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나지막한 한탄이 곳곳에서 터졌다. 경미와 원준의 이름이 고무공처럼 여기저기 튀어나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선우가 경미를 지나쳐가면서 한마디 보탰다.
"사물함에 숨겨놓은 재킷도 이젠 좀 꺼내 입지 그래? 꽤 예쁘던데."
보나가 경미의 사물함에서 갈색 재킷과 블라우스가 찾아낸 것은 그날 오후였다. 도둑으로 의심된 사람을 찍어두었다던, 보나의 동영상에 나온 옷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간 원준과 엮었던 수많은 소문의 주인공이 경미로 탈바꿈되었다. 이제는 경미가 공공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더하여 자신 대신 죄 없는 사람을 방패막이 세운, 누구보다 뻔뻔하고 잔인한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그러나,
누구 하나 연희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가해자도, 방관자도.
보나의 장단에 맞추어 연희를 안주거리 삼은 것도, 지난 2년간 연희를 믿어주지 않은 것도, 사실을 비틀거나 과장하고, 때로는 없던 일까지 만들어내며 제멋대로 떠들어 댄 것도 사과할 거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갑작스러운 은경의 출국 선언부터 그녀가 저를 어떻게 여기고 있었는지 완전히 깨닫게 된 일, 그녀의 과거를 알게 된 일, 가당찮은 의심을 덮어쓰고 벗어난 일까지. 삽시간에 벌어진 모든 일들이 연희를 어지럽게 했다. 뒤로 기울어지려는 어깨를 선우가 지그시 감싸주었다. 강의실을 나와 인문대 건물을 벗어날 때까지 줄곧 그랬다.
학생 식당 앞 벤치에 연희와 선우가 나란히 앉았다.
"잠깐만 기다려 봐."
급하게 일어선 선우가 근처 커피 자판기로 향했다. 그리고 가방 앞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져 두꺼운 반지갑을 꺼내들었다. 지갑을 들어 보여주는 모양새가 퍽 뿌듯해 보였다.
커피 두 개를 들고 돌아온 선우가 슬그머니 지갑을 벌렸다.
"붕어빵 먹고 싶으면 얘기해. 이제 나 잔돈 많아."
펼쳐진 지갑의 수납공간에는 빳빳한 천 원짜리가 여러 장이 들어 있었다. 지퍼가 달린 안주머니에는 갓 주조해낸 듯 반짝이는 오백 원짜리 동전과 백 원짜리 동전이 마구 섞여 있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만큼 기운이 없는데도 웃음이 나는 것은 어째서일까. 애먼 데서 자랑스러워하는 선우의 모습이 이 상황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전 경미에게 싸늘한 비소를 날리던 얼굴과는 너무도 달랐다.
"괜찮아?"
"네."
말과 달리, 내민 커피를 받아든 손은 아직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토닥토닥.
선우가 어색한 손길로 연희의 등허리를 두드렸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리듬 속에서 조금씩 떨림이 진정되었다. 그러고 나자 떠오른 것은 의문이었다.
"그 돈, 경미가 훔친 거 어떻게 알았어요?
선우가 손에 든 잔을 만지작거렸다.
"알면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허공으로 눈을 돌린 선우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사람을 좀 썼어."
연희의 눈이 더없이 커다래졌다. 연희를 슬쩍 곁눈질한 선우가 급히 덧붙였다.
"나도 이런 일을 해 본 건 처음이었어."
이야기하는 사이 연희의 등허리 근처에 있던 선우의 손이 제 무릎 위에 얹혔다.
"그렇게까지 했다고요?"
"우리 집에선 별것도 아닌 일이야."
자조 섞인 웃음이 흩어졌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연희의 반응을 살피느라 바쁘게 굴러갈 따름이었다.
연희의 표정에 놀람은 있으되 비난의 기색은 없음을 확인한 선우가 좀 전보다 차분해진 어조로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다 해결되었으니까 잘된 일 아닐까?"
"…그거 불법 아니에요?"
선우가 경직된 어깨를 틀어 연희와 완전히 마주봤다.
"혹시 내가 이런 짓 한 거, 기분 나빠?"
"걱정돼서 그러죠. 선배 잡혀갈까 봐."
연희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런 일로 걱정할 거 없어. 일 잘하시는 분이고, 이 정도 일로 잡혀가게 집에서 그냥 둘 리도 없어."
선우가 피식 웃었다. 이번에는 진짜 웃음이었다. 연희의 미간 위에 손을 띄우고는 검지와 중지를 펼쳐 주름을 펴주는 시늉을 했다.
"왜 웃어요?"
"걱정해 주는 거 좋아서"
어깨를 늘어뜨린 선우가 커피를 홀짝 마셨다. 연희는 입만 살짝 댄 컵을 벤치 위에 내려놓고 또 물었다.
"경미가 돈을 훔쳤다는 건 어떻게 안 거예요?"
선우가 경미와 친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경미가 학교 안에서 별다른 실마리를 흘린 적도 없었다.
"경미 집에 돈이 있었으니까?"
"학과 사람들 집까지 전부 뒤졌단 말이에요?"
연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선우가 귀엽다는 듯 푸스스 웃었다.
"그럴 리가. 처음부터 경미와 보나, 원준이, 주영이 정도만 조사했어. 궁지에 몰렸을 때 널 이용할 만한 사람들이 딱 그 정도였으니까. 이 중에 없었다면 범위를 조금 더 넓히게 되었겠지만."
"경미가 원준 선배랑 관련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는데요?"
경미는 평소 원준과 데면데면한 사이인 것처럼 굴었다. 원준 또한 경미를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고.
"전에 내가 봤거든. 두 사람이 같은 집에서 함께 나오는 거."
이른 새벽이었다. 어둠에 익숙한 눈이 아니었다면 볼 수 없었을지도.
원준의 뒤를 따르는 경미의 몸짓에는 설렘이 묻어 있었다. 몸을 붙여오는 경미를 원준이 딱히 거부하지 않은 게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차라리 평소에도 가깝게 지냈다면 의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아…."
"통화 기록을 알아보니까 경미가 산부인과 처음 갔을 즈음이랑 돈 없어지기 직전에 원준이랑 통화한 횟수가 유독 많더라고."
낯설었다. 다른 이의 뒤를 뒤지고 약점을 잡아내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설명하는 선우가.
어쩐지 자랑스러워 보이는 표정이 조금 전 지갑을 자랑하던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은 섬뜩하기도 했다. 자신을 돕기 위해 애썼다는데 이제 와서 잘잘못을 가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꾸만 위화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보지 말아줄래?"
"제가 어떻게 보고 있는데요?"
"멀리 있는 사람을 보는 눈."
"……."
"날 그런 눈으로 보라고 벌인 일이 아니야."
커피를 든 연희의 손이 벤치 위에 놓였다. 액체 표면이 고르지 못하게 출렁거렸다.
"나한테 미리 귀띔이라도 좀 해주지 그랬어요?"
"미리 안다고 해결될 게 있었을까? 어차피 너는 너 혼자 알고 끝냈을 거잖아. 네가 말해봤자 누가 믿어줄 거란 기대가 없었을 테니까."
맞는 말이었다. 게다가 연희가 변론을 했다 해도 선우처럼 여론을 뒤흔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선우처럼 증거를 찾아낼 수도 없었을 테고, 경미나 원준의 입에서 사실을 끌어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당사자의 변명 정도로 치부되고 말았겠지.
큰 사건으로 한껏 주목받았을 때 나온 해명은 그렇지 않을 때보다 파급력이 훨씬 크다는 걸 안다. 결론을 보면 고맙다고 해야 맞는 거겠지. 그런데 나는 왜…
섭섭하지?
처음부터 내게 다 털어놓지 않았다는 게, 왜 속이 쓰리지?
"그냥 내가 쥐고 있다가 적절할 때 터뜨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
이유를 깨달았다. 이 일의 당사자는 연희였다. 그럼에도, 선우는 연희에게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판단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난 아무리 상대를 아끼더라도 모든 걸 다 털어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거든."
"상대가 비밀이 없기를 원해도요?"
"무작정 다 털어놓는다고 두 사람의 관계에 도움이 될까? 아끼는 사람일수록 보여주기 싫은 부분도 있는 거잖아."
선우와 자신 사이에 무형의 벽이 세워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확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강 교수 얘기, 나한테 안 물어봐요?"
"……."
"보나가 말한 대로 날 낳아주신 분이에요."
선우가 침묵했다. 표정은 평온했다. 그 사실이 선우에게 있어서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처럼.
"궁금한 거 없어요? 물어보면 다 대답해 줄 수 있는데요."
"알아. 그런데 안 물어볼래."
적어도 가족에 대한 부분은 그냥 덮어두고 싶다고, 선우가 말했다.
"왜요?"
"그러고 나면 네가 우리 가족에 대해서 질문하게 될 거잖아. 나는 들은 만큼 대답해줘야 하고."
"……."
그럴 생각이었다. 선우를 괴롭히던 가족들에 대해 묻고 싶었다. 선우와 양부의 대화를 멋대로 들어버린 일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다. 다 듣고서 모른 척 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그리고 제대로 위로하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저 역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것들을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었다.
사실은 은경에게 보인 마지막 모습이 그런 꼴이라 너무 속상했다고. 그녀가 제게 보인 태도에 또 한 번 좌절하고 말았다고. 알고 싶지 않은 사실까지 알려주고 떠나버린 어머니가 너무 미웠다고.
그래서 그날이 자신에게는 어머니를 완전히 잃어버린 날로 기억될 거라고.
그렇게 서로의 아픔과 치부를 공유하고 나면 덜 외로울 것 같았다. 연희 자신도, 선우도.
"안 물어보고 대답 안 할래."
하지만 선우는 듣고 싶지도, 말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선배랑 나는 생각이 많이 다르네요."
"맞아. 달라."
"……."
"그렇다고 해도 너랑 멀어지고 싶지는 않아. 더 가까워지고 싶지."
견고한 벽을 사이에 두고서도 선우와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각자의 비밀을 각자의 것으로 남겨둔 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가족은 선우와 자신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존재였다. 자신의 근간을 이루는 것을 꼭꼭 숨기고 싶다는 말은 상대를 믿지 못한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 숨기는 것 없이 다 털어놓고,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거든요."
"너다운 생각이네."
"이렇게 생각이 다른 우리가, 과연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희 역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깊이 파고들수록 선우와 오히려 멀어질 것만 같아서였다.
"그런데 연희야."
"네."
"이건 알아줬으면 좋겠어."
"뭘요?"
"난 네가 내 옆에 있어주는 지금이… 너무 감사해."
정말이지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듣지 않고도 위로해 줄 수 있는 선우의 존재가 연희 또한 감사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