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그동안 원준의 은근슬쩍 불쾌한 스킨십을 경험한 후배나 동기들이 뒤늦게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했다가 연희처럼 매도될까 싶어 말을 아꼈단다.
"참! 원준이 경찰 조사 받았다는 얘기 들었어?"
"네?"
동훈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연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군대에서 다쳐서 일찍 전역했다고 했었잖아. 알고 보니까 상해 진단받을 때 비리가 있었대."
얼마 전 연예인 군 비리 문제와 얽혀 구속된 의사의 고객 리스트에 원준이 있었다. 리스트에는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제들과 연예인, 스포츠 스타 등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것마저 원준에게는 비밀스러운 자랑거리였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아니겠지만.
"원준이 얘기 좀 그만해. 생각하기도 싫으니까."
혜진이 동훈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가 놓아주었다.
"네 얘기나 좀 해봐. 아까 교수님한테는 왜 불려간 거야?"
"졸업하고 조교할 생각 있냐고 하시기에 안 한다고 했어."
요즘 교수들이 졸업예정자들을 번갈아 불러가며 조교 제안을 건네고 있다고 했다. 주영이 갑작스레 학과 조교를 그만두게 된 탓이었다.
"걔는 왜 그런 짓을 해서…."
"그러니까. 어떻게 시험 족보를 돈 받고 팔 생각을 하냐?"
가격 때문에 실랑이를 하다가 족보를 사지 못한 누군가가 교육청과 학교에 동시 신고를 했다고 했다. 문제가 커지자 주영이 대학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렸으나 늦은 일이었다. 게시글에는 평소에 그녀가 보인 불친절함과 게으름을 성토하는 댓글만 줄줄이 달렸다고 했다.
* * *
종강 총회는 왁자지껄한 뒤풀이로 이어졌다. 호프집 중앙 테이블은 교수들과 소위 '인싸'라는 사람들이 차지했다. 선우와 동훈도 그들 중 하나였다.
교수들의 농담에 소리 내어 웃고, 충고와 조언에는 지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술과 안주가 떨어지지 않도록 챙기는 모습이 꽤나 자연스러웠다.
선우의 다양한 얼굴 중에, 저런 얼굴이 있었더랬다.
이따금 고개를 숙여 술잔을 기울일 때 보이는 피로한 얼굴 역시 선우의 것이었으나, 그 기색을 알아채는 사람들은 없어 보였다.
"새삼 대단하지?"
혜진이 연희에게 물었다. 선우는 맞은편에 앉은 교수에게 두 손으로 술을 따르고 있었다. 교수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선우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선우도 웃는 얼굴로 술을 더 주문했다.
"그러게요. 저렇게 세게 때리는데 눈썹 하나 안 찌푸리네요."
연희도 두 손으로 혜진의 빈 술잔에 술을 채웠다. 술잔을 든 혜진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뭐?"
하하, 갑자기 혜진이 크게 웃었다. 그러고는 잔에 담긴 술을 한 입에 털어 넣는다.
"왜요?"
"난 동훈이 얘기한 건데."
"네?"
"술도 잘 못 마시는 게 매번 주당들 사이에 껴있는 게 웃기잖아."
그제야 교수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는 동훈이 보였다. 곁에 있는 교수들은 하나같이 술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이들이었다.
"아…. 그렇네요."
빙긋 웃은 혜진이 연희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귓속말을 했다.
"넌 선우만 보이지?"
연희의 얼굴이 단숨에 붉어졌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대는 사이에 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난 동훈이만 보여."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혜진이 양 어깨를 한번 추어올리고는 금세 가운데 놓인 노가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걱정할 거 없다고."
"네?"
"동훈이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비밀 꼭 지키고."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렸던 혜진이 동훈을 보더니 얼른 손가락을 내렸다. 동훈과 눈이 마주쳤는지"적당히 마셔!"하고 외쳤다.
"제가 알아도 되는 비밀이에요?"
"선우가 하도 털어놓으라고 닦달을 해서 말이지. 네가 물어보면 꼭 알려 주라고."
근래 정신이 빠진 통에 까맣게 잊고 있던 이야기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네가 안 물어보니까 내가 먼저 말해야지 어떡하겠니?"
사실 선우에 대한 감정은 정의를 내렸다. 선우에게 전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유는 많았다. 선우와 저는 환경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세상을 보는 시각도 많이 다른 것 같고 또….
"괜히 이런저런 핑계 생각하지 말고 기회 될 때 바로 잡아."
혜진과 함께 중앙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연희와 선우의 눈이 마주쳤다. 선우가 빙긋 웃었다. 조금 전 교수를 향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환하게.
호프집 밖은 소음과 담배연기가 가득했다. 맑은 공기를 쐬고 싶어 나왔건만, 매캐한 연기만 잔뜩 마셨다. 눈이 마주친 몇몇 동기가 어색하게 인사를 해 왔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
식당을 향해 걸어가던 연희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골목 안쪽 어두운 곳에서 선우와 원준이 함께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원준이 선우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원준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던지던 선우가 연희를 발견하고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선우가 이 정도로 당황하는 얼굴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무슨 짓이야?"
선우의 시선을 따라와 연희를 발견한 원준이 비릿하게 웃었다. 선우를 쥐었던 손을 내리고 탁탁 털더니 연희에게 다가왔다.
"도대체 내가 왜 눈에 안 차는지 궁금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더라? 하긴, 내가 여러 모로 밀리긴 하지."
"……."
"집안도 그렇고, 능력도 그렇고. …음침함도 그렇고."
어디 한 번 잘 해보라며, 원준이 연희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연희는 선우를 보았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얼굴로.
선우가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이게 내 방식이야. 네가 네 방식으로 나를 돕고 위로하듯이, 나도 내 방식으로 널 돕고 위로하는 거라고."
원준이 곤경에 빠진 이유를, 묻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에 선우가 먼저 연희를 스쳐 지나갔다. 연희가 뭐라고 하든 듣지 않겠다는 듯이. 혹은 연희가 꺼낼 말이 두렵다는 듯이.
남들보다는 선우에 대해 좀 더 잘 안다고 자신했던 것이 무색하게, 요즘의 선우는 종종 낯선 모습을 보였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보나도, 경미도, 다른 지인들에게도 몇 번이나 겪었던 일이니까.
그런데 선우가 낯설어질 때는 그때와 다른 기분이 들었다. 다른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이까지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런 낯선 모습까지도 제게만은 전부 보여 달라고 부탁하고 싶기도 했다.
혹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척, 그저 함께 있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기도 했다. 힘들 때만도 아니고 즐거울 때만도 아니고 모든 순간을 함께 있고 싶다고.
단지 고맙기만 하다면 이런 감정이 들지는 않겠지.
다시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눈을 반쯤 감은 동훈이 혜진 옆자리에 널브러져 있었다. 결국 취하고 만 모양이었다.
"선배가 데려왔어요?"
"선우가 데려다 놨어."
"선우 선배는요?"
직접 보라는 듯, 혜진이 선우의 자리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선우의 옆자리에는 형민이 앉아 있었다. 형민은 낄낄대는데 근처에 앉았던 여학생들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또 무슨 말을 했기에.
선우가 손을 들어 형민을 제지했다. 여학생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입을 삐죽인 형민이 근처 주당 교수들에게 무언가를 말하면서 선우의 술잔에 술을 들이부었다. 술잔을 선우의 입술에 대주기까지 했다. 잠시 망설이던 선우가 술을 한 번에 들이켠 뒤 형민에게 잔을 밀었다. 술을 새로 따라주자 형민이 단번에 술잔을 비우고는 다시 선우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같은 행동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교수들은 두 사람의 승부가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저렇게 급하게 마셔도 괜찮을까?
선우의 가방 속에 담겨 있던 각양각색의 약들을 생각했다. 선우를 둘러싼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즐거워하는 게 싫었다. 편히 내버려두지 않는 것에 화가 났다. 교수들이 응원하듯 선우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니, 저 먼저 나갈게요."
선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연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희에게서 처음 듣는 '언니'라는 호칭 때문일 것이다.
"연희! 파이팅!"
웃음기 섞인 응원을 등지고 걸었다. 선우에게 가는 길은 짧지만 또 길기도 했다. 혜진의 속도에 맞추느라 주량을 조금 넘겨 마신 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꿋꿋하게 걸었다.
이 자리에서 선우를 벗어나게 하고 싶었다.
"지연희 학생이 웬일이야?"
선우보다 교수들이 먼저 연희에게 말을 걸었다.
대부분의 모임에 빠지거나, 오더라도 구석진 곳에만 머물던 연희였다. 그런 연희가 중앙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으니 놀랍기도 할 것이다. 선우를 생각해서 오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자리한 교수 중에 은경이 없어서 낼 수 있는 용기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온 김에 좀 앉을래? 같이 얘기 좀 할까?"
소문으로 전해진 은경과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걸까? 일부 교수들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아니요, 그래서 온 게 아니고…."
술에 취해 나른한 눈이 된 선우를 보았다. 이 순간에도 허리만은 꼿꼿하게 정자세로 앉은 선우를. 연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선우를.
"선우 선배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왔는데요."
"여기 앉아서 하면 되지."
"여기서 하기엔 좀 곤란해서요."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오~. 연희 지금 선우한테 재도전하는 건가?" 하는 장난 같은 외침과 흥미 어린 시선이 달라붙었다.
테이블 밑에서 힘없이 흔들리는 선우의 손목을 잡아챘다.
"나가요."
"지금?"
선우의 귀 끝이 붉어졌다. 잡힌 손목이 움찔거렸다.
"네.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