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네 생각보다 나 입 무거워."
"아니, 그래도…."
"왜, 나 못 믿겠어? 전에…."
잠깐 망설이던 선우가 말을 이었다.
"너한테 막말하고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요."
선우와 오래 본 사이는 아니었지만, 연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선우를 믿을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되는 걸까?
내가, 그래도 되는 걸까?
"욕하고 하소연해도 돼. 그럴 자격 충분하잖아."
선우가 마치 연희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연희는 또 발견했다.
선우의 눈 속에 오롯이 담긴 자신을.
그와 함께 발견한 것은, 넘치는 신뢰와 인정이었다.
어느덧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게 된, 지연희란 사람에 대한 믿음.
언제부터 스스로를 낮추어 보게 된 걸까? 저도 모르는 새 남들이 하는 말로 자신을 규정하게 되었다. 타인의 단편적인 시선은 신경 쓰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한테만 매번 이런 식의 뒷말이 따라붙는다는 건, 너한테도 문제가 있는 거 아니겠니?"
어머니가 말했던 것처럼.
끝까지 몰아세워지다 보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이해해 볼 여유도, 보듬을 아량도 사라졌다.
상처입지 않은 척 위장한 껍데기 속에 남은 건 자신에 대한 의심. 무언가 해 보려 할 때마다, 하다못해 누군가를 미워하려 할 때마저 고개를 드는 '내가 그럴 자격이 있나?' 하는 물음.
그런데 오늘 누군가가 말해주었다.
그래도 된다고. 자격이 있다고.
내내 긴장했던 어깨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입매도 자꾸 풀렸다.
옆에 있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할지 따져보지 않고, 이 뒤에 어떤 일이 있을지 계산해보지도 않고, 고개 숙이지 않고.
그냥 웃었다.
연희의 미소 띤 옆얼굴을 따라 선우도 천천히 웃었다.
진해진 꽃향기가 뜨거운 여름을 예고하며 선우와 연희 주위에 머물렀다.
"이제 가보셔야죠. 저도 집에 가야 하고."
연희가 몸을 일으키자 선우가 연희의 옷자락을 잡아 눌렀다.
"그러지 말고, 여기서 좀 기다릴래?"
"네?"
"음료수만 돌리고 금방 올게. 같이 나가자."
"아니, 전 괜찮은데…."
"잠깐만 기다려."
벌떡 일어선 선우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와중에도 혹여 연희가 먼저 가버리는 건 아닌지 연신 뒤를 돌아보면서.
정말 금방 올 수 있으려나? 가면 분명히 붙들릴 텐데.
생각하면서도 선우를 기다렸다. 손에 쥔 탄산수를 입에 댔다. 목구멍을 톡톡 때리던 탄산이 식도를 타고 흘러내렸다. 달달한 복숭아 향이 나는 탄산수는 쌉싸름한 맛이 났다.
싱그러운 풀 냄새, 선선한 저녁 바람, 적당한 소음이 깃든 공기, 들뜬 사람들의 표정. 캠퍼스에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
그 안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
멀리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선우가 보였다. 손목에 찬 시계를 가리키는 모양이, 약속대로 빨리 왔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 것 같았다.
상기된 얼굴이 내뿜는 가쁜 숨이 바람결에 흩어졌다.
탄산수를 다시 한번 머금었다. 톡톡 튀는 탄산이 입천장을 간질이고, 목을 자극하며 내려갔다.
있는 줄도 몰랐던 갈증이 해갈되는 느낌이었다.
학교를 나와도 사람들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축제특수를 노린 각종 노점상이 정문 근처에 진을 쳤다. 알록달록한 알전구가 빛나고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평소와 같은 거리인데도 낯설었다.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복잡한 거리를 함께 걸었다.
"발목, 많이 불편해? 아까부터 힘들어 보이던데."
미세하게 달라진 연희의 걸음걸이를 눈치챘나 보다. 선우가 미간을 좁혔다.
"붙잡고 갈래?"
선우가 팔을 내밀었다. 당당한 행동과는 달리 경직된 표정이었다. 마치 긴장한 것 같았다.
잘못 본 거겠지.
"괜찮아요."
"안 괜찮은 거 같은데?"
선우가 팔을 좀 더 길게 뻗었다. 연희는 고개를 저었다.
"걸을 만해요."
발목이 조금 시큰거리는 정도야 자주 있는 일이었다. 버스정류장까지 걸어봤자 얼마나 더 걷는다고. 선우가 내민 팔을 지나쳐 앞서 걷자, 등 뒤에서 웃음기 섞인 농담이 들렸다.
"…안 넘어오네."
잠깐 멈칫했던 연희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뒤에서 푸스스 웃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잠깐 빨리했던 걸음이 금세 원래의 속도를 되찾았다. 불편한 발목으로 걷는 탓에 이리저리 치이는 연희를, 선우가 말없이 앞질러 갔다. 연희의 시야 가득 선우의 너른 등이 담겼다.
"바짝 붙어야지!"
한참 앞서 걷던 선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답답하다는 얼굴이다. 어쩌면 여러 번 같은 말을 반복했는데, 연희가 듣지 못한 걸지도 모르겠다.
"이래서는 네 앞에서 걷는 의미가 없잖아."
연희와 선우 사이에 벌어진 틈바구니로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스쳐갔다. 스쳐가는 사람 중 하나와 연희가 부딪혔다. 연희에게 뛰어온 선우가 연희를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또 부딪혔잖아. 옷이라도 잡고 따라오든가."
선우가 왜 앞서 걸었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옷의 팔꿈치 부분을 조심스럽게 잡았더니 옷감이 붕 떴다. 선우가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것이 느껴졌다. 제가 먼저 말을 꺼냈으면서 당황한 눈치였다. 민망했다.
"불편하시면 안 할게요."
연희가 옷을 놓으려 하자 선우가 떼려던 손을 얼른 붙들었다. 그리고 다시 제 옷 위에 얹어두었다.
어쩐지 발목뿐 아니라 온몸이 시큰거리는 것 같았다.
왜 이러지? 몸이 고장 났나?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오늘까지 지치도록 일하긴 했다. 게다가 오늘은 촉박한 일정 탓에 점심도, 저녁도 먹지 못했다.
"배고파…."
혈당이 저하된 탓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들 리가….
"밥도 못 먹고 일했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외친 선우가 다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시선을 멈춘 곳은 붕어빵을 파는 노점이었다.
학교 명물로 유명하다더니, 대기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팥, 녹차 크림, 슈크림, 옥수수 크림 등 다양한 재료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연희는 그중 어느 것도 맛본 적이 없었다. 줄을 서서 기다릴 만큼 학교 근처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한번 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함께 기다려줄 누군가가 옆에 있을 때.
"붕어빵 먹자."
연희의 생각을 읽은 걸까? 선우가 연희를 끌고 줄 끝에 섰다. 각종 소와 달달한 밀가루에서 파생되었을 달콤한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모처럼 학교 근처에서 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도 긴장되지 않았다. 연희를 붙잡고 있는 선우 덕이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방심하면 안 되는데….
억지로 되뇌어도 선우의 단정한 뒤통수나 제게 내맡긴 옷자락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풀어졌다.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뭐 먹을래?"
연희가 녹차 크림 맛을 고르자 선우도 같은 맛을 선택했다.
"얼마예요?"
"세 마리 천 원."
자신 있게 지갑을 펼친 선우가 안에 든 지폐를 뒤적이더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카드는 안 되겠죠? 하필 지금 수표 밖에 없는데…."
"안 돼요."
두 번째 봉투에 붕어빵을 담던 아주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현금인출기는 멀고 줄을 다시 서기에는 너무 길었다. 선우가 커다란 손으로 제 눈썹 주위를 긁었다.
"어쩌지?"
"어쩌긴 어째? 이 친구가 대신 내면 되지."
아주머니가 곁에선 연희에로 시선을 옮겼다. 지갑을 꺼낸 연희가 재빨리 돈을 건넸다. 붕어빵 봉투 두 개가 연희의 품 안에 들어왔다.
"받아요."
연희가 봉투 하나를 선우에게 건넸다.
"내가 사주려고 했는데 미안하게 됐네."
"선배가 왜 미안해요."
셈해봐야 오늘 선우가 사준 음료수 값 정도일 것이다. 당당하게 얻어먹으면 그만일 텐데, 의외로 선우는 얼굴을 붉혔다.
"난 하나만 먹을게."
선우가 넘겨받은 봉투에서 붕어빵 한 개를 빼고는 다시 봉투를 내밀었다.
"그냥 선배 다 먹어요."
"신세 지기 싫어서 그래."
그랬지, 참.
첫 만남부터 남에게 신세 지는 걸 못 견뎌한다는 게 눈에 보였던 선우였다. 그래서 일전에 도와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놀랐다. 어쩌면 장난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외면하지 못했고.
"그럼 선물 받은 셈 쳐요."
"…이게?"
선우가 연희가 준 붕어빵 봉지를 슬그머니 벌리더니 그 속에 고개를 파묻었다.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달큼한 공기를 한껏 들이키기도 했다.
"네. 선물."
선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니, 올라간 줄 알았는데 급하게 내려왔다.
웃는 표정도 아닌, 무표정도 아닌 어정쩡한 표정이 만들어졌다.
"선배 그러고 있으니까 좀…."
"좀?"
뭔가 이상했다. 어색한 선우가 어색했다. 마음속 어딘가가 자꾸만 울렁거렸다. 이유는 모르겠다.
감정을 매끄럽게 감추지 못하는 선우가 신기해서인지, 오늘따라 선우와 너무 오래 함께 있었기 때문인지.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 생각보다 즐거워서인지.
"…아니에요. 아무것도."
잠깐 눈을 굴리던 선우가 붕어빵을 꺼내 입에 물었다. 천진한 얼굴로 뺨을 부풀리고 꾹꾹 씹어대는 모습이 원래 나이보다 네댓 살쯤 어려 보였다.
"바람이 싸늘한데 좀 빨리 걸을까요?"
봉투를 품에 단단히 끼운 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난 따뜻한데?"
봉투와 붕어빵을 양손에 들고, 이번엔 나란히 붙어서 왔다. 아까보다 좀 더 가깝게.
쌀쌀한 바람이 닿은 얼굴이 거꾸로 뜨거워졌다. 걸음이 자꾸만 느려졌다.
펑.
학교에서 불꽃놀이를 시작했나 보다. 어두운 하늘에 밝은 빛이 다양한 선을 그리며 휘몰아쳤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선우의 얼굴 위로도 밝은 빗금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푸르고, 붉고, 노랗고, 하얀 빛이 선우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선우의 움직임을 따라 찰랑거리던 음료수 빛깔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