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15)화 (16/98)

<15>

뒤를 돌아보니 혜진이 양 쪽에 준호와 유진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1학년인 준호와 유진은 이 강의를 듣지 않았다. 그러니 강의가 끝날 시간을 계산해 일부러 찾아온 거라고 봐야 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날 그 시간에, 저랑 유진이가 연희 선배 봤어요."

준호가 입을 열자 혜진이 잘했다는 듯 준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맞아요. 언니, 그날 학생식당 앞 벤치에 있었잖아요. 맞죠?"

"여기 사진도 있어요.

두 사람은 마침 「매체 미학」 과제를 위해 캠퍼스 사진을 찍는 중이었다고 했다. 준호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야. 그렇게 대충 보여주면 어떻게 알아? 자세히 좀 보여줘 봐."

잽싸게 다가온 보나가 준호의 휴대폰을 붙들었다. 과연, 사진 속에는 푸르른 잔디를 배경으로 연희가 찍혀 있었다. 그것도 선명하게. 배경이 주가 되는 사진이었지만 그 속에 찍힌 작은 인물이 연희임을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정확히 보나가 말한 옷차림으로 학생 식당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 사진이 그때 찍은 거라는 건 어떻게 증명할 건데?"

당황한 보나가 준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준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 나무에 현수막 걸어놓은 거 보시면 그날 있었던 행사 날짜 나와 있는데요. 행사 끝나자마자 현수막 바로 내리는 것도 봤고요."

유진도 말을 보탰다.

"뒤쪽에 찍힌 공대 시계탑에 시간도 나와 있어요."

시계는 12시 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부터 과방까지 거리가 얼마나 먼데요. 3분 만에는 절대 못 와요."

이 기가 막힌 우연이 보나에겐 예상치 못한 복병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접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지켜보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여기서 진다면 면이 서지 않았다.

"내가 정확히 12시 정각이라고는 안 했잖아. 생각해 보니까 그보다 더 늦은 시각이었던 것 같아."

보나는 어물어물 시간을 뒤로 물렸다.

"연희가 거기에서만 내내 있었던 것도 아닐 거잖아. 잠깐 있다가 자리를 떴는지 말았는지 알 게 뭐야?"

"적어도 선배가 말한 시간 동안에는 있었을걸요."

준호와 유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네가 어떻게 알아?"

"그날 저희가 사진 찍느라 그 주변을 꽤 오래 돌아다녔거든요. 그동안 연희 선배는 계속 그 자리에 있었고요. 그러다가 1시 다 되서 사회대 건물에 들어가시는 거 봤고요."

아마 다음 과목인 교양 수업을 들으러 갔을 것이다.

"과제하기도 바쁜데 중간 중간 연희를 계속 봤단 말이야?"

"…네."

조금 망설이던 준호가 대답했다. 연희는 그때 책을 읽느라 준호와 유진이 그 근처에 있는 것도 몰랐다. 생각지도 못한 두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주니 고맙고도 얼떨떨했다. 단 한 번도 기대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너희들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불안한 낌새가 느껴지는 보나의 날카로운 반문에 뒤이어 나선 목소리 또한 당연히 기대하지 않았고 말이다.

"왜 말이 안 되지?"

"선우 오빠?"

연희의 등 뒤에 바짝 붙어선 선우를, 보나가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후배면 몰라도 선배까지 발 벗고 나서니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불안한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나도 그날 연희 봤거든. 바로 근처에서."

선우는 연희가 아닌,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왜 이래요? 나 골탕 먹이려고 편먹은 사람들처럼."

보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연희의 뒤에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서 있는 광경이 낯설었다.

"연희 누명을 벗겨주는 게, 왜 널 골탕 먹이는 게 되는 거지?"

연희를 범인으로 몰아야 할 이유라도 따로 있나?

적막한 분위기에서 중얼거리듯 던진 말은 울림이 컸다. 모두의 귀에 닿을 정도로.

"그런 게 아니고…."

"그런 게 아니면?"

"생각해 보니까 제가 연희를 본 시간을 완전히 착각한 것 같아요. 훨씬 더 뒤였던 겉 같아요."

보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어떻게든 사라진 돈과 연희를 연결 지으려는 몸부림이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이렇게 쩔쩔매서야, 거짓말인 걸 누구라도 알겠다.

"그렇다 해도 연희는 아니야. 그날 내내 나랑 같이 있다시피 했으니까."

그래. 거짓말을 하려면 이 정도의 당당함은 연기할 수 있어야지.

…어?

왜 거짓말을 하지?

선우 코빼기도 보지 못한 게 일주일째였다. 하지만 선우의 여유로운 표정과 신뢰감 있는 목소리가 어우러지니 연희조차 그날 '내가 진짜 선배를 만났던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긴 웃을 기분이 아니어도 환하게 웃던 사람 아닌가. 평온하지 않으면서도 평온을 연기하던 사람이고.

"오빠 그날 수업도 안 나왔다고 들었는데요. 굳이 연희 때문에 학교에 왔다고요?"

그런데 그 매끄러운 가면이 왜 불편할까.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데도.

왤까?

"연희가 그날 나한테 고백을 했거든. 학생식당 앞 벤치에서."

이렇게 뒤통수를 칠 것 같아서였을까?

"일단 거절하고 일어섰는데 자꾸 마음이 쓰이더라고. 그래서 다시 위로해주러 와버렸지 뭐야."

웅성거림이 점점 더 커졌다. 선우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남들 눈에는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감추려는 걸로 보이겠지만 연희 눈엔 아니었다.

선우가 조용히 입매를 씰룩이고 있었다.

"준호하고 유진이가 날 봤다는 얘기는 안한 모양인데, 그날 연희가 다음 강의 들으러 갈 때 내가 바래다줬어. 강의 끝나고 나서도 내가 집까지 바래다줬고."

선우가 준호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진실이야 어쨌든 입 다물고 구경이나 하란 의미였다.

"연희 강의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고요? 왜요?"

"너무 안쓰럽더라고. 한 번만 다시 생각해달라고 애원하는 게."

실제 있지도 않았던 상황을 말하는데 왜 만족스러워 보이는지 모르겠다.

"거짓말 마요. 오빠한테 고백했다 차인 애들이 한 둘이에요? 그렇게까지 배려한 적 한 번도 없잖아요."

내 말이. 고백 좀 거절했다고 강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수 데려다준다고?

연희는 처음으로 보나의 말에 동감했다. 그러다가 당황했다. 선우가 자연스레 연희의 팔을 붙든 것이다. 연희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 뒤, 시선을 내려 연희의 발을 바라본다.

"사실 축제 이후로 연희 발목이 계속 안 좋았어. 지금도 선 자세가 살짝 기울어 있잖아. 걷기도 불편한 애가 차였다고 펑펑 울기까지 하는데 어떻게 혼자 두겠어?"

선우가 연희의 바지를 살짝 올리자 발목을 감싼 압박붕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병원에는 안 가 본 거야?"

잠깐의 관찰만으로도 연희의 상태를 쉽게 간파하는 선우였지만, 상태가 이 정도인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선우가 눈썹을 찡그렸다. 집에서 대충 싸맨 압박붕대가 붕 떠 있었다. 덕분에 부은 발목이 더 잘 보였다.

가까이 서 있던 몇 명이 "아…." 하는 탄식을 내뱉었다.

"연희야. 뛰어볼래?"

재주라도 부려보라는 뜻인지 휙, 휘파람을 불며 손가락을 위로 한 바퀴 굴렸다. 지그시 바라보는 눈에 홀렸나 보다. 저도 모르게 시키는 대로 두 발을 허공 위로 띄웠다.

윽.

착지와 동시에 연희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걷는 건 가능해도 뛰는 건 확실히 무리였다.

"그러니까, 보나가 찍은 영상처럼 빠른 속도로 달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지."

보나가 학과 채팅방에도 영상을 띄웠다더니, 선우도 그걸 본 모양이었다.

"그런데 연희야, 왜 그렇게 얼굴이 붉어? 부끄러워서 그래?"

아파서 그런 건데요.

"혹시 내가 나선 게 불편한 건 아니지? 난 네 결백을 증명하고 싶어서 이러는 건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뻔뻔한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자, 선우가 눈을 마주치며 가볍게 윙크를 했다. 웅성거림이 더욱 심해졌다.

"연희가 선우 형을 좋아했다고?"

"선우 오빠 착하다. 미안하다고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고."

주위에서 주고받는 말들이 가관이었다. 도둑 취급보단 낫긴 한데….

연희는 저도 모르게 혜진의 얼굴을 살폈다. 혜진은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연희가 선우를 좋아해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건가? 아니면 선우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아는 걸까?

연희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연희보다 훨씬 더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보나가 선우에게 말했다.

"이렇게 대충 봐서 어떻게 알아요? 오래 서 있으면 가볍게 붓는 사람도 많아요."

"의심되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해줄까?"

선우가 연희에게 다가갔다.

말릴 새도 없이 허리를 굽혀 운동화에서 연희의 발을 완전히 빼냈다. 이어 발목에 있던 압박붕대까지 풀어냈는데, 그 손길이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보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모두 연희의 발목만 바라보고 있었다. 발목의 주인인 연희조차도 그랬다.

스르륵.

까슬한 붕대가 피부를 가볍게 스치면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붉어진 발목이 훤히 드러났다. 발목은 퉁퉁 부어 있었다. 단연코 가볍게 부었다고는 볼 수는 없는 상태였다.

"생각보다 훨씬 많이 부었네."

선우가 한숨처럼 말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러고 어떻게 버텼냐고도 중얼거리며 인상을 썼다.

처음에는 저절로 나을 줄 알았고, 그러다 보니 바빠져서 방치한 것뿐인데 도둑질보다 더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같았다.

겸연쩍은지 헛기침을 하는 사람이 있었고, 의심이 풀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건이 해결되자 흥미를 잃고 자리를 뜨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보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왜 자꾸 오빠가 대신 나서줘요? 연희가 불쌍해서 그래요?"

"뭐?"

"후배를 감싸주시려는 마음은 존경스럽지만 신중하게 생각하세요. 그날은 연희 발목이 멀쩡했을 수도 있는 거고, 연희가 수업 중에 몰래 과방에 왔다 갔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너 정말…."

"다른 증거 없으시면 오빠도 이제 그만하세요. 나중에 사실이 밝혀지면 오빠가 후회하게 될 거 같아서 그래요."

선우가 혀를 쯧, 차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표정을 지운 얼굴이 사선으로 기울어졌다.

시선은 보나를 향한 채였다. 광택이 도는 갈색 구두가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복도와 바싹 마찰된 구두 끝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기어이 연희가 범인이라고 우기고 싶은 거 같은데 정리해서 대답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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