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12)화 (13/98)

<12>

"이제 편히들 먹어."

부스를 둘러본 선우가 미소 지었다. 알아서 나무젓가락을 챙기더니 점잖게 의자에 앉았다. 동훈과 혜진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누군가 놓아준 대롱과자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동훈이 주영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주영이도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여기 더 있을 거니?"

"아니요."

주영까지 서둘러 자리를 뜨고 나자 유진이 털썩, 땅에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진을 챙겼다. 두 사람 사이에 잠깐 대화가 오가는가 싶더니 유진이 연희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니에요. 오늘 너무 고생 많았네요. 진즉 알아채고 말렸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그런 말씀 마시라며 손사래를 친 유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아까 좀 좋았어요."

"뭐가요?"

"언니가 유진이라고 이름 불러주셔서요. 언니가 제 이름 모르시는 줄 알았거든요."

얼굴을 붉힌 유진이 빠르게 뒷걸음질하다가 등을 돌렸다. 기다리고 있던 혜진이 유진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고, 동훈도 따라나섰다.

그렇게 선우 홀로 테이블을 지키고 있게 되었다. 학과 사람들이 선우에게 합석을 제의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어쩌면 선우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아까 형민을 바라보는 선우는 확실히 무서웠다. 형민이 때마침 눈을 뜨지 않았다면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선우의 눈동자에 스몄던 날선 감정. 그것은 연희와 있을 때 종종 보인 짓궂음과는 또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몸은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날랐으며 탁자를 치우고 닦았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선우가 앉아 있던 탁자가 비어 있었다.

갔구나.

생각하며 오징어볶음과 조개탕과 콘치즈를 한꺼번에 들고 갈 때였다.

"이걸 혼자 다 들어?"

연희의 손이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선우가 접시를 앗아든 덕이었다.

"아직 안 가셨어요?"

"너무 바빠 보여서 내가 좀 도와주려고."

"형. 진짜 최고네요!"

막 조리 파트에 합류한 준호가 엄지를 치켜듦과 동시에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저도 좀 도와달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아부해도 요리는 못 도와준다."

"왜요?"

"곧 나가봐야 해."

그렇게 말해놓고, 선우는 한 시간이나 더 서빙을 도왔다. 손님이 한참 줄어들 때까지.

* * *

축제 둘째 날은 전날보다 수월하게 일을 마쳤다. 보나가 자리를 오래 비운 덕도 있었고 어제 함께 일해 본 1, 2학년 멤버들과 호흡이 맞아든 덕도 있었다. 어제처럼 부스를 정리할 때까지 있을 필요도 없었으므로 연희는 홀가분하게 앞치마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

"먼저 가 볼게요."

"선배! 잠깐만요!"

연희가 부스를 나서려는데 준호가 급히 붙잡았다.

"뭐, 더 도울 거 있어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유진이 위해서 나서주셨다는 말을 들어서요."

"아…."

어제 준호는 도중에 합류해 곧바로 정신없이 일했으니, 유진과 형민 사이에 있었던 일을 나중에야 전해 들은 것 같았다.

"감사하다는 말이 하고 싶었습니다. 저희 기수들 모두 마찬가지고요."

준호가 깍듯이 허리를 접어가며 인사하는 바람에 연희는 외려 당황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에이. 아무도 못 나서는 일에 용기 내는 게 어디 쉽나요?"

"어차피 제가 아니어도 혜진 선배나 선우 선배, 동훈 선배가 도왔을 거예요. 어제 봤잖아요."

"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우 형은 아닐 거 같은데요. 원래 선우 형은 남의 일에 그렇게 대놓고 나서는 스타일 아니잖아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가가 조금 풀어졌다.

뭣 같은 상황에서는 뭣 같다고 말해도 된다고 했던가?

그럼 자신이 뒷감당을 같이 해 주겠다고.

그래서… 내 편이 되어주려고 했던 건가?

"선배."

사방으로 튀던 생각은 준호의 부름으로 인해 흩어졌다.

"앞으로 볼 땐 저한테 말 놔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2년이나 후배인데."

"원래 말 놓는 게 좀 어려워서요."

"그래도 저한테는 놔주시면 안 돼요? 그래야 더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훅 들어온 직구에 연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적어도 이 학교에서는 누구와도 친해질 수 없을 줄 알았다.

"준호 후배 나이가 저랑 같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요. 한쪽만 존대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을까요?"

준호는 삼수 끝에 입학한 신입생라고 들었다. 성격도 호락호락하지 않아 선배들이 만만히 보지만은 못한다는 평을 들은 것 같은데, 연희에게는 스스럼없이 다가와 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럼 제가 말을 놓으면 선배도 반말해주나…요?"

"그…래. 그럼."

"참, 축제 참여 사진 찍었어? 같이 찍을까?"

기다렸다는 듯 말을 놓은 준호가 연희와 함께 축제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찍힌 사진은 구도고 표정이고 죄다 엉망이었다.

"이게 뭐야…."

촬영된 사진을 본 순간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준호와 눈을 맞추며 한참 웃었다. 상대의 눈에 이렇게 오롯이 담겨 본 것도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그렇지도 않다는 걸 깨달았다.

빈 강의실에서, 학생 식당에서, 인적 드문 복도에서, 그리고 어제 바로 이곳에서.

그런 눈을 마주했었다.

* * *

학교를 나서기 전에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발목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원래도 자주 고장 나는 발목인데 어제부터 오늘까지 무리를 했으니 당연했다.

"학교에서 병만 얻어가네."

구시렁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학생식당 앞에 있는 벤치가 때마침 비어 있었다. 연희는 털썩 앉아 발목을 주물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무리 지어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와는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 같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연희를 비추던 가로등 불빛이 갑자기 잦아들었다. 연희 위로 드리워진 길쭉한 그림자 탓이었다. 고개를 들자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하얗고 매끈한 얼굴이 보였다. 시원한 스킨 향이 나는가 싶더니 불쑥 탄산수가 내밀어진다.

"마셔."

선우의 깊고 검은 눈동자에 연희가 담겼다.

"힘들었지?"

"뭐, 그냥."

살랑대는 바람 때문일까? 목 뒤가 간질거려서 연희는 손으로 뒷덜미를 훔쳤다.

"오늘도 고생 많았겠네."

별것 아닌 한마디에 손가락이 곱아드는 건 또 왜일까.

"해야 하는 일이라 한 건데요."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닐 거 아냐."

"……."

"잘 버텼다고."

도망 안 가고.

덧붙인 말이 가슴에 콕 박혔다.

"손잡고 같이 나갈 사람이 없어서요."

피식.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동시에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먼저 표정을 되돌린 연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도망갔어도 어차피 준호가 끌고 왔을걸요. 자기가 추노 담당이라던데요?"

선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조금 뜸을 들인 후, 선우가 물었다.

"준호랑 서로 말 놓는 사이였어?"

"오늘부터요."

"많이 친해졌나 보네?"

"…흠."

묘한 선우의 표정이 때마침 얼굴에 떨어진 나뭇잎에 가려졌다. 턱 밑으로 미끄러져 내리는 나뭇잎을 선우가 서둘러 잡아챘다. 아슬아슬하게 잡힌 나뭇잎이 바람에 펄럭였다.

"그 말 알아?"

"무슨 말요?"

"떨어지는 낙엽을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

"그건 벚꽃 아니에요?"

"벚꽃은 첫사랑이고."

선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것도 모르냐는 얼굴이다.

"그렇다고 해도 가을 낙엽 말하는 거 아닐까요? 지금은 봄인데."

"계절이 무슨 상관이야? 떨어지는 잎이면 다 낙엽이지."

그렇게 주장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중요한 것도 아니고.

"…뭐가 됐든 잡으신 거 축하드려요."

"되게 어이없는 표정이네?"

그야 어이가 없으니까?

연희의 황당한 얼굴이 재미있는지, 선우가 쿡쿡 웃었다.

"근데 안 받을 거야?"

뭘? 낙엽을?

연희의 눈썹이 물결 모양으로 구부러졌다. 그러나 선우가 연희 쪽으로 내민 것은 낙엽이 아니었다. 반대쪽 손에 들고 있던 탄산수였다.

찰랑찰랑,

음료수 병을 쥐고 흔드는 손이 크고 예뻤다. 하지만 의외로 마디가 굵었고 자잘한 흉터들이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었다.

"선배 드셔야죠.

"많아.

선우가 팔에 걸려 있는 비닐봉지를 보여주었다. 커다란 봉지 안에는 음료수가 제법 많았다. 한 팔로 들고 있기에는 무거워 보이는데도, 선우는 가벼운 종잇장 흔들 듯 봉지를 마구 흔들어 댔다. 조금 후에는 들고 있던 낙엽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은 뒤 봉지를 넓게 펼쳐 보였다. 반투명한 비닐에 가려졌던 내용물이 제 색깔을 드러냈다.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흰색 액체가 담긴 병이 뒤엉켜 있었다. 통통 튀는 기포들이 폭죽처럼 터지고 흔들렸다.

"고생하는 후배들한테 돌리려고 사왔지. 어제는 좀 무서운 모습을 보였으니까 오늘은 다시 친절한 김선우로 돌아와야지."

평소답지 않았던 행동을 뒤늦게 수습하러 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안 가지?

외려 연희 옆에 털썩 앉는 선우였다.

"안 가보세요?"

연희가 멀뚱히 쳐다보자, 선우가 어색하게 팔을 두드렸다.

"너무 흔들었더니 팔이 조금 아파서."

하나도 안 힘들어 보이던데. 표정도 그렇고 팔의 움직임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팔 근육도 제법 단단해 보였다. 튀어나온 힘줄도 힘이 넘쳐 보이고….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선우가 젖혀진 옷소매를 은근슬쩍 끌어내렸다. 어울리지 않게 꼼지락대던 손이 제 얼굴 여기저기를 더듬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손자국을 따라 얼굴이 얼룩덜룩 해졌다.

이 사람 왜 이러지?

오늘따라 영양가 없는 말이 참 많았다. 게다가 먼저 가지도 않고, 연희더러 가라고 하지도 않고.

"집에 갈 거야?"

"네."

"왜? 축제 좀 즐기고 가지."

힘들어 죽겠는데 즐기기는 무슨.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팠다. 특히 발목은 조금 부어오르기까지 한 것 같았다.

"그러기엔 피곤해서요."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의외의 말이 돌아왔다.

"어제 일, 기분 나빴지?"

"…제가 기분 나쁠 일은 아니죠. 제일 큰 피해자를 꼽자면 유진이고."

"너보다 힘들었던 사람이 있으면, 넌 기분이 나쁘면 안 되는 거야?"

선우가 연희를 빤히 봤다. 연희도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마주보았다. 오가는 시선의 이유도 잊은 채 시간만 흘려보냈다. 한참 뒤에야 연희는 자신이 대답할 차례였다는 걸 떠올렸다. 하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욕해도 되는데."

선우가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며 말했다. 고개를 내린 채였다.

꼭 민망해 하는 것처럼.

"누구한테요?"

설마 하는 생각에 눈을 굴리는데, 선우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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