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홀 매니저의 허락을 받은 연희가 서빙 카트를 끌고 방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들린 목소리는 선우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장인어른. 이 사업은 정말 가능성이 있다니까요. 사업 분야 확장 없이 기업이 어떻게 성장합니까?"
"장인어른 말고 회장님이라고 부르라지 않았던가?"
정 회장의 눈썹이 위로 솟고, 입가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도 선우의 아버지는 사람 좋게 웃기만 했다.
"사석에서까지 그럴 거 무엇 있습니까?"
"사석에서 공적인 이야기를 꺼낸 게 자네 아닌가."
한쪽에서는 현아가 선우의 어머니를 붙들고 여행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유럽 배낭여행은 한번쯤 꼭 가보고 싶다니까요?"
"굳이 배낭여행이어야 해? 편하게 그냥 우리 호텔 체인에서 묵으면 좋잖아."
"그럼 친구들이랑 이것저것 알아보는 재미가 없잖아요."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으나 선우는 어디에도 끼지 못했다. 그저 제 앞에 놓인 접시 위 음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선우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까 연희가 매화실 문을 열었을 때 선우의 놀란 얼굴을 본 사람도 물론 없었으리라.
직원이 한 공간에 있으면 말조심이라도 하려나 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연희는 식당에 딸린 한낱 소품과도 같았다.
"선우는 언제까지 우리 집에 둘 거예요?"
문을 닫는데 카랑카랑한 소리가 들렸다. 거리가 있어 다른 테이블에서는 들리지 않을 테지만, 문가에 바싹 붙어 있는 연희에게는 들릴 만한 크기였다.
"밖에서라도 '오빠'라고 좀 해라.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니?"
소리는 계속 새어 나왔다.
"뭐 어때요, 진짜 오빠도 아닌데."
"……."
"진짜 내 오빠는 뼛가루만 남았잖아요. 누구 때문에."
"현아야!"
정 회장의 외침과 함께 쾅, 테이블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잔뜩 움츠러든 선우의 어깨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다음 메뉴를 전하러 들어갔을 때 선우와 그 아버지는 자리에 없었다. 연희는 저도 모르게 식당 안팎을 빠른 걸음으로 둘러보았다.
예전에 선우가 토악질을 했던 곳 근처에서 독한 담배 냄새가 흘러왔다. 비스듬하게 경사진 벽 뒤에 섰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대화하는 소리는 그럭저럭 들을 수 있었다.
"회장님께 못 하겠다고 해라."
까다로운 장인어른의 비위를 맞추던 살가운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권위적인 말투에 짜증이 선명히 배어 있었다.
연희는 가만히 그들의 대화가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타인에게 호기심을 갖는 것도,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도 이전에는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럴 수 없는 거 아시잖아요."
"회장님이 무슨 뜻으로 널 내 호텔에 들이라고 하는지, 내가 모를 거 같아? 나 감시하겠다는 뜻 아니야?"
"지나친 생각이세요. 남들 보는 눈도 있고 하니, 이왕이면 가족이 경영하는 곳에서 인턴 경험 쌓아 보라고 하신 거잖아요."
"가족이라고?"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또 한 번 담배 연기가 훅 날렸다.
"넌 우리가 가족이라고 생각하니?"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연희는 선우의 표정을 상상해 보았다. 언젠가 이곳에서 마주쳤던 것처럼, 그렇게 애처롭게 굳어 있으려나?
"호텔에서 기어코 너한테 한자리 내주려는 늙은이 속, 내가 모를 것 같으냐? 알면서도 잠자코 있었다. 왜일 것 같니?"
"……."
"네가 주제파악하고 알아서 거절할 거라고 믿어서야. 내가 호텔에는 발도 들이지 말랬지? 그건 내 거야. 지금이야 네 양어머니가 사장이고 내가 그 아래 있다지만, 내가 언제까지 이 꼴을 두고 볼 것 같니? 사장 자리는 내가 곧 가져올 거고, 너는 내 인사 계획에 없어."
"생각하신 바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빨리 거절해. 어디 유학이라도 가겠다고 하든지. 내가 보내줄 테니까."
"…어차피 제가 이야기해도 할아버지는 안 들으세요."
"그러니까 재주껏 잘 구슬려야지. 그 좋은 머리 뒀다 어디에 쓸래?"
'머리'라는 단어가 들릴 때쯤 무언가를 툭툭 치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잘해라. 네가 먼저 성의를 보여야 나도 네 진짜 가족한테 뭔가를 더 베풀 맛이 나지 않겠어?"
"그건 이미 어머니가 약속하신 부분…."
"알잖아? 네 양어머니가 얼마나 인색한 사람인지."
"저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선우 아버지가 씩 웃었다.
"네 가족들은 부족하다잖니. 지난주만 해도 네 동생이 나 찾아왔다. 지금 돈으론 개인 레슨비도 부족하다고 하더라. 애초에 주제도 모르고 그 비싼 사립 예고에는 왜 들어가서…."
"……."
"너나 네 동생이나 마찬가지야. 남의 호의를 구걸해서 얻은 자리를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잠깐 빌려 앉은 자리를 자기 자리라고 착각하면 안 되지."
구둣발로 땅을 비비는 소리가 들리더니 흘러나오던 담배 연기가 옅어졌다. 홀린 듯 서 있던 연희가 정신을 차리고 급히 자리를 떴다.
연희는 매화실로 마지막 메인 요리를 내갔다. 서빙 카트에 샥스핀과 버섯을 곁들인 소고기 볶음 요리 접시가 담겼다. 인원수만큼의 앞접시와 집게, 국자 따위도 함께 실었다. 매끄럽게 굴러가는 바퀴와는 달리 연희의 속은 복잡했다.
연희가 서빙 카트에 있던 것들을 식탁 위에 내려놓는 동안, 정 회장이 앞에 놓인 샥스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상어 지느러미를 잘라낸 뒤에 상어가 어떻게 되는지 아니?"
"어떻게 되는데요?"
현아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필요한 부분이 사라졌으니 다시 바다에 버려진단다. 아무리 몸통이 큰들, 어부들에게는 쓰레기일 뿐인 거지."
"그렇구나. 그럼 상어는 어떻게 되는데요?"
"헤엄을 칠 수 없게 되었으니, 바다에 돌아가 봤자 죽고 말지."
"그것 참 안 됐네요."
"쓸모가 없어진다는 건 그런 거란다."
안 됐다는 말과 달리, 현아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제 앞의 음식을 바라보았다. 짓궂은 시선은 선우에게로 옮겨갔다가 다시 음식으로 돌아왔다. 선우의 시선이 접시 위 그것에 제대로 닿아 있는지 확인하듯.
"근데 할아버지, 전에도 이 얘기 하셨던 거 아세요?"
"네가 묻는 말도 전이랑 똑같구나."
전혀 우습지 않은 이야기 같은데, 회장의 너털웃음과 현아의 명랑한 웃음이 뒤섞였다. 웃음 속에 깃든 것은 누군가를 향한 경고, 혹은 적의였다.
우욱.
웃음 사이로 작은 헛구역질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자, 선우가 입가를 가리고 있었다.
저들만의 대화에 빠져있던 가족들이 일제히 선우에게 눈을 돌렸다.
"넌 아직도 비위가 그렇게 약해서 어디에 써?"
선우 아버지의 질책을 시작으로,
"빼지 않고 골고루 먹는 것도 사회생활의 일부다. 행동 하나하나마다 신경을 써야지."
정 회장이 말을 얹었다. 정 회장이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 준 게 기쁜지, 선우 아버지가 어깨를 반듯이 폈다. 현아는 보란 듯 음식을 더 얹어주었고, 선우 어머니는 주전자를 들어 제 몫의 차를 더 따랐다.
잠깐의 관심은 선우가 젓가락질을 시작하자 금방 수그러들었다. 오늘 나온 음식을 품평하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방을 채웠다. 물론 선우의 목소리는 없었다.
저들은 알고 있을까? 선우가 이곳 밖에서는 어떤 사람인지. 대단한 기업의 이름을 빌리지 않아도 얼마나 존재 자체로 빛나는 사람인지.
연희가 여러 개의 앞접시에 요리를 나누어 담았다. 상석의 정 회장과 그 오른쪽에 앉은 선우 어머니와 아버지, 정 회장의 왼쪽에 앉은 현아 앞에 덜어진 음식이 놓였다.
가볍게 목례하고 자리를 뜨려 할 때였다.
"여기는 안 덜어줘요?"
현아가 옆에 앉은 선우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한쪽만 치켜 올린 눈썹이 심술궂어 보였다.
"오빠가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에요. 많이 좀 담아주세요."
선우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저 자존심 강한 사람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후배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습까지 모조리 들켜 낯부끄러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차라리 서빙을 하겠다고 나서지 말 걸 그랬다.
후우.
연희가 남모를 한숨을 삼켰다.
아까 그 대화를 듣는 게 아니었는데.
선우에게 화가 난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 온당치 못한 대접을 받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선우가 얄밉게 굴 때와는 다른 의미로 참기가 힘들었다.
"얼른요."
눈을 내리깐 연희가 선우의 앞접시를 가져와 요리를 담았다. 과할 정도로 듬뿍 얹어 담았다. 이제 선우는 연희의 손을 응시하고 있었다. 연희의 동작을 따라, 선우의 시선이 서서히 움직였다. 그리고.
철퍽.
잠시 선우 자신의 손 위에 시선이 머물렀다.
선우가 앞접시를 받아들기 위해 내민 손에, 연희가 접시 대신 손을 부딪쳐온 탓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실수인 것처럼 보이기에 충분한 각도로 꺾어 일부러 힘을 뺀 손이 비틀렸다. 손에 들렸던 접시가 쨍한 소음과 함께 땅으로 떨어졌다. 접시 위에 수북이 얹힌 음식물 역시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지금 뭐…."
선우 옆에 앉은 현아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샥스핀 소스가 현아의 구두 위에 고스란히 튀어있었다. 구두에 감싸인 발등도 마찬가지였다. 파와 버섯, 양파 따위가 섞인 국물이 구토한 흔적처럼 어지럽게 널렸다. 일순, 식사 자리가 조용해졌다.
연희는 곁눈질로 선우를 보았다. 선우가 크게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막혔던 숨을 터뜨리듯 내쉬고는, 새로운 숨을 들이마셨다.
"아악."
정신을 차린 현아가 구두를 털어내며 아예 비명을 질러댔다. 연희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매뉴얼에 따른 것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변상은 제가…."
"이게 얼마짜리인지 알고 하는 말이야? 이거 이탈리아에 직접 가서 사온 한정판이라고!"
흠. 그 정도로 대단한 구두일 줄은 몰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