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균열점 (11)화 (12/98)

<11>

"수고했어."

선우와 함께 부스에 들어서자, 혜진이 가장 먼저 반색했다. 선우가 들고 온 상자를 뒤적이던 혜진이 물었다.

"오늘 있다던 약속은 어떻게 했어?"

"중요한 약속도 아닌데 뭐."

선우가 혜진을 도와 물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연희 또한 식재료를 챙기면서 두 사람의 대화에 가만 귀를 기울였다.

"넌 선약 우선주의잖아."

"가끔 예외도 있지."

선우가 혜진과 눈을 맞추며 자연스럽게 눈을 휘었다.

나 저런 얼굴 본 적 있는데. 그게 언제였더라?

생각났다.

얼마 전에 청룡각에서 잘릴 각오로 사고 친 날.

그 정도는 해야 보여주는 귀한 표정이라고 생각했는데, 혜진 앞에서는 쉽게도 보일 수 있는 거였나 보다.

지금의 선우는 확실히 편안해 보였다.

혜진과는 어떤 사이일까? 오래된 친구? 혹은 연인?

연희는 혜진을 새삼 천천히 살펴보았다. 웃지 않을 때도 순하게 내려앉은 둥근 눈매와 붉고 보드라운 입술.

오늘 본 바로는 내면 또한 훌륭했다. 친절하고 성실하고 배려 깊고.

그러니까 좋아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김선우가 이혜진을.

…….

혜진 선배가 좀 아까운데?

별로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남의 연애사에 신경 써 본 적 없는데, 누가 아깝고 누가 넘친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신없이 일하는 사이 어둠이 짙어졌다. 매콤한 오징어볶음 냄새와 고소한 콘치즈 냄새가 퍼졌다. 앞뒤 생각 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일하는 3학년은 연희뿐이었다. 허리가 욱신거리고 팔이 후들거렸다.

"언니, 좀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언니 테이블까지 맡을게요."

1학년 과대인 유진이 조심스레 권했다.

"저희는 요령이 없어서 언니 없으면 훨씬 더 힘들었을 것 같아요."

표정이나 말투에서 진심 어린 고마움이 느껴졌다. 연희 자신이 생각해도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긴 했다.

하지만 유진 역시 몸 사리지 않고 일한 후배였다. 그러니 연희도 괜찮다고, 오히려 유진이 좀 쉬어야겠다고 말하려던 때였다.

"걔 보기보다 체력 좋아. 걱정 마."

손님으로 와 있던 주영이 빈정거렸다. 눕다시피 의자에 기대어 앉은 자세를 볼 때, 술자리의 흥분이 그녀의 본성을 완전히 풀어 놓은 모양이었다.

"그래. 연희는 일을 좀 해야지. 얼굴 반반한 사람이 일해야 매상도 올라가는 거 아냐?"

곁에서 뺀질대던 남자 선배들이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을 보탰다. '반반한' 쪽이 된 연희가 듣기에도, 얼결에 '반반하지 않은' 쪽이 된 유진이 듣기에도 무례한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유진이, 아직 형민 선배랑 말 나눌 기회는 없었지?"

누군데 그러지? 연희의 눈에는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아서 누가 누군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그들이 먼저 남의 얼굴을 평했으니 연희도 평을 해본다면, 모두 하나같이 밟혀서 터진 찐빵 같았다.

"안녕하세요?"

'형민'이란 사람의 얼굴을 용케 구분한 유진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하긴 유독 찐빵보다는 만두 재질이었다. 정확히는 물만두 재질이었는데 막상 열어보면 삭힌 김치가 들어있을 것 같았다. 즉, 여간한 취향으로는 수요가 없게 생겼다는 뜻이다.

"너무 어려워 할 것 없어. 나 선우랑 같은 학번인 건 알지?"

"네. 알아요."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하자 형민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우리 유진이, 처음이라 힘들었을 텐데 좀 쉬지 그래?"

형민이 좋은 '사람' 흉내를 내며 유진에게 휴식을 권했다.

"아니에요. 일하는 중이라…."

유진은 혼자 쉬기가 미안한지 자꾸만 연희를 보았다. 후배가 자신의 눈치를 보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작게 끄덕여 주었다.

유진이 주영의 맞은편에 앉자, 형민이 손을 까딱이며 연희를 불렀다.

"여기 주문 좀 받아라."

"말씀하세요."

"매끈하고 삼삼한 오징어 다리 좀 부탁해."

'매끈'과 '삼삼'을 발음하는 사이, 형민의 눈이 반바지를 입은 유진의 다리를 훑었다.

저런 것도 선배라고.

자기 얼굴만큼이나 수준이 낮은 농담이었다. 유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괜히 앉으라고 했나?

그래도 이 탁 트인 곳에서 대놓고 더럽게 굴진 않겠지? 유진은 친한 사람들이 꽤 많아 보였으니까 도와줄 사람도 많을 것이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여기 주문할게요!"

연희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등을 돌렸다.

"저 이제 진짜 일어서야 할 것 같은데요."

바쁘게 일한 연희가 숨을 가다듬을 때 곤란해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에이. 지금 바쁜 일도 없어 보이는데 뭐."

뒤를 돌자 주영이 있던 테이블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술에 취한 형민과 유진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확히는 형민이 유진의 어깨에 기댄 채 흐트러져 있었다.

지금… 손이 어디 가 있는 거지?

형민의 손이 유진의 허리 부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유진이 조심스럽게 몸을 비틀었지만, 취한 형민은 끈끈이주걱처럼 떨어지지를 않았다. 순간, 유진과 연희가 눈이 마주쳤다.

"왜 이러고 있어?"

연희가 유진에게 다가가 물었다.

"주영 언니가 잠깐 자리를 비우시겠다면서 그 사이에 형민 오빠 좀 챙기라고 해서요…."

유진이 울상을 지었다. 대화가 오가는 사이 형민이 은근슬쩍 손을 얌전히 내렸다. 귓구멍이 뚫려 있다는 뜻이니까 정신을 놓을 정도로 취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유진에게 기댄 몸은 그대로였다.

다들 뭐 하는 거지?

주위를 둘러보자 행여 문제에 휘말릴까 싶어 시선을 피하는 학과 사람들이 보였다. 늘 그랬듯이 자잘한 소동은 묵인하며 단체의 평화를 지키겠다는 거겠지. 일부의 희생은 묵인하며.

여기서 자신도 입을 다물면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축제날이 될 터다. 대부분이 원하는 대로.

그러면 누군가는 또 반들거리는 낯짝으로 부당한 이득을 보고, 누군가는 억울한 손해를 보겠지. 누군가는 웃어넘기겠지만 누군가는 비웃음을 사게 되겠지. 누군가는 제 일이 아니라고 쉽게 떠들 것이고, 누군가는 제 잘못도 아닌 일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게 과연 옳은 일일까?

"선배,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요."

결국 연희는 유진의 어깨와 형민의 머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야 말았다.

평화를 지키고 싶다는 핑계로 누군가의 희생을 그냥 두고 보는 것은 온당하지 않으니까.

"뭐야?"

형민이 눈을 쫙 찢어 연희를 노려보았다.

"몸도 못 가누시는 것 같은데, 과방에 좀 누워계시면 어떨까요?"

연희의 손이 형민의 머리를 조금 들어 올렸다. 무게가 제법 나가서 들인 힘에 비해 효율이 형편없었지만.

"네가 데려다주게?"

형민이 연희를 보느라 머리를 조금 더 들어 올렸다. 바윗덩이 같던 무게가 좀 덜어졌다

"저희는 일할 게 남아서요."

답하자마자 형민이 커다란 머리를 다시 유진의 어깨 위에 떨구었다.

"그럼 난 못 가. 혼자서는 못 걷겠어서 말이지."

일어서려던 움직임을 저지당한 유진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연희의 손은 유진의 어깨와 돌덩이 같은 머리통 사이에 아직 끼어 있었다. 손뼈가 아려왔다.

하아. 최악의 축제가 되겠네.

연희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아악. 내 머리!"

남은 손으로 힘껏 형민의 머리카락 아랫부분을 잡아당겼다.

"죄송해요. 옷깃을 잡는다는 게 그만."

물에 불린 만두피처럼 질척이는 머리채를 놓아주며 한 줌의 성의도 없는 변명을 꺼냈다.

몸을 일으킨 형민이 뽑힌 머리카락 뭉치를 보고 울상을 지었다.

"가뜩이나 요즘 머리숱도 잘 빠지는데."

쿵.

슬픈 표정으로 다시 의자에 앉던 형민이 옆의 의자에 머리를 찧었다. 그곳에 앉아 있을 줄 알았던 유진이 후다닥 일어선 후였기 때문이다.

아! 하는 신음과 함께 형민이 제 머리통과 목 부근을 차례로 매만졌다.

"야! 선배한테 무슨 짓이야!"

지금껏 어디 있었는지 모를 주영이 잽싸게 달려와 형민을 부축했다. 형민이 유진에게 추근거릴 때도 이렇게 달려와 주면 좋았을 것을.

"아무래도 목을 삐끗한 거 같아. 아아."

"어떡해요! 상처도 났네."

의자에 쓸렸는지 형민의 뒷목에 살짝 긁힌 자국이 생겼다. 말해주지 않았으면 본인도 몰랐을 상처를 가지고 주영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놀고들 있네.

민망함에 엄살을 떠는 형민이나, 그런 형민을 달래는 주영이나 한심하긴 마찬가지였다.

"마침 잘 오셨네요."

연희가 주영에게 말했다.

"조교님이 저 분 좀 챙겨주시면 되겠어요."

"뭐?"

"혼자선 걷지도 못하겠다잖아요."

연희가 턱짓으로 형민을 가리켰다.

"내가?"

"친하다면서요."

"아무리 그래도 술 취한 남자를 여자 혼자 어떻게 감당하니?"

"그 건장한 남자 선배, 조금 전까지 유진이가 혼자 감당하게 놔두셨잖아요."

주영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주영을 도우려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유진이 곤란한 상황에 있을 때 그랬듯이. 평소에는 학과의 유대감이 어쩌니 해도, 귀찮음을 감수하고 복잡한 상황에 선뜻 끼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주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연희의 말꼬투리라도 잡아 시간을 끌다 보면, 기다리다 지친 누군가 대신 형민을 챙겨주지는 않을까 하는 얄팍한 속셈이었다.

"그만 좀 해! 이 분위기에서 장사 되겠냐?"

마침내 침묵을 깬 사람은 부스 입구에 선 동훈이었다. 초반 부스 세팅을 마치고 사라졌던 선우와 혜진도 부스 입구에 막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매상을 올려주려고 들른 모양이었다.

셋 중 가장 먼저 걸음을 옮긴 사람은 선우였다. 흠칫하는 주영을 지나쳐 형민에게 다가간 선우가 픽, 웃었다. 형민의 한쪽 팔을 잡아 올리자 몸까지 스르륵 끌려 올라왔다. 눈은 꾹 감은 채였다.

"형민아, 정신 좀 차려 봐."

선우가 형민의 뺨을 가볍게 톡톡 쳤다. 형민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못 일어나겠어?"

툭. 툭. 내려치는 손의 강도가 조금 더 세지는 대신, 간격은 늘어났다. 감은 눈에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형민의 눈가에 주름이 잔뜩 생겼다.

"형민아?"

선우가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린 참이었다. 높이가 좀… 많이 높았다.

"괜찮아!"

입가까지 파들거리던 형민이 마침내 눈을 떴다. 벌떡 일어나더니 가방을 품에 안고 뛰듯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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