련된 일이었다. 딱히 누구 한 사람 때문에 학교를 쉬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 속에 있는 한, 끊임없이 기대하고 또 실망하게 되겠구나. 차라리 완전히 혼자가 되어 쉬어보는 것도 좋겠구나. 사람들 속에 섞인 '혼자' 말고, 그냥 진짜 '혼자'.
"…그렇구나."
혜진과 동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연희는 2층까지 독채를 홀로 차지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한때 작은아버지의 아들, 딸은 그런 연희를 부러워했다. 단층짜리 별채에서 작은아버지의 네 가족이 모두 모여 살던 시절의 이야기다. 지금은 작은아버지 내외만 머물고 있다. 첫째는 중국에 유학을 가 있고, 둘째는 대전에 위치한 제조업체에 취업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넓은 공간을 혼자 차지하는 게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 넓이만큼의 외로움과 공포가 어린 연희를 짓누르곤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어둠이 더해지면 부정적인 감정은 곱절이 되었다.
그래서 연희는 집에 들어서면 늘 조명부터 켰다. 사방을 환히 밝히기 위해서였다.
오늘도 그랬다. 인기척에 맞추어 저절로 켜지는 현관 센서 등을 제외하고, 1층의 복도, 주방, 서재, 2층의 복도, 주방, 작은방까지 돌며 차례로 전등불을 켰다.
불이 켜진 창 안에 연희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왜곡된 유리면 때문에 일그러진 얼굴이 본래의 얼굴보다 더욱 익숙하게 느껴졌다.
담장 밖으로 가로등 하나가 보였다. 연신 불이 켜졌다 꺼졌다 했다. 유난히 고장이 잦은 가로등이었다. 오늘따라 그 불빛이 꼭 저를 부르는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슬리퍼를 신고 잔디 정원을 밟는 동안 짧은 풀들이 발꿈치를 간지럽혔다.
대문 바로 앞에 이르렀을 때, 낯선 소리가 들렸다.
툭. 툭.
가벼운 것이 땅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자세히 둘러보니 담벼락 밖에서 마당 안으로 작은 돌조각이 하나씩, 하나씩 떨어지고 있었다.
끼익.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 담벼락 곁에 서서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옛 영화가 생각났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여주인공에게 전화를 걸 수 없는 남주인공이 창가에 돌을 던지는 장면이 있었다. 퍽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그래서 놀랐다. 돌을 던진 사람이 선우여서.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집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이제 궁금하지도 않았다.
"전화를 하지 그랬어요?"
"집에 놓고 와서."
근처에 공중전화가 없었다며 선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이었는지, 발밑에 조그만 돌멩이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정말 휴학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