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달리 너 도와줄 사람 있어?"
게다가 난 꽤 잘나가고, 그래서 말발도 제법 먹히고. 나랑 잘 지내서 이득을 보면 봤지 손해 볼 건 없을 텐데…. 어쩌고저쩌고.
대체 날 뭘로 보는 거지?
"힘들다고 아무 손이나 잡을 생각은 없어요. 애초에 사람 갖고 장난치는 쓰레기가 싫어서 뻗대다가 여기까지 온 건데, 이제 와서 날 장난감처럼 보는 사람이랑 놀 순 없죠."
"오…. 그래?"
성의 없는 감탄사가 돌아왔다.
"그런데 우리 학과 위계질서 센 건 알고 있지? 하늘 같은 선배한테 이렇게 막 말해도 돼?"
"그깟 몇 년 먼저 태어난 게 무슨 대수라고요?"
그런 게 무서웠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선우의 말대로 진즉 사과하고 화해했으면 편했을 테니까. 조작된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체면을 세워주었다면 혼자 다닐지언정 공공의 조롱거리까지는 되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다른 이에게 끌려다니며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아까 조교한테는 아무 말도 못 했으면서."
연희가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팡팡 쳤다. 얼마 전 보나를 맞닥뜨렸을 때도 이렇게까지 열이 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귀먹었어요? 그때 말했잖아요! 비효율적이었다고요! 해봤자 감정만 낭비할 상황이었다고요!"
그리고 그걸 왜 선배가 신경 쓰냐고 물으려던 차였다. 선우가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근데 어떡하지? 괜히 복도에서 날 붙잡는 바람에 너 다음 강의에 늦은 것 같은데."
"……."
"지금 나랑 실랑이하는 건 비효율적인 짓이 아닌가?"
연희가 급히 옷소매를 끌어올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15분이 흘러 있었다.
한 방 먹었다는 생각에, 또 자기답지 않았다는 생각에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왜 그랬지?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화를 내버렸다.
"사실 난 네 이런 점이 제일 재미있어."
선우가 제 눈썹 쪽을 긁으며 말했다. 손 그림자 탓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뭘 말하는 거예요?"
"좆같은 일에 좆같이 들이받는 점."
연희의 눈이 커졌다. 선우 입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단어가 나왔으므로.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나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참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네가 지쳐버려서 내가 좀 섭섭하더라고."
"선배가 왜 섭섭한데요?"
"그냥. 재미가 없잖아."
본인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나?
"선배 재미있으라고 제가 발끈해대면, 뒷일은 누가 감당하는 데요?"
뻗어가는 생각을 막을 새도 없이 기가 찬 물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남의 힘겨운 싸움을 즐긴다는 게 저렇게 당당할 일인가?
"흠…. 덕분에 재미를 본 누군가가 함께 감당해야겠지?"
개소리였다. '함께' 무언가를 감당해 주는 사람은 지금껏 연희 인생에 없었다. 가족에게도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럼 선배나 그 좆같은 일에 좆같이 굴어보지 그래요? 나도 재미있으면 같이 감당해 드릴 테니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도발에, 선우가 한 방 먹은 얼굴을 했다. 하지만 곧 흥미롭다는 듯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래, 그럼."
시원스레 대답한 선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괜히 말했다는 생각에 한숨을 쉬려는데, 선우가 연희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나도 강의 늦었다. 빨리 가자."
저거 또라이 아냐?
연희는 거친 손길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빨라진 걸음은 어느새 선우를 앞질렀다. 뒤에서 선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화가 났는데, 경쾌한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아무렴 어떤가 싶어진 것이다.
* * *
"오늘도 정 회장 댁 들르시는 거 알죠? 준비 철저히 해요."
연희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 집안의 손주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더 이상 군에 매이지 않은 선우는 오늘 올까, 오지 않을까?
호기심인지 걱정인지.
괜스레 매화실에 나갈 예약 메뉴를 한 번 확인해 보았다. 그러다가 픽 웃었다.
선우와는 지난 언쟁을 끝으로 마주친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마무리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종잡을 수 없는 선우의 성격상 또 어떤 엉뚱한 말로 자신을 휘두를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딱히 피하고 싶다거나, 다시는 말도 섞고 싶지 않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심지어 정 회장 일가가 도착했을 때에는 걸음을 멈추고 행렬 끄트머리를 주시하기까지 했다. 충분히 자리를 피할 수 있었는데도.
화려한 성장을 한 가족 행렬 끝에는, 당연한 것처럼 선우가 있었다.
의도치 않아도 한 번에 긴 거리를 오가는 걸음은 얼마 전에도 본 것이었다. 웃지 않는 표정과 바닥을 향한 시선은 오랜만이었고.
나는 이게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거구나.
그리고 기대했구나.
이곳에 나타나지 않기를. 그러나 굳이 나타난다면, 학교에서처럼 당당하게 웃으며 걸어오길.
무언가가 발끝으로 툭 떨어진 기분이었다.
선우의 가족들이 한 사람씩 매화실로 발을 들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선우 역시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연희 또래의 여자가 선우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선우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선우를 밖에 남겨놓은 채 매화실 문이 닫혔다.
문득 뒤를 돈 선우가 연희 쪽을 응시했다. 눈이 마주쳤다.
곧 고개를 돌린 선우가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연희는 선우가 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마주한 낯빛이 기이하리만치 창백했으므로.
한창 바쁜 시간에 일이 아닌 이유로 경로를 틀면서도 길을 벗어났다는 의식조차 못했다.
선우는 화장실 벽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다 연희가 가까워지자 기다린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요?"
"아니."
지친 기색의 선우가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리고 이상한 질문을 했다.
"생리대 있어?"
"네?"
"하나만 있으면 빌려줘라."
황당함을 숨기지 못한 얼굴에 대고 선우가 급히 덧붙였다.
"현아가 하나 사갖고 와 달래."
"동생이에요?"
"…응."
"잠깐만요."
비상용으로 가방에 갖고 다니던 것을 하나 꺼내주면 되지 싶었다. 몸을 돌리는데 선우가 연희를 붙잡았다.
"좀 있다가 가."
"지금 가져다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나 곤란해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기분 더러워지라고."
우울한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선우가 까슬한 입술로 말했다.
"부탁이, 있어."
"뭔데요?"
재빨리 물었다. 그답지 않게 머뭇대는 말투에서 위태로움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지금 나랑 같이 여기서 나갈래?"
"네?"
오늘도 선우는 당황스러웠다. 웃긴 것은 이제 그 당황스러움에 적응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다음에는 대체 또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 할 정도로.
"숨을 못 쉬겠어서 그래."
증명이라도 해보이려는 것처럼 선우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슴에 납덩이라도 얹은 양 무겁게 느껴지는 호흡이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못 빠져나갈 것 같은데, 누가 손잡아 주면 가능할 것도 같거든."
"…일하다 말고요?"
"응."
"저 잘리라고요?"
"…그런가?"
벙 쪄서 보고 있으니 선우의 입매가 조금씩 옆으로 벌어졌다. 어느새 빙글대는 입가가 보였다.
그래. 이 표정 알지.
"지금 장난치는 거죠?"
괜히 긴장했네.
"귀. 한. 선배 가족분 오셔서 가뜩이나 정신없을 때, 일개 아르바이트생이 무단이탈을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남의 일자리가 걸린 장난을 꼭 쳐야겠어요?"
"무리인가?"
"당연하죠."
"그래도…."
연희가 두 팔을 교차해 팔짱을 끼는 동안, 선우는 다음 말을 고르는지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그래도 뭐요?"
"…생리대는 갖다 줘."
여유롭게 걸어가던 선우의 여동생을 떠올렸다. 귀여운 외모였으나 선우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얼굴이었다. 밖에서 봤다면 절대 가족이라고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잠깐 기다려요."
말함과 동시에 연희가 뒤를 돌았다.
잠시 연희의 등을 보던 선우가 고개를 내렸다. 한 손을 들어 입가를 막았다. 손가락 사이로 남몰래 중얼거리는 말이 새어나왔다.
그래도….
네가 그랬잖아. 같이 감당해 줄 수도 있다고.
선우가 입가에 두었던 손을 조금 올려 눈가를 문질렀다. 깨끗한 흰자위가 점점 붉어졌다. 이윽고 손을 내렸을 때는, 이미 멀리 가 있을 줄 알았던 연희가 서있었다.
"…뭐가 그렇게 힘든데요?"
주름진 미간에 걱정이 어려 있었다.
선우는 답하지 않았다. 현기증이 일어난 듯 잠깐 벽을 짚더니, 이내 등을 펴고 성큼성큼 매화실로 걸어가 버렸다.
"생리대 안 갖고 가요?"
연희가 외쳤지만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이걸 왜 그쪽이 가져와요? 난 분명히 오빠한테 부탁했는데."
매화실에 들어선 연희가 생리대를 건네자 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식당에 말씀 주시면, 손님용으로 구비되어 있는 걸 드리게 되어 있어서요."
거짓말을 하자, 현아가 손가락으로 생리대를 툭 치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남한테 얘기하기 부끄러워서 오빠한테 부탁한 건데, 오빠도 참 너무하네."
"……."
"게다가 내가 부탁한 브랜드도 아니고. 여기는 이 종류밖에 없어요?"
취향에 맞는 제품이 없는 걸 사과하라는 건가?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다행히 선우의 어머니가 중간에서 말을 막아주며 자애롭게 웃었다. 현아의 얼굴과 닮았으나 분위기는 달랐다. 기품과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러니까… 한 번 말이나 꺼내볼까?
"괜찮으시면, 오늘 서빙은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갑작스레 솟아난 용기를 빌려 연희가 말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누가 해도 우리야 상관없죠. 매니저님이 너무 신경을 쓰셔서 우리도 미안하던 차예요."
근처에 있어주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이런다고 해서 -꽤 만만하게 보는 후배가 만만치 않은 자리에 함께 한다고 해서- 선우의 막힌 숨이 뚫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약해진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싶지는 않았다.