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닦아드릴게요."
통장에 모인 돈을 셈해보면서, 연희가 휴지와 물수건을 들었다. 현아의 구두를 닦으려 허리를 굽히고 손을 뻗었다. 현아가 연희의 손을 피해 발을 물렸다. 곧이어 벌떡 일어선 모양이 연희를 끌어올려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선우가 황급히 일어나 현아를 말렸다.
"이래서 아무 직원이나 들이면 안 되는 거였는데. 얼른 매니저 불러와!"
선우의 아버지가 호통을 쳤다. 대놓고 연희를 무시하면서.
"그만해라."
과열된 분위기는 정 회장이 입을 열고서야 가라앉았다.
"현아는 어려서 그렇다 치고, 자네까지 왜 이러나. 그 정도 위치면 실수에 관대할 줄도 알아야지."
"그래요. 당신도 성질 좀 죽여요. 사회적 위치라는 것도 생각 좀 하고요."
선우의 어머니가 말을 더했다. 부드럽고 차분한 말투였으나 차가운 위압감이 느껴졌다. 선우의 아버지가 금방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구두는 그냥 버려야겠구나. 박 기사한테 전화해서 여벌구두 가져오라고 하렴."
선우의 어머니가 상황을 정리하는 동안, 연희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티 나지 않게 선우를 바라보기에는 이편이 나았다.
몰래 본 선우는 손으로 입가를 꾹 누르고 있었다. 당황스럽고 걱정된다는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표정을 숨기는 행위에 불과했다.
무언가가 깨졌다.
그거면 되었다.
가면 같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는 것만으로 안도감이 일었다. 내내 참고 있다가 겨우 숨 한 자락을 터뜨린 것 같은 얼굴을, 연희는 마음속에 새겼다.
"고마워."
홀 매니저에게 한참을 혼나고 식당을 나오자마자 인사말이 툭 떨어졌다. 연희가 나오기만 기다렸다는 듯 불쑥 나타난 선우가 내민 말이었다.
"아직 여기 있었어요?"
"인사하려고."
"제대로 숨 좀 쉬었어요?"
"덕분에."
선우가 보란 듯 숨을 크게 내쉬어 보였다.
"구두 값 물어내라고 하면 선배한테 내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그럴 필요는 없겠더라고요."
"어머니가 대외적으로는 너그러운 편이라."
"아…. 네."
"…그럼 갈게."
조금 머뭇거리던 선우가 결국 입을 다물고 돌아섰다. 오늘은 좀 봐줄 만한 뒷모습이었다.
"선배."
작은 목소리인데도, 용케 알아들은 선우가 뒤를 돌아봤다.
"난 선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생각은 없어요. 나도 내 나름의 상황이 있고, 또 선배랑 나는 생각이 많이 다른 거 같으니까."
"……."
"그래도 지나치게 힘들 때는…."
"……."
"말해요. 가능한 만큼은 도울 거니까."
선우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눈매가 접히고,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선우의 '진짜' 웃음을 발견한 날이었다.
* * *
대학 축제가 시작되었다.
연희가 다니는 대학은 인근 지역에서 구경 올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했다. 봄에는 분홍색 벚꽃 잎이 색을 담은 눈처럼 흩날렸고, 여름에는 생명력 가득한 녹색 나무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가을에는 붉고 노란 단풍잎이 화려했다.
5월인 지금은 하얀 아카시아 꽃이 곳곳에 피어 진한 향기를 뿜었다. 붉은색 장미는 담장 위에서 봉우리를 맺었고, 이름 모를 각양각색의 풀꽃 또한 대학건물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배열된 가로수 앞에는 스무 개가 넘는 부스가 죽 늘어서 있었다. 학생회관부터 후문까지 이어진 행렬은 꽤 길었다. 삼삼오오 모인 학생들이 부스를 구경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물건을 사고파는 소리가 요란했다. 일찍 준비를 마친 부스는 이미 매상을 꽤 올렸을 시간이었다.
연희가 일하는 부스는 운동장에 자리 잡았다. 주점은 주간 강의가 끝난 6시에 오픈될 예정이었다. 공대 건물 꼭대기에 박힌 원형 시계가 5시 30분을 가리켰다. 대강은 준비가 끝나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부스는 엉망진창이었다. 충분하지 않은 재료가 부스 구석에 두서없이 쌓여 있었다. 연희가 식재료를 들고 나르는 사이, 후배들은 식탁과 의자를 든 채 보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여기 놓으면 돼요?"
"다시 아까 있던 대로 옮겨 봐."
갈팡질팡하며 조리대며 의자와 식탁 배치를 바꾼 것이 벌써 네 번째였다.
한 시간 전에 도착해서 시키는 대로 움직였건만, 이토록 준비에 진전이 없을 줄은 몰랐다. 처음에 발전기와 멀티탭조차 준비되지 않았다고 했을 때의 황당함이란.
"너만 믿으라며? 네가 다 알아서 준비하겠다며?"
부스에 들른 원준이 추궁하자 보나가 중얼거렸다.
"좀 깜빡할 수도 있지…."
"물은?"
"이제 사려고."
"어제 미리 장 본다고 하지 않았어?"
원준의 말투가 급격히 날카로워졌다.
"정신이 없어서 몇 개 빼먹었나 봐. 갑자기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보아하니 오전에 생각난 몇 가지를, 들고 올 수 있는 만큼만 사 온 것 같았다. 계란말이를 하자더니 계란이 없었고, 김치찌개를 하자더니 김치가 없었다. 설탕과 소금은 있지만 간장과 고춧가루가 없었다. 떡은 있는데 어묵이 없고, 국자는 있는데 뒤집개가 없었다.
"그럼 다른 사람에게라도 부탁을 했어야지!"
"부탁했는데 걔가 잊어버린 거야!"
어느새 목소리를 키운 보나가 경미를 쳐다봤다.
"경미야, 왜 그랬어? 사정이 있으면 나한테 미리 얘기를 했어야지."
사람들의 시선이 경미를 향했다. 경미가 어리벙벙한 얼굴로 보나를 보자, 보나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이후부터 보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후배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자신에 대한 불만이 입에 오를 시간이 없도록 미리 군기를 잡는 것이었다. 동시에 정신없이 일거리를 만들었다. 탁자와 의자 배치를 몇 번이나 갈아엎은 이유였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주변 부스는 진작 준비 끝냈던데. 우리만 이게 뭐냐?"
그래도 불만을 다 막을 순 없었다. 그래서 보나는 자신의 이름을 대신할 만한, 비교적 만만한 사람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트집을 잡았다.
"다은아! 해주야! 내가 어제 정신없다고 했으면 너희들이라도 좀 챙겼어야지. 경미야 원래 어리바리하다고 쳐도."
졸지에 이름이 오르내린 사람들이 황당한 표정을 애써 갈무리했다.
"자자. 이럴 시간에 얼른 뭐가 더 필요한지 파악부터 하자."
혜진이 나서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오늘의 투입 조는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응원하러 들렀다가 팔을 걷어붙이게 된 혜진이었다. 경험자의 지시에 따라 누군가는 학생팀에 배선을 알아보러 떠났고, 누군가는 자취방에 있는 프라이팬과 냄비를 가지러 떠났다.
"혼자 괜찮겠어?"
혜진이 부족한 식재료를 적은 쪽지를 건네면서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
"네."
"누구 연희랑 같이 마트 가서 재료 사 올 사람 없니?"
혜진이 외쳤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아까부터 날이 선 보나가 다른 일을 할 틈을 주지 않은 탓이겠다. 그렇다고 해도 대답조차 않는다는 건 거절의 의사가 분명했다.
"어쩌지?"
혜진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괜찮아요."
정말이었다. 자신을 껄끄러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느니 혼자 일하는 게 나았다. 가파른 계단을 몇 번 왕복해야 하더라도.
"아까 보나가 멀티탭 받으러 갈 땐 그렇게 우르르 몰려갔으면서 너무들 하네, 정말."
씁쓸한 웃음을 삼키는데 혜진이 갑자기 "아!" 하며 손뼉을 쳤다.
"근처에 선우 있을 텐데. 연락해 볼까?"
"선우 선배는 오늘 일이 있어서 못 오신다고 들었는데요."
이미 선우에게 도움을 청한 누군가도 거절당했다고 들었다. 자가용을 가진 선배 리스트에 선우가 껴있는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 그럼에도 버스를 타고 다니는 걸 보면 운전을 즐겨 하지는 않는 것 같고.
"내가 부탁하면 도와줄지도 몰라."
걘 내가 부탁하면 잘 들어 주거든, 하며 혜진이 싱긋 웃었다.
"아니에요. 그리 무겁지도 않을 거예요."
"이렇게 살 게 많은데? 아니면 나라도 같이 갈까?"
연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혜진이라도 있어야 이 정신없는 부스가 어찌어찌 돌아갈 것이다. 많이 무거우면 배달을 부탁하고 급한 것만 먼저 들고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가게 앞에서 물건들을 꺼내놓았을 때는 1, 2년이라도 인생을 더 산 사람의 말이 진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달이 바로는 안 돼요?"
"지금 주문 밀려서 난리도 아니야. 한두 시간은 기다려야 할걸?"
곧 부스를 시작해야 하니 오래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들고 가자니 너무 많았다. 무게는 둘째 치고 부피가 너무 컸다. 계란은 또 어떻게 옮겨야 하나, 막막해 할 때였다.
"지연희!"
익숙한 목소리에 뒤돌아보았다. 예의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온 선우가 연희 앞에 섰다.
"혜진이한테 전화 받았어. 뭐 하면 돼?"
아무렇지 않게 물어 왔다. 학교에서의 실랑이도, 식당에서의 해프닝도 없었던 것처럼.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혜진이 부탁받아서 온 거야. 너 때문이 아니라."
너무 오래 쳐다봤을까? 선우가 눈을 내려뜨며 강조했다.
"알아요."
연희는 계산이 끝난 물품 쪽으로 몸을 돌렸다. 뒤쫓은 선우가 연희보다 한발 앞서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트렁크에 차곡차곡 짐이 실렸다.
"급하게 나왔어요?"
"아니."
연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우의 등 뒤에 주름진 셔츠가 삐져나와 있었다. 뻗친 머리도, 수염이 돋아 거무스레한 턱도, 구겨 신은 운동화도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뒤를 돌던 선우와 눈이 마주쳤다. 연희는 눈을 피하는 대신 선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혜진이가 전화해서 한숨 쉬더라고."
결국 선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신의 뒷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이 어딘지 모르게 쑥스러워 보였다.
"후배들 있어서 말은 아끼는 것 같은데."
"……."
"개판이구나, 했어."
대단한 행사였다. 별생각 없이 구경 온 혜진이 발 벗고 나서게 만들고, 적당히 자리만 채우려 했던 연희가 바삐 뛰어다니게 만들고, 단정한 선우가 이렇게 엉망진창인 모양새로 뛰쳐나오게 만들 정도라니.
"풋."
난데없이 웃음이 터진 것은 그래서였다.
연희의 웃음에 당황한 사람은 선우였고.
"…내가 너 웃는 거 처음 보는 건가?"
연희의 웃음을 한참이나 눈에 담던 선우가 물었다.
"뭐가 이상해요?"
'또 무슨 말을 하려고요?', 의심하는 눈이 선우를 응시했다. 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새까만 동공에 연희를 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