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대체… 나한테 왜들 이래?"
그동안 꾹꾹 누르기만 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읊조리듯 시작된 말이 찢어질 듯한 비명으로 변했다. 연희의 시선은 은경이 나간 문가에 고정된 채였다. 연희를 관찰하던 보나가 입매를 비틀며 연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역시 맞구나? 강은경 교수가 네 엄마인 거."
연희의 동공이 더없이 커다래졌다.
"누가 그래?"
흔들리는 목소리에서 확신을 얻은 걸까? 연희의 귓가에서 입을 뗀 보나가 다 들으란 듯 목소리를 키웠다.
"연희랑 강 교수, 참 많이 닮지 않았어?"
다들 뜬금없는 소리를 듣는다는 표정으로 보나를 봤으나 연희만은 그럴 수 없었다. 모녀라고 정의해 놓고 본다면, 자신과 은경의 얼굴에는 분명 닮은 점이 많았다. 갸름한 얼굴형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물론이고, 평소에 짓는 무표정까지 그랬다.
정작 보나가 강조한 '닮은 부분'은 외모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아빠가 강 교수랑 동문인데 말이지. 강 교수가 대학 다닐 때 꽤 유명했다더라? 학과 교수랑 선배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여자로. 교수랑 제자 사이에 스캔들이 터진 것도 어이없는데, 교수랑 만나던 중에 갑자기 별 친분도 없던 선배 애를 임신해서 나타났다는 거야. 그런 주제에 교수한테서 떨어지려고도 안 했대. 애는 그냥 하룻밤 실수 때문에 생긴 거라고 핑계대면서."
시큰둥했던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흥미롭게 변했다. 사생활을 철저히 관리하던 은경이 과거에는 떠들썩한 스캔들의 주인공이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나 보다.
"그 교수 집안이 워낙 쟁쟁해서 스캔들을 철저히 묻어놨는데, 최근에 강 교수가 만나던 남자 쪽 집안에서 지난 일을 알게 된 모양이야. 그래서 헤어지게 된 거라던데? 지저분한 소문에 얽혔던 사람은 절대 안 된다고. 재벌가에서 따지는 게 좀 많겠어?"
오늘 은경이 왜 유독 날선 반응을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과거가 현재의 삶을 찔러대 예민해진 순간, 그 과거를 상기시키는 존재가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때 강 교수가 임신했던 아이가 지연희라는 걸, 누가 짐작이나 했겠냐고."
뜻밖의 말에 강의실이 정적이 일었다. 그러나 금방 반박할 줄 알았던 연희가 하얗게 질린 채로 침묵하면서, 정적은 술렁임으로 변했다.
"제일 어이없는 점이 뭔지 알아? 당시에 그 교수가 유부남이었대. 임자가 있었다고."
연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보나가 자신만만하게 떠드는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 엄마에 그 딸이지 않아?"
"그만 좀 해!"
보다 못한 혜진이 소리쳤다. 뒤따라 온 동훈이 보나와 연희 사이를 막아 주었지만 연희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어릴 적 기억이 선연히 떠올랐다. 마루에서 노는 연희를 두고, 베란다 너머를 오랜 시간 바라보던 은경의 텅 빈 눈동자, 이따금 저를 붙잡는 손길을 냉혹하게 내치던 손길.
'너만 없었으면…',
기도처럼 반복되었던 중얼거림.
애써 잊으려 노력했던 것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연희를 지탱하던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 * *
그동안 소문에 비교적 의연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진실과 유리된 거짓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문이 진실일 때는 어찌해야 할까? 그 진실이 가장 숨기고 싶어 했던 치부라면.
자신을 품었던 사람에게조차 외면당한 존재라는 것.
연희는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위로조차 동정으로 느껴질 것 같았다. 혜진이나 동훈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와도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강의 중 쉬는 시간이 생기면 부러 잠을 청했다. 그마저도 마음이 편치 않아 오늘은 아예 건물 밖으로 나갔다 돌아왔다.
"이게 뭐야?"
다시 돌아와 본 책상 위에는, 구겨진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은경이 쥐어주었던 초음파 사진이었다.
숨이 막혔다. 사진 속의 작은 태아가 꼭 저인 것만 같다. 시작부터 부정당한 아이.
"언제까지 모른 척 하나 보자고. 너나, 원준 오빠나."
이를 악문 보나가 내뱉듯 말했다. 연희가 벌떡 일어섰다. 이미 자신에게 준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이없는 의심을 끝까지 사실로 밀어붙이는 보나에게 진저리가 났다. 벌벌 떨리는 주먹을 쥐고 보나에게 다가가려 할 때,
"진정해."
어느 틈에서 다가온 선우가 살며시 연희의 어깨를 쥐었다가 놓았다. 책상 위에 있던 사진을 주머니에 집어넣어, 연희의 시선을 제게로 돌렸다.
"선배."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선우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희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연희야."
연희에게 바짝 붙어선 선우가 귓가에 속삭였다.
"미안한데 그냥 계속하면 안 될까?"
"……."
"너 돕는 거."
그냥 계속하면 안 될까? 사실 그동안도 참느라 힘들었어.
어쩐지 간절함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간절함은 연희의 어깨를 쥔, 힘줄이 불끈 솟은 손에서도 느껴졌다. 손바닥만큼 닿은 선우의 체온이 연희의 몸을 녹여서, 연희는 작게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사실 연희도 간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순간, 선우가 간절했다.
"고마워."
인사와 동시에, 선우가 보나를 쏘아보았다.
"엉뚱한 사람 좀 그만 괴롭혀."
"오빠는 나서지 마세요."
보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했으나 선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겠는데."
"번번이 저한테 왜 이러세요? 제가 그동안 오빠한테 얼마나 잘했는데요!"
"이용해 먹을 만하니 그랬겠지. 네 얄팍한 계산을 내가 모를 것 같아?"
"…오빠!"
"사회에서도 그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면 착각이야. 내가 너 같은 애 상대해 주는 것도 그나마 학교니까 가능한 거고."
선우가 연희의 팔에서 손을 뗐다. 그러고는 오른쪽 구석에 있는 책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책상 위에는 널브러진 필기구와 가방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그 중 선우가 집어 든 것은 끄트머리에 놓여 곧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갈색 가방이었다. 망설임 없이 지퍼를 열고 가방 안을 뒤지는 손길에, 안에 든 물건들이 지저분하게 밖으로 흩어져 내렸다.
"오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소리친 사람은 경미였다. 경미가 선우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선우가 가방 속에서 하얀 소책자를 꺼내든 게 더 빨랐다.
"너랑은 상관없는 척 시치미 떼는 거, 더는 보기 힘들어서 말이지."
이를 앙다문 선우가 소책자를 뭉쳐진 사람들 속으로 던졌다. 얼결에 소책자를 받아든 사람은 형민이었다. 형민이 책표지에 인쇄된 제목을 큰 소리로 읽었다.
"산모수첩?"
사람들의 시선이 소책자를 든 형민에게로 돌아갔다. 형민이 눈을 반짝이며 하단에 박힌 이름까지 마저 읽어 내렸다.
"최경…."
재빨리 방향을 바꾼 경미가 수첩을 낚아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뒤따라 온 보나가 그것을 다시 빼앗아 들었기 때문이다. 보나가 수첩을 빠르게 넘겨 산부인과 방문 일자와 제가 들고 있던 초음파 사진의 날짜를 비교해 보았다.
"너였어?"
보나가 경미를 보았다. 그리고 원준을 보았다. 원준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한 쪽 발을 굴렀다.
"대체 이게 왜 여기…."
경미가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걸 지니고 다니는 걸 보면 애를 지울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뒷걸음질 치는 경미를, 선우가 그 두 배의 보폭으로 따라잡았다.
"훔친 돈은 이제 돌려놓는 게 어떨까?"
선우의 묵직한 저음이 강의실에 무거운 파장을 남겼다. 경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유지하는 침묵은 말보다 더한 긍정이 되었다.
선우가 경미를 내려다보았다. 경멸 섞인 조소와 함께였다.
"전부터 궁금했어. 돈이 없어질 때마다 과방에 있었던 사람이 따로 있는데 그 사람은 왜 의심을 받지 않을까 하고."
그러고 보니 그랬다. 사정없이 쏟아지는 공격에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 정작 그때 그 공간에 있었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
"두 번 다 그 자리에 있었다고, 제 입으로 말한 사람부터 의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너무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라 다들 계산에 못 넣은 건가?"
선우가 싸늘한 말투로 경미를 비꼬았다.
경미가 보나를 보았다. 보나가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경미에게 그랬듯이.
보나와 눈이 마주치면 경미는 늘 보나를 돕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다. 보나는 그런 호의와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친구라면 응당 그래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그러나 지금.
보나는 배신감 어린 눈으로 경미에게 닥친 상황을 관망할 뿐이었다. 물론 다른 상황에서도, 그러니까 경미가 보나를 속인 상황이 아니었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사람들을 속이고 싶었어도 연희를 이용하면 안 되지."
"전 연희가 범인이라고 할 생각은 없었어요! 보나가 그렇게 몰아간 거라고요."
경미가 급히 꺼내놓은 변명에 보나가 눈을 치켜떴다.
"어디서 뒤집어 씌워? 네가 연희를 본 것 같다고 했잖아!"
"내가 정확히 연희랬어? 연희랑 닮은 스타일이라고만 했잖아."
"그럼 단호하게 연희가 아니라고 했어야지! 안 그랬잖아. 그러고 보니까 작년에 없어진 돈도 네 짓 아니야? 그 사실 덮으려고 있지도 않은 사람 만들어낸 거고."
말을 잇던 보나가 생각을 더듬는지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다가 입을 크게 벌린 보나가 경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소리쳤다.
"그때 없어진 돈도 이런 목적이었니? 고작 그 돈이 없어서? 거지같네, 진짜."
경미의 얼굴이 수치로 붉어졌다. 사실이었다. 돈을 물 쓰듯 쓰는 보나 무리와 어울리다 보니 모아둔 돈이 전혀 없었다. 부모님께 알릴 수도 없었고 달리 빌릴 곳도 없었다. 더 쏟아지려는 보나의 막말을 저지한 사람은 선우였다.
"경미가 괜히 그랬겠어? 남자 쪽이 돈을 안 줬나 보지. 아님 자기 애 아니라고 잡아뗐던지."
선우가 경미를 이해하는 척 등을 토닥였다. 그러나 선우의 차가운 손이 닿을 때마다 경미는 흠칫 몸을 떨어야 했다. 다수의 비난에 대한 공포가 경미를 비틀고 쥐어짰다. 경미가 바라보는 사람은 이제 원준이 되었다. 정작 원준은 애꿎은 천장만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에요. 원준 오빠는 잘못 없어요. 그냥 제가 혼자서 해결해 보려다가…."
경미의 변호는 아무런 힘을 얻지 못하고 원준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아이 아빠가 원준이라는 점을 대놓고 확정지은 발언이었으니까.
"…부자라더니, 그 돈도 아깝다고 안 준거야?"
잠시간의 침묵 끝에 누군가 속닥인 소리가 파장을 일으켰다. 수치심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원준이 끝내 소리쳤다.
"그러니까 돈 준 달 때는 왜 안 받아서 이 꼴을 만들어! 애초에 피임 똑바로 하라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