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연희 집 근처에 있는 조그만 분식집에 갔다. 장대비가 와서인지 평소보다 사람이 적었다.
평소 연희가 자주 먹는 떡볶이와 순대, 튀김을 고루 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파마머리를 한 주인 아주머니가 초록색 플라스틱 그릇에 떡볶이를 가득 담아 내밀었다. 그릇을 싼 비닐봉지 위에는 군데군데 동그란 국물 방울이 맺혀 있었다.
"선배 입에 안 맞으면 어떡하죠?"
긴장한 얼굴로 선우를 보았다. 떡을 입에 문 선우가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맛없으면 다시 사달라고 할 작정이었는데, 아쉽게 됐네."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주방에서는 지글지글 기름 튀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테이블을 차지했던 손님들이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 열린 문밖에서 비가 쏟아지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연희의 귀에는 그 어느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선우와 마주하고 있는 지금, 바깥세상의 무엇도 연희에게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간 살아온 세상이 연희를 뱉어낸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떨어진 새로운 세상에, 오직 선우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을 마주할 때와는 달랐다. 혜진이나 동훈을 따로 만나면 편안하기만 한데 선우를 만날 때는 늘 긴장하게 되었다.
작은 표정 변화, 숨결 하나에도 집중하게 되었다. 어깨라도 부딪히면 괜히 소름이 돋고 시선이 떨어지면 옷매무시를 가다듬게 되었다.
모든 게 일상적이지 않았다. 매끄럽게 돌아가지 못하고 손톱 아래에 돋은 거스러미처럼 자꾸만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렇다고 보나나 원준처럼 피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아쉬울 지경이었다. 헤어지기도 전에,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를 속으로 헤아려 보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 선우와 있으면 그랬다.
이런 관계는 무슨 관계일까.
"왜 그렇게 보는데?"
너무 오래 바라봤나 보다. 연희의 시선을 의식한 선우가 제 뺨을 한번 쓸어내렸다. 귓가에 살짝 땀이 배었다. 연희가 선우 쪽으로 물컵을 밀어 놓아주었다. 선우가 그것을 생경하게 바라봤다. 그 작은 호의조차 낯설어진 사람처럼.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혼났어."
"누구한테요?"
"정 회장. 아니, 외할아버지라고 해야 하려나?"
선우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연희는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이번엔 또 어떤 방식으로 사람 숨통을 죄였을까.
연희가 심각한 얼굴을 하자 선우가 픽 웃었다.
"네가 혼났어? 왜 그런 얼굴이야?"
"그냥, 속상해서요."
선우가 뒤통수라도 한 대 맞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다음에 또 그럼 말해요."
"왜, 와서 혼내주게?"
"지금보다 더 맛있는 밥 사줄게요."
선우의 눈매가 휘어졌다. 속눈썹 끝에 어렸던 물기가 뚝 떨어졌다.
두 사람 앞에 놓인 접시가 반쯤 바닥을 드러냈다. 창밖에는 아직도 거센 비가 몰아치고 있었다. 덕분에 새로운 손님이 들지 않은 식당에서 연희와 선우만 의자를 차지한 채 마주 보고 있었다.
"여기도 충분히 맛있어."
"맛집이긴 해요. 혜진 선배랑 동훈 선배도 또 오고 싶다더라고요."
"걔들이랑도 여기 왔었어?"
"선배들이 이 근처 학원 다니잖아요. 여기서 몇 번 봤어요. 선배도 다음에 같이 만날래요?"
선우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더니, 입에 넣으려던 튀김을 도로 앞접시에 내려놓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픽, 웃었다.
"왜 그래요?"
"큰일 났다, 나."
"무슨 큰일이요?"
"…자꾸 욕심이 생기네."
"무슨 욕심요?"
"나만 좀 특별했으면 하는 욕심."
갈피를 잡지 못한 연희의 미간이 좁아졌다.
"무슨 말이에요?"
이번에는 선우의 미간이 좁아진다.
"넌 정말 눈치가…."
"네?"
선우가 한숨을 쉬더니 손을 내저었다.
"됐다. 말을 말자."
선우가 가늘게 뜬 눈으로 연희를 보았다. 말을 말자더니, 사실은 할 말이 아주 많은 모양이었다. 계속 그렇게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으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한테 뭐 얘기하고 싶은 거 있으세요?"
"그런 건 아닌데. 듣고 싶은 건 있어."
"말해요, 그럼."
대답을 기다리면서, 연희가 떡볶이 국물 속에 놓인 계란에 젓가락을 댔다. 노른자가 부서지기만 하고 잘 잡히지 않았다. 그러자 선우가 그것을 깔끔하게 집어 연희의 앞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뜻밖의 친절에 고개를 들었을 때는 선우가 자신을 또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입에 튀김 부스러기라도 묻었나? 연희가 손으로 제 입술을 슬쩍 훔쳤다.
찰나의 순간, 선우의 시선이 연희의 도톰한 입술 위로 떨어졌다. 시선은 다시 연희의 어깨로 옮겨졌다. 선우와 우산을 나눠 쓰는 바람에 조금 젖었던 부분이었다.
"넌 나한테 묻고 싶은 거 없어?"
"글쎄요…."
없는 건 아니지만, 물어봐도 되는지 알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선우의 지금 상황이나 감정 같은 것들. 감히 위로를 건네도 되겠느냐는 질문까지.
몇 년 전 서툰 위로의 말로 선우의 감정을 상하게 한 적이 있어 더욱 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네가 먼저 물어봐 주면, 나도 너한테 질문할게."
"네?"
"억울하잖아. 나만 이러고 있는 게."
꼬치에 꿴 어묵을 씹으며 생각했다. 대체 어떤 걸 물어야 한단 말인가? 다음에는 뭘 먹고 싶은지라도 물어봐야 하나?
자연스레 다음 만남을 생각하던 연희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꼭 물어봐야 할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진짜 궁금한 거 있어요."
"뭔데?"
선우가 테이블에 바싹 몸을 붙이며 서둘러 대답한다.
"선배 혹시…."
"응."
"혜진 선배 좋아해요?"
"뭐?"
"아니면 좋아질 예정이라든지."
선우가 황당하다는 양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내가 혜진이를 좋아하긴 하지."
흐음. 연희의 어묵 씹는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의자에 등을 묻은 선우가 저 홀로 팔짱을 꼈다.
"뭘 하든 똑 부러지잖아. 입 무겁고 약속 잘 지키고. 친구로서는 최고지."
"그런 거 말고요."
"특별한 의미로 묻는 거라면, 아니."
상체를 바짝 세운 선우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혜진 선배는요? 혜진 선배도 똑같이 대답할까요?"
"당연하지."
대답한 선우의 입술 양 끝이 조금씩 위로 솟았다. 선우가 커다란 손을 들어 제 입가를 가렸다. 잘 닦은 흑돌 같은 눈이 반짝이는 빛을 내뿜었다.
"그건 왜 묻는데?"
"이렇게 둘만 따로 만나도 되나 싶어서요. 이상한 소문에 시달리는 건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아…."
선우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바짝 세웠던 몸을 다시 뒤쪽으로 늘어뜨렸다.
"그런 이유야? 난 또…."
심드렁한 말에 공연히 짜증이 났다. 꼭 필요한 질문인데.
"그게 왜요…."
연희는 탁자에 고인 물기를 티슈로 닦아냈다. 물병 표면에 맺혔던 이슬이 흘러내린 것이었다. 틈 하나 없는데도 병 안에만 있어야 할 물은 이렇게 밖으로 흘러나오고야 만다. 어느새 작은 웅덩이를 이루도록.
모르는 사이에 많이도 고였다. 그리고 일단 이렇게 밖으로 나온 이상,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은 없다.
연희는 떠올렸다. 알알이 여며진 기억의 조각들을.
선우가 건네던 시원한 탄산수를. 선우와 함께 걸었던 축제의 거리를. 왁자지껄한 가운데 눈이 마주쳤던 술자리를.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무방비하게 잠든 모습을 보였던 귀갓길을.
때때로 선우가 보여준 종잡을 수 없는 변덕을. 가끔은 어설펐던 다양한 표정을. 보폭이 큰 걸음을. 필요한 순간마다 내밀어 주던 손을.
기억이 만들어낸 감정의 웅덩이, 그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머리가 어질할 정도로 생각했다. 선우의 눈에는 그저 입을 꾹 다문 연희가 보였을 뿐이겠지만.
"그래, 네가 무슨 별생각이 있겠냐. 괜히 나만…."
선우가 포기한 듯 허탈하게 웃으며 말함과 동시에, 눈을 크게 굴린 연희가 입을 열었다.
"좀 더 생각해 보고 질문할게요."
"뭐?"
"내가 선배한테 다른 마음이 있는지 생각해 보고 질문하겠다고요. 특별한 의미…로요."
덤덤하게 시작한 연희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뜻밖의 대답에 선우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졌다. 긴 눈매가 동그라미를 그리며 커졌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켁.
이윽고 선우가 사레 걸린 기침을 터뜨렸다. 어디가 막혔는지 넓은 가슴을 여러 번 두드리는 동안 연희가 선언했다.
"그러니까 선배는,"
…콜록.
"나한테 잠깐 잘해주지 말아 봐요."
"왜?"
힘겹게 기침을 진정시킨 선우가 네모난 휴지를 꼭 붙잡고 외쳤다.
"헷갈릴까 봐요. 요즘 선배한테만 자꾸 낯선 생각 드는 게 고마워서 그런 건지. 호감이 있어서 그런 건지."
선우가 찌푸린 얼굴을 왼쪽으로 기울이고 턱을 괬다. 다리를 달달 떨면서 다른 손으로는 탁자를 두드렸다. 비뚜름한 입매까지 보면 불만스럽다 못해 불량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게 왜 헷갈려? 너 고마운 사람 많잖아. 걔들하고 나하고 같은지 다른지만 알면 되지."
"선배는 돕는 방식이 워낙 남들보다 강렬하니까."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입 다물어 봐요. 벌써 생각 시작했으니까."
연희가 쫙 뻗은 손바닥이 선우의 입을 막았다. 손바닥에 닿은 입이 자꾸 웅얼거렸다. 입김이 스밀 때마다 간지러워서, 연희가 선우에게서 손바닥을 살짝 떨어뜨렸다. 그 사소한 움직임에 집중하던 선우가 연희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선 혜진이한테 꼭 물어봐. 그리고 내 말이 진짜면."
"진짜면요?"
어정쩡하게 멀어진 연희의 손바닥이 조금 떨렸다. 미약한 떨림마저 모조리 포착해 낸 선우가 웃었다. 그리고 연희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앞으로 난 걔들하고 따로 취급해 줘."
"얼마나 더 좋은 거 얻어먹고 싶어서 그러는데요?"
"먹는 거 말고. 내가 부탁하는 거 하나는 무조건 들어줘."
연희의 손을 자유롭게 풀어준 뒤, 선우는 새로운 휴지를 뽑아 입 주변을 깔끔히 닦아 냈다. 여러 번 눌러 닦인 탓에 연한 빛의 입술이 평소보다 붉어졌다.
"어떤 거요?"
"나도 생각 좀 해 보고."
"……."
상대가 갑자기 더없이 여유로워 보였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따지고 들지 않았다. 아까 선우가 하다 만 말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다.
"선배가 나한테 질문할 건 뭐였어요?"
"있었는데…."
"네."
"없어졌어. 조금 전에."
떡볶이 국물을 머금고도 우아하기만 한 입술이 길게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