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그래도…. 우리 말고 다른 사람도 연희 언니 혼자 다니는 거 봤을 수도 있잖아. 선우 오빠가 거짓말한 거라고 누가 얘기하기라도 하면…."
주변을 한번 살핀 유진이 준호에게 한껏 소리 죽여 말했다.
"나설 사람들이었으면 진작 나서 주었겠지. 보나 선배가 연희 선배한테 누명 뒤집어 씌웠을 때."
"그런가?"
"사람들, 생각보다 훨씬 더 남 일에 간섭하는 거 귀찮아해. 재밋거리로 구경하는 거나 좋아하지."
"준호 말이 맞아."
혜진이 동의한다는 의미로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연희는 궁금해졌다.
"너희는 왜 날 의심 안 해? 혜진 선배도 그렇구요."
어떻게 나를 믿는 거니.
연희에게는 믿음보다 불신이 익숙했다. 하다못해 가족에게서도 넉넉한 믿음을 얻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얼마 전까지 낯설기만 했던 타인이 내보이는 믿음은 낯설고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보나 말대로 내가 수업 중간에 과방에 다녀왔을 수도 있잖아."
그러자 준호와 유진이 말도 안 된다는 양 크게 웃었다.
"축제 때 저 위해서 나서주셨을 때 언니 성격 다 알아봤거든요?"
"나도.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던 선배가 남의 돈을 쉽게 탐할 리 없잖아."
"우리는 무조건 언니 편이니까 절대 기죽지 마요!"
혜진도 좀 전까지 들여다보던 휴대폰을 내려놓고 말을 보탰다.
"그런 의미에서 축제 뒤풀이 같이 가자. 가서 당당하게 즐기고, 넌 꿇릴 거 없다는 것도 한 번 더 알려주고."
축제 끝난 지가 일주일은 된 거 같은데 아직도 뒤풀이를 안 했나? 어리둥절해 하는 얼굴을 본 혜진이 설명했다.
"우리끼린 진작 뒤풀이 끝났는데 윤 교수님이 다음 주 저녁에 다 같이 밥 사주신대."
"학과장님요?"
축제를 핑계로 이루어지는 세 번째 뒤풀이라고 했다. 축제 끝난 날 한 번, 그 며칠 뒤 그 자리에 없던 사람들까지 불러 모아서 또 한 번, 그리고 이번에는 학과장과 함께.
"윤 교수님이 부르는 행사는 웬만하면 와야 돼. 학과 행사 참여 안 하는 거 대놓고 싫어하시잖아. 으~ 꼰대!"
온몸을 부르르 떤 혜진이 연희의 팔을 붙들고 흔들었다.
"고생 많이 했는데 밥이라도 푸짐하게 얻어먹고 오자."
하지만 이미 수많은 행사를 빠져본 연희에게는 새로울 것 없는 타격이었다.
"찍혀도 상관없어요. 고생이랄 것도 없었고요."
"선우 말로는 아니던데? 너 축제 때부터 발목에 문제 심했다며. 그런 몸으로 하루 종일 뛰어다니고, 무거운 거 들고."
우는 혜진에게 꽤 많은 이야기를 했나 보다. 어디까지 이야기한 걸까? 축제날 버스정류장까지 함께 걸었던 것도, 함께 붕어빵을 나눠 먹은 것도 알고 있을까?
별것도 아닌 얘긴데 남들은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의 짧은 산책은 두 사람의 기억으로만 남았으면 좋겠다고.
"네가 그날 선우한테 붕어빵도 사 줬다며? 신세는 꼭 갚겠다고 그러던데?"
그러나 혜진은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연희는 괜히 실망스러워졌다.
"오늘 일이 붕어빵 값이면 대단한데요?"
"맞아요. 갑자기 짠! 나타나서는 멋있게 다 해결해주고 갔잖아요."
준호와 유진의 얘기에 혜진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게. 아무리 그래도 오늘 학교에 나올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빠져나왔지?"
"왜요? 선우 형한테 무슨 일 있어요?"
"애들은 알 거 없다."
고개를 저은 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후식은 연희가 샀다. 선우와 함께 먹었던 붕어빵이었다. 고마운 사람들의 품에 붕어빵 봉투를 하나씩 안기니 뿌듯해졌다. 동시에 자리에 없는 사람이 잠깐 떠올라 아쉽기도 했다.
강의실에 돌아오니 선우가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 눈이 커다래진 연희를 보며 선우가 웃었다.
"왜 놀라지?"
원래 선우도 듣는 수업이긴 했지만 아까 선우가 급히 자리를 뜬 걸 생각하면 놀라워 할 일이 맞았다. 무척 다급해 보였으니까. 그 직전까지 연희의 발목을 살펴준 게 미안했을 정도로.
"집에 간 거 아니었어요?"
"그럴 생각이었는데, 막상 오니까 다시 가기가 싫어져서."
선우가 이를 드러내며 호쾌하게 웃었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볼펜을 휘휘 돌렸다. 기울인 시선이 연희 손에 들린 붕어빵을 향했다.
"또 먹네? 맛있었나 봐?"
"네. 하나 드실래요?"
선우가 부드럽게 풀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가 붕어빵을 꺼내는데 준호가 들어왔다. 연희와 똑같은 붕어빵 봉투를 들고. 선우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혹시 같이 가서 샀어?"
"네. 연희 선배가 사줬어요. 하나 드릴까요? 두 개 먹고 네 개 남았거든요."
탁!
선우의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던 볼펜이 회전을 멈추었다.
"…여섯 개나 사줬어?"
"네. 많이 배고프시면 두 개도 드릴 수 있어요."
준호가 주섬주섬 붕어빵 봉투를 뒤적이는데, 선우가 준호가 든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거 무슨 맛이야?"
"녹차 크림 맛요."
툭.
선우의 손가락 사이에서 볼펜이 떨어졌다.
"안 먹어."
"왜요? 맛있는데."
"…됐다."
나라 잃은 표정이 된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연희와 가장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가 앉았다.
왜 저래 또?
"참! 줄 거 있어서 들른 건데 잊을 뻔했네."
준호가 가방에서 사진을 꺼내주었다. 매끄러운 사진 용지에 인쇄된 그것은 아까 보나에게 보여주었던 증거사진 1호였다.
"고마워."
"잘 나왔지? 선배 주려고 하나 뽑아 왔어."
손가락 두 마디보다 작게 나온 자신의 모습이 예쁘고 말고 할 건 없어도, 파스텔 톤 캠퍼스 풍경에 그럭저럭 잘 녹아들어 보이긴 했다.
근데 왜 자꾸 뒤통수가 따갑지?
뒤를 돌아보니, 이쪽을 보고 있던 선우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선우가 고개를 돌리는 통에 오래 바라보진 못했지만.
대체 무슨 일로 심사가 비틀린 건지 모르겠다.
쉬는 시간에 말을 붙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못 한 감사 인사도 하고, 무엇이 그 비위를 건드렸는지도 묻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은 생각에 그치고 말았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선우가 가방을 들고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에 가장 좋아하던 수업인데도 그랬다.
후회했다. 여기에서 또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으면 선우 몫도 하나 사다 줄 걸 그랬다고.
선우가 증언한답시고 내민 핑계가 어떤 파장을 일으키게 될지도 모르고 그랬다. 그렇게 시작된 소문이 졸업 후까지 따라붙을 줄도 모르고.
미리 알았으면 조금 덜 고마웠을 거다.
* * *
"지연희, 선우한테 차였다며?"
왜 잊고 있었을까. 학과 사람들이 남의 일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를. 특히 남녀 사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는 것을.
사실 완전히 예상 못 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이 정도로 길게 갈 줄 몰랐고 이 정도로 열렬할 줄 몰랐을 뿐이지. 우선 대상이 과내 '공식 연예인'인 선우와 '공식 은따'인 연희인 것부터가 문제였다.
게다가 그냥 차였다는 수준이면 '학과 내 누가 누구에게 고백했다 차였더라' 하는 수많은 일화 중 하나로 남겠지만, 소문 속 연희가 너무 처절해 보였다는 게 문제였다.
연희가 고백하기 위해 선우를 기다렸다는 시간이 1시간에서 5시간이 되더니, 선우에게 전화를 걸어 한 번만 만나달라고 애걸한 날짜는 하루에서 일주일이 되었다.
도둑 누명을 벗은 대신, 지질함의 대명사가 되게 생겼다.
"그게 왜 지질한 거야? 애절한 거지."
선우가 연희를 감싼답시고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직접 찾아가 정강이라도 차주고 싶었다.
"언제부터 좋아한 거래? 좀 안 됐다."
너희들이 하는 말 되게 잘 들리거든?
"그날 차이고 펑펑 울었다잖아. 오죽 불쌍해 보였으면 선우 선배가 연희 대신 나서서 증언도 해주고 없어진 돈도 내주겠어?"
"돈은 연희랑 상관없는 문제라며? 그냥 집행부 후배들 고생하니까 내주는 거겠지."
"그래도 그날 선우 형이 연희 누나 되게 안쓰럽게 쳐다보던데요."
안 들리는 데서 말을 하던지, 아니면 차라리 대놓고 물어보던지. 하긴, 사람들도 직접 묻고 싶기는 한데 그럴 수 없어 답답해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말 한마디 안 나누다가 새삼 이런 화제로 대화를 트는 것도 우습긴 할 것이다.
문제는 직접 질문이 들어오지 않으니 연희 또한 '오해'라고 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
짜증이 난다. 그런데 짜증을 내도 되나?
몰라. 짜증이 나는 걸 어떡해. 화내도 된다고 했잖아. 누가 그랬지?
…선우 선배가.
선우 선배 욕하고 싶다. 선우 선배한테.
정신을 차려 보니 하루 종일 선우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오 연희 후배!"
강의실에 들어오던 동훈이 연희를 발견하고는 씩 웃었다. 연희 옆에 철퍽, 큰소리를 내며 앉더니, 가방에서 교재를 꺼냈다. 혜진 덕에 안 사실인데, 동훈과 연희는 전공 필수과목인 '미술비평론'과 타과 전공과목인 '광고심리학' 수업이 겹쳤다.
"나 학교 빠진 사이에 엄청난 대사건이 있었다면서?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
"혜진 선배랑 선우 선배가 제 누명 벗겨주신 거 말씀하시는 거면…."
"아니, 그거 말고."
설마.
"선우한테 고백한 거 소문났다며?"
대놓고 말하는 한 사람이 여기 있었다. 동훈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쏠렸다. 사방에서 미어캣처럼 귀를 쫑긋 세우는 환시가 보였다. 차라리 대놓고 말했으면 싶었던 게 무색하게 심히 민망했다.
"선배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좋게 생각하면 지금이 공개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기회라서 연희도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뒤에 이어서 할 말이 없었다. 선우가 이미 한 말을 엎으면, 선우가 그날 한 말이 모두 거짓말이 되는 거니까. 따지고 보면 거짓말이 맞긴 하지만…. 모두 거짓말이었다고 하면 선우도 곤란해지는 걸까?
"에이, 부끄러워하기는."
연희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자, 동훈이 위로하듯 연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남들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선우한테 차이는 게 뭐 대수라고. 대놓고 말 안 해서 그렇지, 여기 그런 애들 많아. 부끄러워할 거 없어."
몇몇 붉어진 얼굴이 아래를 향했다. 선배도 있고, 동기도 있고, 후배도 있고. 다 해 먹었네, 선우 선배.
눈이 마주친 누군가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머쓱하게 앞머리를 내렸다. 그녀 역시 귓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래서 부정하는 게 아니고요."
"차인 게 쉽게 인정이 안 돼서 그래? 괜찮아. 나도 많이 차여봤는데 언젠간 다 담담해져."
앞에 앉은 누군가의 뒤통수가 아래를 향했다가 다시 위로 올라왔다. 동훈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는 듯.
"힘내라! 연희 후배!"
동훈이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외쳤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 시간, 얼마나 걸리는데요? 저는 당장 내일 사람들이 기억상실증에 걸렸으면 좋겠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