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함께 본 연극은 나쁘지 않았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주제로 삼은 연극은 세련된 연출기법을 활용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심어놓았다. 다만 부모와 자식의 갈등이 나올 때는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사랑을 기반으로 한 다툼과 화해의 기회가 연희에게는 없었다. 선우가 옆에서 자꾸 부스럭대지만 않았다면 지난 시간을 반추하느라 우울해질 뻔했다.
공연 시간 내내 부산스럽게 굴던 선우는 막상 연극이 끝나자 엉덩이에 엿이라도 붙었는지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연희가 재촉하자 선우가 허탈한 말투로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을 던졌다.
"넌 집중 참 잘 하더라."
꼭 그렇지만은 않았는데, 생각하면서도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래야 과제를 하죠."
"그래도 그렇지, 어쩌면 그렇게 영화만 볼 수 있냐? 옆에 있는 사람 섭섭하게."
선우가 투덜거리면서 제 가방을 뒤졌다. 그러다가 손에 무언가가 잡혔는지"아! 찾았다!"하고 외쳤다.
가방에서 꺼내 내민 것은 작은 밴드였다.
"갑자기 뭐예요?"
"발 아픈 데 붙이라고."
구두 때문에 발뒤꿈치가 까진 걸 알아본 모양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노력한 게 무색해졌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왜 가만히 있어, 내가 붙여줘?"
장난스럽게 웃는 선우에게, 의식할 새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고마워요."
"뭐가?"
"그냥 다요."
자기 자신도 무시하던 통증을 알아보고 챙겨주는 것이, 눈을 마주하고 웃어주는 것이, 모호한 대답에도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 그 모든 것이 전부 다.
"하긴, 당연히 고맙겠지. 내 덕에 이번 과제 성적은 걱정 안 해도 될 테니까."
잘난 척하는 말이 얄미워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연희는 저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하는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로,
선우 혼자서 3인분 몫을 한 과제는 최고점을 받았다.
* * *
오랜만에 청룡각에 정 회장 일가가 방문했다.
오늘은 선우를 보지 못했다. 홀 매니저가 회장 일가 눈에 띄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던 것이다. 정 회장 일가가 식당에 들어설 때와 나갈 때는 주방 근처에서 숨어 있어야만 했다.
별일 없었을까. 없었으면 좋겠다.
일을 마칠 때까지 두 개의 문장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문 밖을 나서자 흐린 구름 때문에 하늘이 꽤 어둑했다. 굵은 빗방울이 창공을 뜯었다.
찰박.
빗물에 발을 미끄러뜨렸다. 우산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별도로 마련해 둔 간이 대기실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흐릿한 배경 속에 홀로 선명한 붉은 대기실이 섬처럼 보였다. 안에 꽉 찬 사람들은 도통 누가 누군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주차장에 즐비한 차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통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다만 정 회장의 차가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쏴하는 빗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연희는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먼 곳부터 가까운 곳까지, 다시 가까운 곳에서 먼 곳까지. 꼼꼼히도 훑었다. 그러다 가게의 끄트머리, 구석진 곳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빗방울이 지붕 처마에 맺히기 무섭게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일부는 땅으로, 일부는 누군가의 어깨 위로.
넓은 어깨의 주인은 처마 안과 바깥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서 있었다. 처마 밖을 빗겨난 어깨가 많이 젖어 있었다. 젖은 어깨의 주인이 연희를 돌아보았다.
그만은 또렷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아직 안 갔어요?"
선우가 내려뜨린 손에는 담배가 쥐어져 있었다.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상태였다. 선우가 웃었다. 웃느라 애를 썼다.
"선배, 담배도 피워요?"
"가끔."
의외였다. 이따금 흡연하는 사람들 속에 선우가 껴 있는 걸 보긴 했지만, 선우 손에 담배가 들린 적은 없었다.
"흡연 구역은 저쪽에 따로 있는데."
"아…."
선우는 흡연 구역으로 가는 대신 담배를 도로 담뱃갑에 넣었다. 그리고 연희의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나 우산 좀 씌워 줘."
"집까지 바래다 드려요?"
"왜 바래다주려고?"
그 위태로운 표정을 지울 수 있다면 어디든 데려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시간이 걸리더라도.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우가 하하, 웃었다. 억지로 낸 소리라 힘은 없었다.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그냥 요 앞 편의점까지만 데려다 줘."
고작 편의점을 가려고 이렇게 오래 기다렸을 리가.
연희는 캐묻는 대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의 신장에 맞추어 우산을 치켜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우가 우산 손잡이를 가져갔다.
불어 닥치는 바람이 셌다. 우산 속이어도 손끝이나 앞머리 쪽이 젖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가운데로 몸을 붙인 채 우산을 쓰고 걸었다. 선우가 너무 가까워서, 몸이 자꾸 닿아서 어색했다. 선우가 시답지 않은 농담조차 건네지 않으니 더욱 그랬다.
"오늘은 뭐 좀 제대로 먹었어요?"
"그냥 평소 같았어."
다 게워냈다는 얘기였다. 속을 달랠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선우가 평소에 들고 다니는 만능 가방도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선우는 이곳에 올 때 한 번도 그 커다란 학생용 백팩을 메고 온 적이 없었다. 격식을 갖춘 차림새에는 어울리지 않아서일까? 의지할 것들을 떼놓고 온 선우는 많이 위태로워 보였다.
"선배는 어떤 음식 좋아해요? 맛탕? 물만두?"
선우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갑자기 그건 왜?"
"선배가 식당에 오면 갖다 주려고요."
몰래 제 돈을 써서라도 선우가 좋아하는 걸 내주고 싶었다. 시키지도 않은 음식을 왜 내왔냐고 하면 서비스라고 둘러대면 되지, 뭐. 홀 매니저에게 부탁하면 그 정도는 해주지 않을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좋아하지도 않는 거 꾸역꾸역 삼키는 거 못 보겠어요. 오늘 나간 음식 중에서도 선배 먹을 만한 거 하나도 없었죠?"
"메뉴는 어떻게 알고?"
"주방 들러서 확인해 봤죠. 양방장어하고 어향동구가 메인이던데요?"
"네가 왜?"
시선이 집요해졌다.
"그냥 궁금해서요. 대단하신 회장님 댁은 뭘 먹나."
바람이 부는지 등허리로 떨어지는 비가 차가웠다. 연희가 등을 잘게 떨자, 선우가 우산을 뒤로 기울였다. 그러나 연희의 얼굴에 떨어지는 시선은 그대로였다.
"오늘 나온 음식을 내가 못 먹는 건 어떻게 아는데?"
"왜 몰라요? 비린 거 잘 못 먹고, 버섯 종류 잘 못 먹고."
선우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 바람에 연희가 우산 밖으로 밀려나자, 선우가 서둘러 연희 쪽으로 우산을 옮겨주었다. 다리는 그대로인 채 팔만 움직인 덕에, 이번에는 선우가 비에 젖어들었다.
"그걸 기억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연희가 선우의 옷자락을 붙잡아 우산 속으로 끌어들였다. 끌려온 선우가"기억력 좋네."하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연희 자신도 신기했다. 타인의 음식 취향이 어떻게 매번 기억에 남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이 났다.
"또 말해 봐."
"네?"
"또 아는 거 있으면 말해 봐. 나에 대해서."
고개를 돌리자 선우가 진지하다고 해야 할지, 간절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얼굴로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응석을 부리는 아이 같기도 했다.
"…붕어빵 좋아하는 거?"
"또."
"주량이 소주 세 병인 거."
언젠가 함께 술을 마신 자리에서 알게 된 점이었다.
"피곤하면 목이 잘 잠기는 거, 졸음을 쫓을 땐 책을 읽는 거, 버스에 앉을 땐 뒷좌석을 선호한다는 거?"
"또."
자신에 대해서라면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지 않나?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받아 어디에 쓰겠다고. 하지만 선우는 걸음조차 멈추고 연희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고만 있으니 뭐라도 더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연희가 신중하게 생각을 골랐다.
"…또라이인 거?"
철퍽.
선우가 들고 있던 담뱃갑이 빗물 웅덩이에 떨어졌다.
"아…."
선우가 우산대를 연희에게 주고 담뱃갑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피가 몰린 선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기분 따라 이유 없이 잘해줬다가 긁었다가 했던 거 기억하죠? 정말 또라이 같았어요."
"…너 친구 별로 없지? 그렇게 솔직해서야…."
"알면서 뭘 물어요."
연희가 어깨를 으쓱이자 선우가 피식 웃었다.
"괜찮아요. 그 정도면 착한 또라이니까."
진심이라는 걸 어필하는 의미로, 연희는 선우를 보고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위로 고맙다."
연희를 응시하던 선우가 평소보다 느리게 반응하며 응답해 주었다.
어색해진 연희가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습한 공기에도 목이 말랐다. 조금 전까진 멀쩡했는데.
"진짜예요. 저 많이 도와줬잖아요."
선우의 친절한 얼굴이 마냥 가식만은 아니라는 걸 이제 안다.
아닌데….
하며 선우가 고개를 숙였다.
평소처럼 잘난 척이나 하지. 상대가 민망해하니까 연희까지 민망해졌다. 선우가 발끝으로 땅바닥을 툭툭 쳤다. 소리 나는 간격만큼 갈증이 더해졌다.
"네가 나에 대해 아는 거, 또 있을까?"
그리고 선우 역시 갈증을 느끼는 듯했다. 텅 비어 있는 무언가를 연희의 대답으로 채울 모양이다.
"조용한 거 좋아하는 거."
"…또."
"자주 피곤해 하는 거. 그럼에도 무리하는 거."
선우를 바라보는 연희의 얼굴이 살짝 기울었다. 갓 피어난 꽃잎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얼굴 위에 우산 그늘이 졌다. 매끈한 콧날 위에 떨어진 빗방울을 보며, 선우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연희야."
"네."
선우가 연희를 불렀을 때, 연희는 막 우산을 접고 있었다. 편의점 바로 앞, 비가 닿지 않는 처마 아래였다. 편의점 문을 열려던 연희가 선우를 돌아봤다.
기껏 불러놓고 선우는 말이 없었다. 움직임 또한 없었다.
"안 들어가요?"
선우가 자리에 붙박인 것처럼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어두운 풍경에 녹아들 것처럼. 한편으로는 금방이라도 뒤돌아 도망가 버릴 것처럼. 하마터면 손을 뻗어 선우를 당겨올 뻔했다.
다행히 그러기 전에 선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걸음을 옮긴 것만으로도 선우는 연희와 숨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선우가 천천히 손을 내려 연희가 쥐고 있던 편의점 문손잡이를 잡았다. 잠깐 스친 손가락에 습기가 어려 있었다.
딸랑.
하는 문소리가 나기 무섭게 선우가 편의점 입구에 비치된 새 우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 오늘 밥 사줘라."
아직 식욕이 돌 것 같지는 않은데. 속이 쓰리기라도 한 걸까? 걱정스러운 얼굴을 마주한 선우가 다시 말했다.
"나 배고파."
다른 선택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선우가 입매가 고집스레 다물렸다.
"그래요, 그럼."
그 순간의 선우는 정말이지 허기져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