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방금도 그랬다. 다시 고개를 숙인 연희가 안주접시를 끌어와 부지런히 씹어댔다. 그 많던 음식이 금방 동난 이유였다. 마침내 더 먹을 것도 없어 고개를 슬쩍 들자,
또 선우와 눈이 마주쳤다.
술버릇이 한 사람만 잡고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인가? 이제는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이상한 건 막상 눈이 마주치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시선을 옮기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 분은 어떻게 친해지신 거예요?"
시선을 피한답시고 혜진을 향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나랑 선우는 중학교 동창이고, 동훈이랑 나랑은 고등학교 동창이자 재수학원 동기고."
선우는 대학은 단번에 붙었지만 고등학교를 재수한 케이스였다. 선우가 살던 지방 소도시에서는 상대적으로 큰 옆 동네의 명문고에 들어가기 위해 더러 그런 경우가 있었다고 했다.
"그럼 선우 선배랑 동훈 선배는 혜진 선배 덕에 알게 된 사이네요."
"그런 셈이지."
처음부터 잘못 엮였다면서 혜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특히 선우가 과 동기라는 걸 알았을 때는 정말 놀랐다고.
"그렇지만 혜진이 아니었어도 난 선우랑 친해졌을걸."
동훈이 선우의 팔에 얼굴을 비비며 엉겨 붙었다. 이어 선우를 껴안으려다가 혜진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그래도 동훈의 손은 여전히 선우를 향해 허공을 헤맸다.
"얘 술버릇이 사람한테 치대는 거거든."
쯧, 혀를 찬 혜진이 동훈의 뒷덜미를 더욱 세게 그러쥐었다.
"아우. 우리 사랑하는 혜진이! 우리 혜진이도 멋있지."
동훈의 애정공세를 혜진이 한 팔로 막아냈다.
"다들 취한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일어날까?"
고개를 가로저은 선우가 연희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자리에서 일어난 연희가 선우의 뒤를 따랐다. 열린 문틈으로 빠져나와 지하에서 지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랐다. 등 뒤에서 혜진이 동훈의 등짝을 때려가며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동훈 선배, 같이 부축해야 하지 않을까요?"
"괜찮아. 혜진이 힘 세."
혜진에게 가려는 연희를 선우가 붙잡았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혹시 선배도 취했어요?"
"아닐걸? 왜?"
"표정이 많아진 것 같아서요."
애써서 웃는 얼굴만 만들지 않는 게 좋았다.
"그랬나?"
선우가 고개를 몇 번 갸웃거렸다. 평소보다 고개를 움직이는 속도가 조금 느린 것 같다.
…좀 귀여웠다.
"좋았어요, 오늘."
솔직한 감상을 전하자 선우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입가를 늘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도."
생각보다 훨씬 더 좋네. 왜 매번 생각보다 좋지? 어이없게.
낮은 말소리가 연희에게는 잘 들리지 않았다. 눈을 좁히며 선우의 입모양을 관찰하다 보니 점점 고개가 선우 쪽으로 기울었던가 보다. 어느새 뒤로 고개를 뺀 선우가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계단 양옆에 붙은 할로겐 조명 때문인지는 몰라도 선우의 목 부분이 점점 붉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어 고개를 기울이자 선우의 몸이 움칠댔다.
"무슨 얘기 중인데 이렇게 심각하지?"
혜진에게 끌려와, 마침내 근처에 다다른 동훈이 선우에게 물었다.
"연희가 오늘 재미있었대."
선우가 자랑하듯 꺼낸 말에 연희는 흠칫 놀랐다. 제 이름이 너무나도 부드럽게 불린 까닭이었다.
거리로 나와서도 한참을 더 웃고 떠들었다. 기분 좋게 취한 사람들이 툴툴대고, 주저앉고, 실실대고, 이상한 말을 주절거렸다.
간판은 휘황찬란하고 바닥에는 밟힌 봄꽃이 흐드러져 있었다. 가로등이 흔들리는 나뭇잎에 빛을 새기는 가운데, 유쾌하게 취한 선배들이 술 냄새를 풍겼다.
그리고 연희는, 옆에 선 사람에게 자꾸만 말이 걸고 싶어져서 입술을 잘근거려야 했다.
"괜찮아?"
연희 옆에 선 선우가 안색을 살폈다. 저를 보는 까만 눈이 고요하기만 한데도 왠지 어지러웠다.
"조금 취한 것 같아요."
"넌 소주 두 잔 반에 취해?"
"다 보고 있었어요?"
담장을 옭아맨 장미 향 때문인지 코끝이 간지러웠다.
"먼저 갈게!"
혜진과 동훈이 나란히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지켜보던 선우가 연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데려다줄까?"
"어차피 같은 정류장이잖아요."
시간이 제법 늦어 정류장에는 사람이 없었다. 쌀쌀한 밤바람이 뺨을 스쳤다. 선우에게서 나는 술 냄새가 꽤 진했다. 하긴 뒤풀이 모임에서 교수한테 얻어먹은 술도 적지 않을 텐데, 자리를 옮겨 또 상당한 양을 마셨으니.
이러고는 뭘 바래다준다고. 내가 바래다주게 생겼네.
멀리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깜빡였다. 육중한 버스가 연희 앞에 끼익 멈춰 섰다. 버스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이게 막차일걸."
선우가 연희를 재촉하며 버스에 태웠다. 연희가 올라서기 무섭게 선우가 따라 올라섰다. 뒤쪽 빈 좌석에 연희를 앉히고는 자기도 옆자리에 앉았다.
"저도 이 버스 타는 거 알고 있었어요?"
"응."
그럼 예전엔 왜 먼저 갔어요?
연희가 속으로 삼킨 말을 들은 것처럼 선우가 말했다.
"그땐, 너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하긴. 분명 혼자 있고 싶긴 했다.
선우가 먼저 가버리기 전까지는 그런 줄 알았다.
"난 상대가 원하는 걸 잘 맞춰주는 편이거든."
선우가 버스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버스에는 라디오가 틀어져 있었다. 진행자가 누군가의 사연을 읊고 나서 신청곡을 틀어주었다. 자장가로 삼기 좋을 만큼 잔잔한 선율이었다.
선우가 눈을 감기에 금방 잠들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던가 보다. 음악이 끝날 때쯤 선우가 입을 열었으니까. 그래도 두 눈은 여전히 감은 채였다.
"근데…."
낮게 깔린 음성이 중요한 말을 할 것만 같았다. 연희는 귀를 기울였다. 선우가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왜 그랬어?"
"뭘요?"
"왜 준호한테 붕어빵 사줬냐고."
고작 이런 말을 하려고 그토록 비장했나 싶었다.
"고마워서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넌 고마우면 막 아무한테나 붕어빵 사주고 그래?"
붕어빵이 그렇게 대단한 음식이었나? 돌아보는데 또 덧붙였다.
"적어도 녹차 맛은 아니었어야지."
무슨 소리야?
알코올에 젖어 습해진 눈이 괜히 처량해 보여서 맞받아치는 대신 설명했다.
"선배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사줬죠. 혜진 선배랑 유진이도 사줬어요. 선배만 먼저 사라지는 바람에 못 사준 거지."
"혜진이도 사줬다고? 난 그런 말 못 들었는데?"
높아진 소리가 흥분을 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저만 빼놓고 백 년 산삼이라도 돌린 줄 알겠다.
선우가 설핏 눈을 뜨더니 연희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리고 음산하게 물었다.
"녹차 붕어빵이 그렇게 아무나 나눠줘도 되는 음식이야?"
대체 얼마나 취한 거야? 연희는 어린이를 대하는 마음으로 선우를 달랬다
"선배도 또 사 줄 테니까 그만 좀 해요."
정말로 애가 된 걸까? 선우가 턱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힘을 주더니 고집 어린 투로 말했다.
"싫어. 나는 다른 거 줘."
"…그러세요. 그럼."
"남들한테 안 준 거."
"그게 뭔데요?"
설마 몇 십만 원짜리 코스요리를 기대하는 건 않겠지? 오늘 들었던 선우의 집안이 떠오른다. 재계 순위가 정확히 어떻게 된다더라?
"사진."
"네? 무슨…."
뜻밖의 대답에 긴장한 어깨가 풀어졌다. 다만 무슨 사진을 말하는 건지 몰라서 머리가 복잡해졌다.
"준호가 준 거. 그… 학교 찍은 사진."
한 쪽 구석에 연희도 박힌 그 사진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왜 갖고 싶지?
황당하게 보고 있는데 선우가 한 손을 꼼지락대더니 새끼손가락을 천천히 세웠다.
"그거 너한테 한 장 밖에 없잖아. 맞지?"
"그렇…죠."
"그렇다고 준호한테 다시 뽑아 달라지는 말고."
"제가 뭐 하러 그걸 또…."
"약속해."
어릴 때나 하던 짓을 세상 진지하게 하고 있었다. 어디에 쓰고 싶든지 간에 당장 준호한테 말해서 파일로만 받아도 충분한 거 아닌가? 뭐 그리 귀한 사진이라고 이리 투정 부리듯 할까.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던 선우도 주량을 넘기니 별 짓을 다하는구나, 싶었다.
내민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살짝 걸어주었다. 내친김에 지장도 눌러주었다. 이번에는 엄지손가락에 힘이 좀 들어갔다. 버릇처럼 손바닥을 쫙 펼쳐 복사 준비를 했더니 선우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본다.
"너…."
"네."
"많이 취했구나?"
"……."
"연희 주량이 겨우 소주 두 잔 반이래요~"
선우가 소리 내어 웃었다. 뭐가 그리 웃긴지 어깨까지 잠깐 들썩일 정도였다. 그러다가 선우가 다시 눈을 감았다. 연희는 이미 맛이 간 사람에게 따지기도 뭐해 입을 다물었다. 대신 창에 비친 선우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긴 속눈썹이 만들어낸 그림자 탓인지 가볍게 찌푸린 이마 탓인지 무척 피곤해 보였다. 버스가 튀어 오를 때마다 자꾸 창문에 부딪히는 머리가 안쓰러웠다.
연희는 가방에서 실크 스카프를 꺼내 선우와 창문 사이에 끼워두었다. 사실 너무 얇아서 겹쳐 접었다고 해도 완충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뺨에 닿는 딱딱함이라도 나아지길 바랄 수밖에. 스카프의 적갈색 빛깔이 선우의 얼굴까지 드리워져선지 창백하기만 했던 뺨이 조금 발그레해 보였다. 아까 붉어졌던 목덜미를 닮은 빛깔이었다.
조금 뒤 선우가 원래의 하얀 빛깔을 되찾았을 때는, 편안한 숨소리를 규칙적으로 내뿜고 있었다. 차창에 부연 입김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딱딱하기만 할 유리창이건만, 호흡이 닿은 면적만큼은 부드럽고 포근해 보였다.
* * *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동훈이 말한 휴게실은 중앙도서관 1층에 위치해 있었다. 중앙도서관 3층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는 연희를 동훈이 일부러 찾아온 것이었다. '광고심리학' 시간에 두 사람이 함께 할 발표 과제 때문이었다.
근로 시간이 끝나자마자 휴게실로 향했다. 바삐 걸으며 어깨에 흘러내린 가방을 추스르려는데 누군가 가방을 쓱 앗아갔다. 뒤에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절로 입매가 풀어졌다. 익숙하고도 반가운 체향에 긴장이 녹아내린 탓이다.
"선우 선배!"
"왜 이렇게 활짝 웃지? 그렇게 반가운가?"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