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축제 뒤풀이 날 본 후 오랜만에 만나는 선우였다. 갑자기 기업 인턴으로 뽑혀 일을 나가게 되었다고 들었다. 현진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였으나 J호텔과는 관련이 없는 곳이었다. J호텔 부사장인 선우 양아버지가 선우를 꺼려하던 것이 생각나 마음이 잠깐 무거워졌었다.
"여긴 웬일이에요?"
"동훈이가 여기 있다고 해서."
선우가 제 가방과 연희의 가방을 겹쳐 메고 연희 뒤를 따라왔다. 두 사람을 본 동훈이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뭘 또 굳이 학교에 오냐? 모처럼 쉬는 데 할 일이 그렇게 없냐?"
동훈이 이것저것 꺼내놓은 테이블이 복잡했다. 연희가 동훈의 맞은편에 앉자 잠깐 주저하던 선우도 동훈의 옆자리에 앉았다. 안부를 물을 틈도 없이 과제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지켜보던 선우도 가방에서 전공 책을 꺼내들었다.
"영어 논문 사례 꼭 인용해야 될까? 번역하려면 머리 아플 거 같은데."
"우리나라에는 연구 사례가 없어 보이는데요."
영어에는 자신이 있다고 해도 분량이 만만치 않은 데다 익숙지 않은 전문용어까지 번역하려니 쉽지 않았다. 설문조사 분석까지 더하려면 한시가 급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사례는 다 빼버릴까요? 어차피 비슷한 결론들인데."
동훈과 연희가 논문을 사이에 두고 한참 머리를 맞댈 때였다.
탁.
전공 책을 덮은 선우가 동훈을 향해 물었다.
"내가 좀 도와줄까?"
"됐어. 네 과제하기도 바쁘잖아."
"피곤해 보여서 그래."
"괜찮아."
"너 말고."
그 말에 동훈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연희의 안색을 살폈다.
"맞다. 연희도 요즘 힘들지? 수업 빌 때마다 근로하느라 쉴 시간도 없고."
"저보다 선우 선배가 더 힘드실 거 같던데요. 괜찮아요."
연희가 서둘러 말했다. 신세 진 것을 갚아도 모자랄 판에 더 얹고 싶지는 않았다. 선우가 더 피곤해지길 원하지도 않았고.
연희의 속도 모르고 선우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금방 해석해 줄 수 있어. 너희는 통계 결과 분석하는 것만 해도 힘들 거 아냐."
"그렇긴 하지. 통계 프로그램은 배운 적도 없는데 왜 당연히 해오라는 거냐고.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구만."
"통계 쪽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저 재작년에 통계 기초랑 응용 수업 들어뒀거든요."
"진짜?"
그 시간만 벌어도 어디냐면서 동훈이 반색했다. 연희의 어깨를 두 손으로 턱 짚고는 안마하듯 두드려댔다.
"역시 후배를 잘 둬야 해!"
감격에 젖은 동훈을 선우가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쉴 새 없이 퍼덕이는 동훈의 손을. 시선은 그 손이 자리한 연희의 어깨까지 떨어졌다.
"연희 후배를 알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동훈이 갑자기 양쪽 어깨를 꽉 쥐는 바람에 연희의 몸이 동훈 쪽으로 기울었다. 균형이 무너지기 직전, 선우가 동훈의 뒷덜미를 짚고 몸을 뒤로 끌어냈다.
"동훈아. 아르바이트 안 가도 돼?"
"오늘 아르바이트 빠지기로 했어."
"…그래?"
"근데 너야말로 이제 집에 가 봐야 하는 시간 아냐?"
선우가 손목에 찬 시계를 흘긋 보고는 동훈에게 물었다.
"이제부터 넌 뭐 할 건데?"
"연희 후배랑 밥 먹고 같이 논문이랑 사례 더 검색해야지."
선우가 고개를 젖히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평온해 보이는 것은 목 위 사정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손가락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바쁘게 퉁겨졌다.
"선우 너도 같이 먹을래?"
"좀 이따 나가야 해서 그럴 시간은 없는데."
"그러니까 더 여유 있을 때 보자니까."
동훈이 투덜대건 말건, 선우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테이블만 계속 퉁겼다. 급하다고 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결국 동훈이 논문 뭉치를 들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먼저 나가자."
동훈이 연희를 일으켜 세우더니 반대 방향으로 밀고 갔다. 엉겁결에 끌려가던 연희가 고개를 뒤로 돌려 선우에게 인사했다.
"먼저 가 볼게요!"
"걱정 마. 선우도 때 되면 알아서 갈 거야."
동훈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성큼 걸었다. 모처럼 만난 선우와 제대로 대화하지 못한 게 아쉬워, 연희가 한숨을 쉴 때였다.
"동훈아."
뒤에서 선우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넓은 복도를 가로지르는 음성이 홀로 선명했다.
"응? 왜?"
동훈이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만 대충 돌린 모양이 빨리 말하라는 재촉과 다름없었지만 선우의 말투는 더 빨라지지도, 그렇다고 느려지지도 않은 채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표정만은 평소와 달랐다.
"상대방을 함부로 건드리는 버릇 좀 고칠 수 없을까?"
일견 화나 보이기까지 하는 정색에, 동훈이 선우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선우가 천천히 걸어와 동훈의 코앞에 섰다.
"어?"
"너 은근 손 매워. 그게 아니더라도 기분이 썩 좋지 않고."
"아… 그랬어?"
동훈이 뒷머리를 긁었다. 원래대로라면 기분이 좋지 않을 건 또 뭐냐고 웃어넘겼을 텐데. 선우의 태도가 장난으로 넘길 수 없을 만큼 진지했다.
"미안."
마치 동훈이 혼나고 있는 것 같았다. 당황한 연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니. 저는 괜찮던데요."
사실 손이 매워서 가끔 아프긴 했지만 악의나 사심이라고는 없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동훈의 손버릇이었다. 반대로 타인이 제게 똑같이 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동훈이기도 했고.
"다행이다. 괜찮다는 사람도 있어서."
헤헤, 동훈이 속 좋게 웃으며 꺼낸 말에 연희가 다 민망해졌다. 정말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선우를 보자 마주친 까만 눈에 얼핏 서운함이 스쳤다.
"…그래도 그러지 마. 실례야."
동훈과 연희를 지나친 선우가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도서관을 나갔다.
"내가 많이 심했나 보네. 저 자식이 대놓고 저러는 걸 보니까."
동훈이 입을 쑥 오므렸다. 연희가 괜찮다고 손사래를 칠 때였다. 도서관 출구를 빠져나갔던 선우가 다시 입구를 통해 들어왔다. 아까보다 더 빨라진 걸음으로 연희와 동훈 앞에 섰다.
"으악. 복수하러 왔냐?"
한발 뒤로 물러선 동훈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선우는 연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피곤해 보이는 두 눈에 힘을 주더니 연희와 눈을 마주칠 때까지 기다렸다.
"연희야. 따라 해 봐."
선우가 손으로 제 입을 가리켰다. 그리고 모양 좋은 입술을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도. 와. 주. 세. 요."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가만히 있자니 입의 주인이 얼른 따라 하라고 눈빛으로 종용했다.
"도. 와. 주세요?"
듣고 싶은 말을 얻어낸 얼굴이 씨익, 긴 웃음을 내놓았다.
"봐줬다."
선우가 동훈 손에 쥐어진 논문을 빼앗듯 가져가버렸다. 순식간에 가벼워진 동훈의 양손이 바닥으로 털썩 내려앉았다.
"연희가 부탁했으니까 내가 도와줄게."
바쁜 거 뻔히 아니까 괜찮다고 거절하려는데, 선우가 먼저 입을 여는 바람에 말이 막혔다.
"그러니까 연희 너는 나한테 밥 사라."
뭐라고 더 말할 새도 없이 선우가 논문 뭉치를 꽉 붙들고 사라져버렸다. 어찌나 세게 움켜잡았는지 꽤 두꺼운 논문 가운데가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아니 밥은 내가 사도 되는데 왜 굳이 후배한테…."
동훈이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 *
"동훈이랑 한 발표는 잘 끝났어?"
"덕분에요. 선배는요?"
"나도."
선우의 인턴 기간이 어제까지였다. 밤늦게 선우가 연희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도 어제, 조별과제를 해야 하지 않겠냐며 약속을 잡은 것도 어제였다.
회식을 마치고 나오는 참이라던 선우의 말투가 묘하게 나른했었다. 연희까지 술을 마신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서일까? 아침에 지나치게 눈이 일찍 떠졌다. 약속 장소에는 30분이나 일찍 나왔고.
그곳에는 저와 마찬가지로 약속장소에 일찍 당도한 선우가 있었다.
오랜만에 본 선우는 그동안 본 것과는 다른 외양을 하고 있었다.
앞머리를 뒤로 넘겨 반듯한 이마선과 정갈한 눈썹을 훤히 드러냈다. 평소 잘 입는 검고 하얀 티셔츠 대신 연노란 니트를 입었다. 곧고 긴 다리는 핏이 딱 떨어지는 베이지색 슬랙스로 감싸여 있었다. 하얀 얼굴과 잘 어울리는 밝은 차림이었다.
그런데 지금 입기에는 좀 더운 옷 아닌가? 땀 날 것 같은데.
하지만 연희 역시 진땀이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평소 잘 신지 않던 '모양만 예쁜' 구두를 신은 탓이다. 오늘 개시한 치마가 바람에 날리는 것도 몹시 신경 쓰였다. 하지만 연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선우가 지은, 반가움을 가득 담은 웃음이 모든 불편함을 날려 보냈다.
"잘 끝내고 왔어."
'왔다'는 말, 무척 따뜻한 인사말이었구나.
별 뜻 없을 선우의 말이 혀끝에 달착지근하게 걸렸다. '잘 다녀왔다'는 식의 인사를 연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365일 중 360일쯤을 해외에 머물기에 어쩌다 마주칠 수밖에 없는 아버지도, 대학에 와서야 다시 만난 어머니도, 같은 담장 안에 머물되 다른 건물에서 생활하는 작은아버지 가족에게도 그런 인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회사에서 힘들지는 않았고요?"
"별로. 그래도 그렇게 물어봐주니까 좀 좋네."
선우가 서 있던 위치를 조금 바꾸었다. 연희에게 불어오던 바람이 선우에게 가로막혔다. 치마의 펄럭임도 멈추었다.
"이따 건물 안에 들어가면 돌려줘."
선우가 연희에게 재킷을 내밀었다. 눈으로는 치마를 가리키면서. 재킷을 허리에 묶자, 커다란 재킷에 치마의 팔락임이 가려졌다.
뿌듯한 표정을 한 선우가 공연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연희가 선우를 붙잡았다.
"다른 사람들 안 기다려요? 다들 여기서 만나기로 했다면서요."
"아…."
선우가 곤란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었다. 왜 그러지?
"걔들 오늘 안 올 거야. 다들 취업준비가 급하대서 내가 알아서 다 해준다고 했어."
연희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누구 마음대로…."
같은 연극을 본 뒤 사람별로 시점을 달리해 분석과 토론을 거치고, 기록해야 하는 과제였다. 혼자서 여러 사람 몫을 하기는 무리가 아닌가 해서 따지려는데 선우가 엉뚱한 말로 연희의 말문을 막았다.
"둘이서 보니까 꼭 데이트 같다. 그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