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14)화 (15/98)

<14>

펑, 펑.

불꽃이 몇 번이고 더 터졌다. 그때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이어졌다.

"예쁘네요."

분명 몇 시간 전까지 지치고 피곤하고 발목도 아픈 날이었는데.

언젠가 오늘을 기억한다면 화려한 불꽃이 가장 기억에 남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까만 밤하늘 위에 흩어지던 불꽃도, 선우의 얼굴 위로 반사되어 흔적을 남기던 불꽃도.

오늘도 선우와 같은 버스를 타지 못했다. 선우에게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이었다. 발신자 이름에 뜬 '아버지'라는 이름이 눈에 밟혔다. 통화가 계속될수록 어두워지던 선우의 얼굴도.

"집이에요?"

"응. 오늘 어머니하고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깜빡해 버렸네."

"급한 일이에요?"

"응. 너 먼저 가야겠다. 난 아버지가 데리러 오신대."

선우가 웃었다. 매일 보던, 그러나 오늘 하루 만에 선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끼게 된, 가면 같은 미소였다. 균열 하나 없이 매끄러운 미소. 가끔씩은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림 같은 미소.

때마침 도착한 버스가 앞문을 열었다. 연희가 버스를 향해 걸음을 옮기자 선우도 뒤를 따랐다. 연희의 뒤통수에 선우의 숨이 닿았다.

"잘 가."

인사말이 들렸으나 곧장 뒤를 돌아보지는 못했다.

버스에 타고 자리에 앉아서야 선우에게 손을 흔들어 보일 수 있었다. 선우가 붕어빵 봉지를 들지 않은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선우와 점점 멀어지는 버스 안에서 생각했다.

갖가지 빛깔의 음료에 대해서. 어수선한 길과 시끄러운 가운데 가끔 내려앉던 침묵에 대해서.

조악한 불꽃놀이와 함성, 여러 군데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경쾌한 노랫소리, 까만 밤을 밝히던 가로등, 손에 들린 붕어빵, 어묵 국물에서 흘러나오던 하얀 김, 떡볶이의 매운 냄새, 호떡에서 떨어지던 달큼한 설탕물에 대해서.

유리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오늘 지나친 풍경들이 꿈인 듯, 꿈이 아닌 듯 머릿속을 부유했다.

그 모든 풍경마다 선우가 있었다.

* * *

"나 여기 앉아도 되지?"

학생식당에서 마주친 혜진이 알은 척을 해왔다. 근처를 지나던 1학년들이 연희와 혜진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전과 달리, 후배들의 얼굴에서 은은한 호감이 드러났다.

"동훈 선배랑 선우 선배는요?"

"동훈이는 오늘 풀강이고 선우는 당분간 학교에 못 나온대."

하루도 아니고 당분간이라는 말이 이상했다.

"선우 선배, 혹시 어디 아파요?"

혜진이 얕은 한숨을 쉬었다.

"집에 일이 좀 있어서. 아마 며칠 못 나올 거야."

연희의 심각한 낯을 하자, 혜진이 화제를 바꾸었다.

"근데 넌 괜찮겠어? 축제 일 때문에 복학생들이랑 껄끄러워질지도 모르는데. 형민이가 쓸데없이 발이 넓잖아."

"괜찮아요. 그런 일에야 면역도 됐고."

어차피 지금도 편치 않은 사이라 크게 달라질 것도 없건만, 혜진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런 일에 면역이 될 수가 있어?"

"네?"

"부당한 괴롭힘 말이야."

"……."

"이번에 보니까 보나랑 주영이, 정말 너무하더라. 너 많이 힘들었겠어."

사과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죄 없는 혜진이 미안해했다.

"나도 내 일에나 신경 썼지 남의 일에 그렇게까지 관심을 두는 성격이 아니라서 너랑 엮인 헛소문을 이번에야 알게 됐거든. 선우가 따로 얘기 안 해 줬으면 지금도 몰랐겠지만."

"선우 선배가 이야기를 했다고요?"

"응. 학과 일에 관심 좀 가지라더라? 그동안 남의 일에 관심 안 둔 사람이 누군데, 어찌나 황당하던지."

선우가 자신의 이야기를 혜진에게 했다는데 왜 가슴이 쿵덕대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쁜 뜻은 아니고. 그런 소문은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니까 나중에라도 휩쓸리지 말라는 의미였어."

안쓰러움을 숨기지 못하는 혜진에게, 연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 괜찮아요."

"뭐가 다 괜찮대…."

속상해하는 혜진을 안심시키려고 연희가 평소보다 활짝 웃었다.

긴 입매를 시원스레 열자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났다. 예쁘지만, 동시에 우울하고 어두워 보였던 첫인상을 단숨에 지워버리는 미소였다. 길게 접힌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혜진이 감탄하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아! 이래서 선우가…."

"네?"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띠링.

혜진의 휴대폰에서 채팅창 알림음이 울렸기 때문이다. 식탁 위에 엎어둔 휴대폰을 확인한 혜진이 버튼을 누르면서 말했다.

"학과에서 톡 왔나 보다."

스크롤을 내리던 혜진이 연희의 휴대폰을 가리켰다.

"넌 확인 안 해 봐?"

"저한텐 안 왔을 거예요."

대화 상대 목록을 확인한 혜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너 없네?"

연희는 학과 공지방이나 각종 단체 채팅방에서 열외인 존재였다. 학과의 흐름을 주도하는 이들과 척을 졌기 때문이다. 궁금해할까 싶었는지, 혜진이 채팅방에 올라온 내용을 줄줄 읊어주었다.

"축제 때 번 돈이 없어졌대. 누구 가져갔거나, 가져간 거 본 사람 있냐고 그러네."

"축제 끝난 지가 언젠데요. 입금 안 했대요?"

"과방 금고에 보관했다나 봐. 바로바로 좀 처리하지."

눈으로 무언가를 더 읽어 내린 혜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연희야. 오해하지 말고 들어."

"네?"

"네가 가져간 걸 본 사람이 있대."

몇 년 전과 정확히 똑같은 누명이 똑같은 방법으로 덧씌워졌다.

"…누가요?"

"돈이 없어진 날, 보나가 금고 앞에서 네 뒷모습을 봤대."

과거에 한 번 겪은 일이라고 해서 마음을 쉽게 다스릴 수는 없었다. 연희가 학과에서 완벽하게 소외된 계기가 바로 그 일이었으니까.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이제야 저를 보고 웃어주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그 사람들이 보나의 말을 믿으면 어쩌지? 나한테 실망했다고 하면 어쩌지?

싸늘하게 바뀐 시선을 참아낼 수 있을까?

아는 고통인 만큼 더욱 무서웠다. 이렇게 될 거면 차라리 아무와도 엮이지 않는 게 나을 걸 그랬다.

"저 아니에요…."

떨리는 입술로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연희를 일별한 혜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채팅창에 메시지를 적어 넣었다.

* * *

다음날 보나와 함께 수업을 들었다. 하필 은경이 진행하는 수업이었다. 보나는 수업 중에도 연희에 대한 조롱과 험담을 멈추지 않았다. 여러 번 주의를 주다가 지친 은경이 강의 말미에 총평했다.

"오늘따라 분위기가 산만했네요."

은경의 못마땅한 눈길은 보나를 빗겨 연희에게로 쏟아졌다. 이런 소란에 이름을 올린 것 자체가 문제라는 양.

다음 강의 때 또 이런 일이 되풀이되기 전에, 무어라도 해야 했다.

"이보나!"

강의실을 나가려는 보나를 연희가 불러 세웠다. 같은 수업을 듣는 몇몇 동기와 선배들의 시선이 연희와 보나에게 따라붙었다.

"웬일로 네가 먼저 나한테 아는 척을 할까? 변명이라도 하게?"

보나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듣고 싶은 거야. 이 건물 근처에도 없었던 나를 어떻게 과방에서 봤다는 건지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무슨 소리야? 아무도 없는 과방에서 빠져나와 꽁지가 빠질세라 도망가는 거, 내가 영상으로 다 찍어놨는데?"

보나가 휴대폰에 담아둔 동영상을 틀었다. 연희처럼 긴 생머리를 한 여자의 뒷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흰색 블라우스, 검은 재킷. 청바지. 그날 네가 입은 옷 맞잖아."

보나와 마주친 기억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으나 그날 연희가 입었던 차림과 비슷하긴 했다. 메고 있는 가방도 연희의 것과 같았고.

"가방이 묵직했을 텐데 잘만 뛰더라? 혹시나 해서 과방에 들어갔는데 금고 문이 열려 있더라고. 돈은 다 없어졌고."

"봤으면 부르지 그랬어? 그러면 내가 아닌 거 알았을 텐데."

"불렀는데 네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갔잖아."

보나의 눈이 확신으로 가득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갈색 긴 생머리야 학교에 차고 넘친다는 게 문제였다. 영상에 찍힌 옷차림 또한 교내에서는 흔하디흔한 것이었다.

연희가 1학년이던 2년 전부터 지금까지 정문 근처 보세점에서 꾸준히 팔고 있는 기본 아이템들이었으니까. 그러니 연희 아닌 다른 사람을 의심해 볼 법도 한데, 보나는 연희 외의 선택지는 없다는 듯 굴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안 하는 건데?"

"넌 경력이 있잖아. 한 번 훔친 사람이 두 번은 못 하겠어?"

하긴. 한 번 누명을 쓴 사람에게 두 번은 못 씌울까. 돈 관리가 소홀했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연희를 범인으로 확정 지어 공공의 적으로 삼고 싶을 터였다.

급히 찍은 영상은 이리저리 흔들려 선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나의 확언에 적극적으로 반기를 드는 이는 없었다. 형민을 위시한 고학번 남학생들이 연희를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한 사람만 몰아붙이는 거 아니냐는 일부의 지적은 그들의 큰 목소리에 묻혀 버렸다. 남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한 쪽을 편드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설령 네가 본 게 나라고 치자. 가방에 담은 게 돈인지, 다른 뭔지 네가 어떻게 알아? 증거 있어?"

"그럼, 네가 안 그랬다는 증거는 있어? 너도 없잖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에게 결백을 밝힐 증거를 요구한다. 이 또한 전과 다를 게 없었다.

어차피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었다. '누가 대상이 되는가?'와 '누가 그 대상을 지목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푼돈 몇 백만 원에 쪽팔리게 굴지 마. 돈만 돌려주면 깔끔히 없던 일로 해줄게."

보나가 여유로운 얼굴로 강의실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이 싸움을 잘 지켜보고 있는지 확인하듯이. 보나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대놓고, 혹은 아닌 척 가장하면서 이 언쟁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애초에 무엇을 기대한 걸까. 결국 이렇게 결론지어질 일이었는데.

"나를 정확히 언제 봤다는 건데?"

자리를 뜨기 전에 마지막으로 물었다. 만일 수강 중이었다면 연희가 과방에 있을 수 없었다는 증거가 될 테니까.

"12시쯤이었던가?"

힘이 탁 풀렸다. 공강일 때였다. 혼자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앞으로도 쭉 그렇게 되겠지. 모처럼 다가온 사람들도 다시 멀어지고 말겠지.

씁쓸해할 때였다.

"그럼 연희는 확실히 아닌 것 같은데."

혜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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