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16)화 (17/98)

<16>

"기어이 연희가 범인이라고 우기고 싶은 거 같은데 정리해서 대답할게."

선우가 보나의 얼굴 바로 앞에서 손가락을 활짝 펼치더니 하나씩 접어가며 말했다.

"첫째, 난 연희가 불쌍해서 그러는 게 아니야. 둘째, 딱 봐도 하루 이틀 된 발목 상태 아니고, 셋째, 과방에 갈 시간이 있었던 사람은 연희 말고도 차고 넘쳐. 그리고 넷째,"

선우는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하면서 보나에게 바싹 다가갔다. 보나를 보는 눈빛이 벼린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

"내가 그렇다는데 다른 증거가 더 필요할까?"

사람을 압도하는 차가운 기운이 흘러넘쳤다.

'누가 말하느냐', 즉 '어떤 평판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이야기하느냐' 하는 권위와 지위의 문제. 이는 지금껏 보나가 연희를 매도할 때 가장 확실한 무기로 이용하던 것이었다.

연희가 보나를 이길 수 없듯, 보나는 선우를 이길 수 없었다.

보나의 기세가 순식간에 꺾였다. 선우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피어났다. 언젠가 본 적 있는 위압감을 품은 미소였다.

"네 말대로, 몇 푼 안 되는 돈은 내가 기부하는 걸로 할게. 확실하지도 않은 목격담으로 함부로 남 의심하는 짓은 안 했으면 좋겠다."

더없이 싸늘해진 분위기에 선우가 쐐기를 박았다.

"전에도 연희가 비슷한 누명을 썼다던데. 누가 이렇게 창의력이 없는 건지 정말 궁금하다. 다들 안 그래?"

* * *

"다음 강의 안 늦었어? 얼른들 가서 볼 일 봐!"

혜진이 상냥한 말투로 사람들을 쫓아냈다. 유진과 준호는 구석에 남았다. 정확히는 혜진에게 붙들린 거였다. 그리고 선우는,

"내가 푼 붕대니까, 내가 다시 수습할게."

연희 앞에 주저앉아 다시 발목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압박 붕대를 감는 손길이 세심하고도 꼼꼼했다. 긴 손끝이 발목에 살짝살짝 닿을 때마다 아프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했다.

직접 하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혀끝까지 바싹 굳어버렸다.

"병원에 꼭 가라."

붕대 처치를 끝낸 선우가 담백하게 일어섰다. 그러면서도 부은 발목에서 눈을 떼지는 못했다.

"아까 왜 그런 말을 한 거예요?"

"뭐 어때? 어차피 거짓말인데. 아무거나 갖다 붙이는 거지."

"놀리려고 그런 거죠?"

"그러게 힘들 때 왜 혼자 버티려고만 해. 진작 도와달라고 했으면 나도 심술 안 부리잖아"

돌아오는 말이 불퉁했다. 본인 말로 심술을 부렸다고 하지만 '심술궂음'보다는 '섭섭함'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나한텐 도와달라고 해 보라며, 너는 왜 못하는데?"

막상 겪어보니 도와달라는 말도 쉬운 게 아니었다. 차라리 남의 일에 대신 나서는 게 더 쉬울 것 같았다.

부탁하지 않았어도 선뜻 도와준 이들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누군가 곁에 있어 다행인 날이었다.

그래도 선우는,

"선배는 학교도 못 나왔었잖아요. 어떻게 날 도와요?"

자신의 일만으로도 머리가 아픈 사람이 아니었나.

"혹시 알아? 부르기만 하면 앞뒤 안 따지고 달려 나올지."

"내가 뭐라고요."

"봐봐. 지금도 나와 있잖아."

어깨를 으쓱한 선우가 혜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혜진의 귓가에 대고 몇 마디를 속삭이더니 그대로 자리를 떠버렸다. 인사도 없이.

그냥 가버린 건가?

잠깐 멍하니 서있던 연희가 선우가 사라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곧 혜진에게 붙들렸다.

"선우 급히 뛰어갔을 걸? 할 말 있으면 나중에 따로 해"

"…네."

"그나저나 선우가 예리한 거니, 내가 둔한 거니? 나는 네가 아픈지 전혀 몰랐어."

"제가 이런 거 좀 잘 숨기는 편이에요."

원래 잘 숨기는데 들켰다.

한 사람에게.

"연희야, 힘든 건 숨기지 말고 말을 해야지. 그래야 돕지."

혜진이 안쓰러워하는 얼굴로 혀를 찼다. 그러다가 연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힘내. 뒤에서 무슨 추리들을 해댈지 모르겠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괜찮아요. 전에도 있었던 일인데요."

"그놈의 괜찮다는 말 좀 그만하고!"

연희가 생각한 '추리'의 범위는 학회비에 대한 것이었다. 혜진이 생각한 '추리'는 영 다른 쪽이었지만.

* * *

"조용히 좀 해줄래? 머리가 아파서."

보나의 앙칼진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떠났다. 강의실에 있던 사람들 일부는 다른 강의실로 가고 일부는 과방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보나 주변을 맴돌았다. 보나가 우기는 바람에 공연히 자기들까지 못할 짓을 한 것 같다는 말, 선우와 연희가 그렇게 가까운 줄 몰랐다는 말, 이전에도 연희가 범인이라기엔 섣부르게 판단한 면이 있었다는 말.

자기들 나름대로는 보나를 의식해 작게 웅성거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보나에게는 한마디 한마디가 확성기에 대고 떠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풀이할 사람이 필요했다.

"경미 너한테 정말 실망이다."

"응?"

갑작스러운 지탄에 경미가 눈을 크게 떴다.

"넌 어떤 경우에도 내 편이라고 하지 않았어?"

보나의 가장 큰 재주는 사람을 골라내는 능력이었다. 누구와 잘 지내야 득이 될지, 누구를 공격해야 뒤탈이 없을지.

"미안. 오늘은 내가 나서기가 좀 그래서."

보나의 예상대로, 경미는 잘잘못을 따지는 대신 사과부터 했다.

"뭐가 좀 그런데?"

"2년 전에 학회비 없어졌을 때 금고 앞에서 연희를 봤다고 증언한 사람도 나잖아. 네가 시켜서."

누가 듣기라도 할까, 경미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말조심해. 내가 너한테 억지로 강요했니? 그냥 본 대로 말하는 게 좋겠다고 권유한 것뿐이잖아. 네가 먼저 연희랑 비슷한 애를 봤다고 하지 않았던가?"

보나 역시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그렇지. 여하튼 그때도 내가 유일한 증인이었는데 이번에도 또 내가 연희랑 닮은 사람을 봤다고 나서면 이상하지 않을까? 꼭 내가 연희만 따라다니는 것 같잖아."

"나 혼자 이상해지는 건 괜찮다는 거야?"

"아니. 안 괜찮지."

보나의 말은 경미와 보나가 함께 비난을 받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보나 자신은 빠져나갈 수 있도록 경미 혼자 화제의 증인으로 남아야 했다는 말이었다.

"얼굴만 정확히 확인해 놨어도 좀 더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었는데. 너도 뒷모습만 봤다고 했지?"

"응. 미안. 내가 그때 바로 뒤를 쫓았어야 했는데. 그럼 너도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경미가 순하게 대답하는 동안 보나는 경미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기르는 개의 충성도를 가늠해 보듯. 당근이 필요할 때인지 채찍이 필요할 때인지 계산하면서.

이윽고 보나가 입을 열었다.

"연희랑 잠깐 다닌 중에 내가 유일하게 좋았던 점이 뭔지 알아?"

"……."

"경미, 널 만나게 된 거였어."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경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내가 너랑 대화나 한 번 해봤겠니? 알잖아. 나 촌스럽고 둔한 애는 상대 안 하는 거."

"…응."

사실이었다. 학기 초, 홀로 다니던 경미에게 가장 먼저 아는 척을 해준 사람이 연희였다. 같은 강의를 들으면서 가까워진 사이라지만 그 강의는 보나도 들었고 다른 친구들도 들었다. 그 중 경미를 챙겨준 사람은 연희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보나가 연희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연희 옆에 앉아서 자꾸만 경미를 따돌리려 들었다. 경미는 무서워졌다. 그럼 난 이제 누구랑 다니지?

경미의 두려움을 알았던지, 연희는 보나와 함께 다닐 때 경미가 소외되지 않도록 항상 신경을 썼다. 그러나 함께 어울려 다닐 때도 보나는 경미에게 말 한 번 건 적이 없었다. 보나가 경미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 때는, 연희와 거리를 두기로 작정한 순간부터였다.

"경미 너, 나랑 다니면서 얼마나 사람다워졌니? 그 웃기는 곱슬머리도 펴고 어설픈 앞머리도 정리하고. 옷차림도 나 따라 하는 거 다 알고 있어. 예전에 연희 스타일 따라 할 때보다 훨씬 나아진 거 알지?"

"…고마워."

"내가 너한테 연희 버리고 내 쪽으로 오라고 했니? 아니잖아. 네가 연희 대신 날 선택한 거잖아."

연희를 선택했다간 꼼짝없이 함께 비난받을 분위기를 만든 사람이 보나였다. 그래서 경미는 보나를 택했다. 연희는 경미보다 당당하고 매력적이니까 금방 또 좋은 친구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합리화하면서.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 연희는 학과에서 외떨어진 존재가 되어 있었다. 보나의 넓은 인맥은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는 통로가 되었다.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은 친구에 대한 악감정과 차마 티 내지 못했던 열등감, 정제되지 않은 분노가 소문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연희가 완전히 혼자가 되었을 때는 미안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제 와 후회해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원준 오빠 일이 아니었어도 나는 연희 대신 너를 선택했을 거야. 알지?"

경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나는 그 모습이 참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잘 하자."

경미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보다 힘차게.

보나가 웃었다. 그래봐야 별것도 없을 거면서 대답은 잘도 하는 모양이 우스워서. 조금의 관심만 보여도 아무나 반기는, 버려진 똥개 같아서.

"내일 애들한테 얘기해. 너도 그날 과방 근처에서 연희를 봤다고. 알았지?"

경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경미가 떠들어봤자 제대로 들어주는 이는 없을 테지만, 보나 자신이 혼자 우스워지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 * *

대학 후문 근처 시장 골목에 자리한 선짓국 집에 자리 잡자마자 유진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런데요."

"응?"

"선우 오빠는 아까 왜 그렇게 말한 걸까요? 그날 선우 오빠는 언니가 있던 벤치 근처에도 온 적이 없잖아요."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던 게 마음에 걸리는지, 유진의 표정이 어두웠다.

"어쨌든 선우 형이 그렇게 말해줘서 뒷말이 쏙 들어갔잖아. 우리만 계속 입 다물면 돼."

준호가 단호히 말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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